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06.
그 설명에서 요세푸스는 예수의 처형을 말한다. “빌라도가 … 우리 가운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고발한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유죄 판결했다”(JA 18.64). 그런데 로마 총독 앞에 예수를 반대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역사적인 고발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럴 것이다. 예수는 항상 현재 하느님의 통치를 말하니까, 그는 자기가 현재 통치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기가 “유대인들의 통치자/왕”이라고 주장하니까 그것은 곧 최고의 반역(majestas)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요세푸스의 문장 속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오직 “그”만을 고발하고 처형했다는 말이다. 요세푸스가 앞 문장에서 한 말은 예수를 “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활동가요 스승이라고 소개했는데, 이제 고발과 처형에 대해서는 전체 초점이 오직 “그”에게만 있다. 그들 “많은” 추종자 가운데 아무도 “그”와 더불어 처형당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동반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와 함께 심지어 체포도 당하지 않았다. 그것이 즉시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빌라도가 예수의 프로그램, 분파, 혹은 운동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폭력적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임을 뜻했다. 그런 해석은 로마의 법 이론과 실천에 근거한 것이다.
폭력적 저항에 대해, 로마는 그 지도자와 추종자 다수를 함께 십자가에 처형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년에 예루살렘에서, 시리아 총독은 “봉기를 획책한 자들 … 가장 유죄 판결받을 만한 자들, 대략 2천 명을 잡아서 십자가에 처형했다”(JW 2.75; JA 17,295)
비폭력 저항에 대해서, 로마는 지도자만 처형하면 추종자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200년대 초에 유명한 로마 법률가 율리우스 파울루스-황제는 그를 “매우 지혜로운 자”(Prudentissimus)라고 불렀다-는 로마 법률의 판례들-그런 법률의 의미로는 의견들-을 편찬했는데, “22항: 선동적인 인물들에 대해”란 제목의 글에서 이런 법적 판례를 남겼다. “선동과 소요를 획책한 자들, 혹은 대중의 소동을 부추긴 자들은 그들의 계급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하든지, 야수들에게 던져 주든지, 아니면 섬으로 귀양을 보내야 한다.”(The Opinionsdof Julius Paulus Addressed to His Son 5.22.1).
다른 말로 해서, 빌라도는 예수를 “선동과 소요를 획책한 자”로, “대중의 소동을 부추긴 자”로, 즉 무장하지 않은 활동가와 비폭력적 선동가로 정확하게 판단했다. 빌라도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결론은 요세푸스가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유죄 선고했다”는 설명에 뒤따른 조치로도 확인된다.
비폭력적 저항에서 그 지도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면, 그 추종자들은 비슷한 운명을 두려워해서 흩어져야 마땅하지만, 요세푸스는 왜 예수의 경우에 두려워해서 흩어져야 마땅하지만, 요세푸스는 왜 예수의 경우에 그렇게 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예수를 처형한 지 60년이 지나서도 왜 아직도 “크리스천들 무리”가 여전히 존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 때문에 요세푸스는 예수의 처형과 그 운동의 지속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빌라도가 … 우리들 가운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고발한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유죄 판결했을 때, 그를 무엇보다도 사랑하게 된 자들은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혹은 보다 강조해서 문자 그대로 “그들은 그에 대한 처음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요세푸스는 왜 지도자의 처형이 예상대로 그 운동을 끝내버리지 못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더구나 요세푸스의 저서 밖으로 잠시 나가서, 그보다 20년 뒤에 글을 쓴 타키투스도, “그 이름의 설립자인 그리스도”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왜 “크리스천들”이 계속되고 있는지를 똑같이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전염성 유행병에 비유하면서, 예수를 처형함으로써 “그 악성 미신은 잠시 멈칫했으나,” 다시 유다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번져 나갔다(Annals 15.44). 요세푸스에게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시들지 않는 충성심이 타키투스에게는 번져가는 유행병이었다. 그러나 두 저자 모두, 왜 지도자의 처형이 그의 비폭력 운동을 끝내야 할 목적을 이루지 못했는지 설명해야 했다.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한성수 옮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한국기독교연구소, 2024. 10. 30. 초판 1쇄), 31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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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너무나 무력(無力)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이 힘이다.
사랑은 끈질기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가치 중 제일이다(고전 13:13).
그나마 사랑을 알았던 유대인 요세푸스는 십자가 처형 이후
교회가 지속되는 것을 보고 “예수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런 사랑을 모르는 타키투스는 전염병으로 치부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기억하고, 그의 후계자로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또한 사랑 아닌가!
- 향린 목회 398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