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 29.
군중에게 있어 사랑이라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사랑을 계속 이야기했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빵을 해결해 주는 것이고, 병을 고쳐 주는 것이고,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랑을 호소하고 있다. 군중이 예수에게 등을 돌린 것은 이 때문이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사랑’보다도 현실적인 것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망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예수를 떠나가게 된다. 떠나가면서 그들은 예수를 무력한 남자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엔도가 『예수의 생애』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는 철저하게 무력한 인간이다. 군중에게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고, 어떤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 무력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제 성서 속의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등 많은 기적을 행하는 데 반하여, 엔도는 기적과는 무관한 무력한 인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이는 엔도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단한 기적이나 문제 해결이 아니라 ‘사랑’이고,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초월적 능력으로 소경의 눈을 띄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하며 고통을 나누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엔도가 그린 ‘예수’는 기적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곁에 있어 주는 ‘동반자 예수’로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엔도의 ‘동반자 예수’는 무력했기에 성립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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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는 예수가 어떻게 “불행한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고자 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 이 ‘동반자’는 엔도가 세 번째 수술을 받을 무렵, 투병 생활 가운데 자신의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며 자신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였다. ~~ 엔도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들의 불행의 핵심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처참한 고독감과 절망이 늘 짙게 자리하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은 아니었다. 인간은 영원한 동반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예수는 알고 계셨다. 자신의 비애와 고통을 나누는, 함께 눈물을 흘려 줄 어머니와 같은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신이 아버지처럼 엄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고통을 나누는 분이라고 믿었던 예수는 그 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갈릴래아의 호반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신이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 하지만 인간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것이 아마도 이 방랑의 여행 동안, 지쳐버린 제자들과 지친 발걸음을 옮기는 예수가 지닌 질문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는 ‘사랑의 신’이 자신에게 응답하시는 음성을 들으셨는지도 모른다.”
이평춘 지음, <엔도 슈사쿠 문학 연구>(도서출판 어문학사, 2025. 3. 31. 초판 1쇄 발행), 1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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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유한성은 언제나 힘에 대한 숭배로 이어질 수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행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통을 해결해 주는 힘을 추구하게 하고,
또 그런 힘을 얻으면, 힘을 추앙하고, 그 힘을 숭배하게 된다.
돌로 빵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슈퍼맨 추구는 결국 세상을 지배하려는 욕망 때문에
사탄에게 무릎 꿇고 절하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힘을 추구하면,
일어나는 일은 결국 전쟁에 의한 파국 뿐이다.
이러하기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틸리히는 ‘사랑’과 ‘정의’와 ‘힘’이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 말이 참으로 옳지만,
이 셋의 균형을 잡기가 어렵다면 우선적으로 힘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무력하더라도.
- 향린 목회 39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