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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학술의 본질과 목적

by phobbi posted Nov 30, 2025 Views 20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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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1-30

2025. 11. 30.

 

저는 학술이 해야 할 일이란 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1밀리미터씩이라도 넓혀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평소 수련하는 무도(武道)는 인간의 신체라는 마이크로 코스모스내부를 깊게 파고 들어가서 그 구조와 기능에 관해 연구하는 활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학술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에 관한 저의 생각은 아마도 일반적인 철학 연구자와 좀 다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철학이 세계의 성립 과정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연구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저는 철학이 그보다 더 수행적인’(performative)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역할이란 단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기능을 향상하는 일입니다.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현명해지게 하는(똑똑해지게 하는) 입니다.

 

뇌의 기능 향상은 인류의 여명기부터 진화상 혹은 생존 전략상의 최우선 과제였음이 틀림없습니다.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요. , 그럼 어떻게 해야 뇌의 기능이 향상될까요? 지금부터는 저의 폭주적사변이므로 절반은 에누리해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뇌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가장 유효한 방법은 난제에 맞서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식견과 신체만으로는 간단히 대응할 수 없는 난제에 과감히 마주하는 것이지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만든 개척자들은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탈레스)라든지 만물의 근원은 불이다’(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 우리의 실감에는 좀처럼 수렴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군요. 완전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라고 쉽게 대응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제대로 반론할 수 있는가 하면 그럴 수도 없습니다. 아마도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상대로 논의해도 논파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애당초 탈레스와 헤라클레이토스도 자신들의 말을 확신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무심히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해 보니 그것으로 모든 세상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러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반론을 했지만 계속해서 논파할 수 있었다. ……와 같은 일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냥 그런 느낌이 들뿐 고대 그리스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아마도 고대 철학자들은 문득 생각난 가설을 둘러싸고 그 가설의 옳고 그름을 논의하는 일 그 자체가 그들이 속한 집단의 지성을 활성화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초월’ ‘외부’ ‘타자’ ‘()’ ‘()’ ‘()’ ‘()’ …… 무릇 철학적인 주제는 모두 우리 일상적인 경험지’(經驗知)를 갖고서는 맞설 수 없는 난제입니다. 모두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해서도 인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은 인지(人知)를 넘어선 존재이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 한 명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이라는 개념에 관한 일의적인 정의도 없지요. 인간을 넘어선 존재이므로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으로 회수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신이라는 개념을 그만 사용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개념을 사용해서도 신에 대해 대화하고 논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개념을 사용해서 대화하고 논의할 수 있다라니 굉장하지 않습니까?

 

우치다 다쓰루 지음/박동섭 옮김, <무지의 즐거움>(도서출판 유유, 2024. 11. 4.), 15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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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만 계속 생각해 보는 것,

아니 모르니까 그래서 계속 생각해 보고 얘기해 보고,

그래서 조금씩 깨우쳐 가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언제나 배움이란 미진한 것을 남기기 마련이다.

해도 해도 부족하다는 그 느낌,

그런데 그 느낌과 미완성의 갈증을 견디지 못하면 공부를 하지 않게 된다.

이미 알았다고 착각하면서 교만에 빠지기도 하고,

긴장을 놓아버리고 공부를 포기하기도 한다.

지적 성실성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학문은 그래도 앎에 도달할 가능성을 두고 진행하는 것이지만,

신학은 대놓고 앎에 도달할 수 없음을 두고도 진행한다.

모르면서 떠들기인데, 우치다 선생의 말대로 정말 굉장한 일이다.

이 재미에 빠져서 나 또한 수십 년을 헤매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재밌는 것이 또 어디 있겠나!

 

- 향린 목회 39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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