2025. 12. 10.
순간, 기도할 결심을 하고 기도 순례에 나선 내가 한 기도는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당혹스러웠다. 통성의 형식으로 나와 한국교회가 해온 기도에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정신도, 영성사를 빛낸 영적 스승들의 지혜도 없었다. 고대 사막교부 에바그리우스의 가르침과도 거리가 멀었다.
“당신 자신의 소원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기도하지 말라. … 당신은 기도하기를 갈망하는가? 그러면 모든 것을 포기하라. 그러면 본질적인 것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중세 영성의 최고봉인 에크하르트의 생각과도 달랐다.
“나는 기도하되 나를 순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만일 내가 순수하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지 않을 수 없으며 내 안에 거하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생각하는 기도도 아니었다.
“기도란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꾸준히 배우고, 자기 것으로 만들며, 자신의 기억에 각인하는 것이다.”
유대교 랍비요 현자인 아브라함 헤셸의 통찰과도 무관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기도는 가장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일이며, 가장 세속적인 것이 아니며, 가장 실용적인 것이 아니다. 기도는 자기를 정화하는 행동이다. 기도는 경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은 가장 높은 영역, 신비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가장 높은 것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현대 영성의 거장 토머스 머튼이 얘기하는 기도와도 상관없었다.
“나의 기도는 무와 침묵의 중심에서 샘솟는 일종의 찬미입니다. 내가 무엇을 바라거나 구한다면 기도를 방해할 뿐입니다. … 나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분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입니다.”
이민재 지음, <기도, 되기>(도서출판kmc, 2025. 12. 02. 1판 1쇄 발행),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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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기도란,
나의 생각이나 말이 앞서기 전에,
고요히 머물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귀며,
나는 그분을 향하고, 그분은 나를 향하여
그렇게 깊어지는 사랑의 과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리는 것이다.
- 향린 목회 40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