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07.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전당을 굉장하게 짓는 것은 종교가 먹을 것을 다 먹고 죽는 누에 모양으로 제 감옥을 쌓음이요, 제 묘혈을 팜이다.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라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고려시대에 송도 안에 절이 수백을 셌는데 그 후 그 불교도 나라도 망했고, 이조 때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애급도 그렇고 바빌론도 로마도 그랬다. 그럼 성전이 늘어가면 망할 것은 누구인가?
석조 교회당이 일어나는 것은 결코 진정한 종교부흥이 아니다. 그 종교는 일부 소수인의 종교지 민중의 종교가 아니다. 지배하자는 종교지 봉사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도취하자는 종교지 수도·정진하자는 종교가 아니다. 안락을 구하는 종교지 세계 정복을 뜻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것은 지나가려는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빤히 알면서도 아니 그럴 수 없어 일시적이나마 안전을 찾아보려는 자기 기만적인 현상이다.
광야에 나가면 벌판에서, 바닷가에 가면 배 위에서, 밭에 가면 밭고랑에서, 길을 가다가는 우물가에서 예배하는 종교하고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무지한 군중을 찾아 가르치다가 저물면 그대로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같이 나눠 먹고, 밤이면 홀로 산에 올라 별을 바라보며 기도·예배하는 종교, 그러한 예수의 종교, 성당 없는 종교, 종교 아닌 종교는 지금 이 나라에 있나, 없나?
함석헌, <함석헌 전집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한길사, 1983. 7. 10. 제1판), 46-47.
=======================================
종교가 자기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자가 모이는 공간을 확보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과 제도가 경직화되고,
자기보존과 성장에만 관심하는 종교는 쇠락할 수밖에 없다.
실존적 개인의 고투와 역사와 사회의 현장을 놓치면 이미 종교의 생명은 다한 것이다.
외부적 치장과 공간은 내면의 깊은 샘을 추동할 때만 그 존재 의의가 있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종교는 먼저 말씀의 성전을 쌓아야 하고,
기도의 사람을 길러내야 한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신을 만나는 감각을 가르쳐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전능한 창조주의 신비한 숨결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생(生)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는 곳에서, 신의 열정을 발견하고,
탄식과 울분이 넘치는 곳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 향린 목회 39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