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05.
둘째,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말하고, 이어서 하나님이 언급하시지 않은 내용을 덧붙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이 시기에 아담과 하와와 가인 말고 또 어떤 인간이 있었기에 가인을 죽인단 말인가? 이 궁금증 역시 성경의 빈자리에서 발생하는 질문입니다.
가인의 말에서 주목할 부분은, 하나님은 죽음을 말씀하신 적이 없으나 가인은 자신이 죽임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영적으로 이미 죽은’ 존재였다면 이런 공포심이 그리 대단한 의미를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물음은 ‘가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가 아니라 ‘이 죽음의 공포는 어디서 비롯되었는가’입니다.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타인을 죽여 보았기 때문에 자신도 죽임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가인의 내면에 깃든 두려움과 불안은 스스로 만든 폭력의 그림자입니다. 한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를 깨뜨리는 것은 땅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마저 끊는 행위입니다. 깨어진 수직적 관계는 다시 모든 수평적 관계가 깨어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창세기 4장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 하나님은 가인의 폭력에 앞서 그의 두려움을 보셨고, 죽음의 공포에 떠는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벌 논리가 아니라, 관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을 보여줍니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형벌이 아닙니다. 가인을 살해한 자는 일곱 번 살해를 당한다는 말도 아니며, 그의 가족을 포함해 총 일곱 명이 죽는다는 말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인을 죽이지 말라는 강한 경고이자 수사적 장치입니다. 그 목적은 가인이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려 죽는 존재가 되었다는 전통적인 창세기 이해는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는 구절과 맞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주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생명의 이야기라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됩니다.
송민원 지음, <태초에 질문이 있었다>(복있는 사람, 2025. 11. 4. 초판 2쇄 발행), 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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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질문을 던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송민원 박사가 잘 안내하고 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여러 질문들이 떠오른다.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나?
아벨은 무슨 잘못이 있어 연기처럼 사라지고 마는가?
가인이 제사를 지낼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등등
그러나, 어쩌면 성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것을 궁금해 할 줄 몰랐을 수 있다.
저자는 저자 나름대로 전하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에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먼저 누군가를 죽인 인간이 지닌 내적 공포라는 지적은 매우 의미 있다.
“가인의 내면에 깃든 두려움과 불안이 스스로 만든 폭력의 그림자”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지닌 두려움과 불안도 대부분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것 아닌가!
우리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 불안이나 증오가 아니라,
삶과 생명의 이야기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 향린 목회 39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