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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존재가 곧 기도가 되도록

by phobbi posted Nov 08, 2025 Views 25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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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1-08

2025. 11. 08.

 

인간의 추론하는 정신과 오감(五感)은 대상들(개념적 대상이든 물리적 대상이든)을 다루며 인간의 감정, 생각, 지각, 언어, 자극, 피드백을 형성하고 그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반적인 인식, 인지방법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면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심층 활동에 우리가 다다르려면(R. S. 토머스는 우리의 경계와 하나님의 경계가 동일하다고 말했다) 오감이 침묵 속에 머물도록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자극에 길들어진 우리는 침묵의 깊은 수준을 처음 대면할 때 지루함을 느끼거나, 무언가 결핍되어있다고 느끼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인내심이 자라면 내면의 침묵은 다르게 경험된다. 지루함이 아니라 충만한 광활함의 자유로운 흐름, [얽매임에서] 해방되는 평화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평화 안에서 모든 대립은 사라진다. 아니, 그 속에 모든 대립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당연히 지루함과 열정이라는 대립도 포함된다. 이 침묵의 영지에서 우리는 점차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고후 5:7) 법을 배운다.

 

고백록(Confessions)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신 까닭은 우리가 내면으로 돌아가’(46:8) 거기서 주님을 찾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다. 속마음(heart)은 생각과 감정이 있는 곳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의 바탕이 되는 내밀한 심층을 일컫는 말이다. 속마음은 앎의 중심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만난다. 역사적 예수는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었지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감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기에 우리는 추론하고 상상하며 지각하는 차원보다 더 깊은 곳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에 이끌린다. 우리의 속마음은 그 현존 안에서 즐거워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하듯 여기서, 속마음의 깊은 침묵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 위에 든든히 서있는 기도를 지루함이 괴롭힐 때, 이 지루함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이해하려 노력하던 오감이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침묵으로 이끌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도가 깊어지면 몇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기도는 이제 우리가 행하고 생각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단순한 현존’(just being)이 된다(단순한 현존을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기 시작한다). 익명의 저자가 쓴 내밀한 권고(The Book of Privy Counseling)는 이 차이를 당신이 어떤 모양으로 존재하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사실’(not what you are but that you are)의 차이라고 말한다. 이때 추론하는 마음이나 생각하는 마음의 역할도 변한다. 스펀지가 아무리 바닷물에 푹 적셔져도 넓은 바다 자체일 수는 없듯이, 우리는 오감이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와의 관계에 깊이 이끌려 들어간다. 우리는 이 관계에 이끌려 내면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면서 마음의 새로운 차원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이를 마음의 꽃’(flower of the mind), ‘마음의 극치’(apex of the mind), ‘영혼의 불꽃’(spark of the soul) 등으로 불렀다. 마음 표면의 역할은 줄어든다. 기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며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기도를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지금 기도를 바르게 하는 걸까?” 지루함이나 무미건조함은 이 변화의 표시이기도 하고, 이러한 변화를 촉진하기도 한다.

 

비유로 말하자면 기도는 마음이라는 나무의 여러 가지들, 즉 우리가 생각 자체에 깨어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무의 가지와 줄기를 타고 땅(신적 바탕)에 깊이 자리 잡은 뿌리로 내려가는 일이다. 우리는 점점(때로는 주저하기도 하면서) 생각을 비우려 애쓰기보다는 관상기도에 더욱 깊이 몰입하면서 뿌리를 향한 여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나 생각 또한 땅, 곧 마음의 바탕을 가리키고 바탕에서 나오며 바탕을 드러낸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마틴 레어드 지음/이민재 옮김, <기도수업: 침묵, 알아차림, 그리고 관상>(타임교육, 2019. 12. 16.), 10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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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기도를 오래 해보면,

그야말로 광활한 침묵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그 바다는 경계가 없다. 무한히 펼쳐진다.

그때 소리는 저 아득히 먼 곳에서 침묵의 바다 위를 타고 천천히 온다.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 본질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시끄럽다가 조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조용한데 가끔 소리가 오는 것이다.

 

오감을 통한 인식 작용이나 사유 작용을 멈추고,

그냥 존재하는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저자의 말대로 종종 기도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만들 때가 있다.

그때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존재자가 존재 속으로 스며들 때까지.

그렇게 되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

존재가 기도이기 때문이다.

 

- 향린 목회 370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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