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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를 넘어 환대로 | 김희국 | 2025-10-26

by 이민하 posted Oct 26, 2025 Views 16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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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10-26

창조절 여덟째주일 (평신도 강단교류)

“적대를 넘어 환대로”

(창 18:1-8, 롬 12:9-18, 마 25:34-40)

 

김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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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첫 부분에는 어느 시골 마을의 주교 신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신부가 국가로부터 받는 급여와 그 사용계획서의 세부 항목들이 장황하게 기술되는데 이 지출예산서는 작가인 빅토르 위고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총 16개 지출 항목 중 신학교와 종교 단체에 대한 지출이 6개 항목이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출 항목이 9개에 달합니다. 표에서 보시듯이 교도소 개선사업, 죄수 위문 및 구제사업, 빚으로 투옥된 가장들의 석방을 위한 지출, 교구 내 가난한 교사들의 급여 보조, 빈민 여성의 무료 교육 등이 있고, 자신을 위한 지출은 전체 급여의 7%가 채 안되는 1,000리브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 교회로부터 받는 ‘마차와 순회비용’ 지금으로 치면 ‘차량유지비 및 출장비’에 해당하겠지요. 그것으로는 빈민 병원의 환자에게 고기 수프를 제공하고 고아를 위해 쓰겠다는 예산표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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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서울시에 있는 어느 장로교회의 헌금 지출내역서를 보겠습니다. 매월 교회 헌금 수입이 1억 원가량 되는데 그중에서 담임목사 개인을 위해 사용하는 금액이 사례비, 상여금, 연금, 목회활동비 등 무려 8천만 원에 달합니다. 소설과 현실, 나라의 차이, 시대의 차이 등을 감안하더라도 비교하기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너무나 참담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헌금을 담임목사 개인을 위한 현금지급기로 보는 모양입니다.

 

  소설은 이어서 주인공 장발장이 감옥에서 출옥해서 어느 마을에 들어가 숙소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남편을 잃은 누나의 자녀들이 배를 곯고 있는 것을 보다 못해 빵 가게의 진열장 유리창을 부수고 빵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에 붙들려서 감옥 살이를 하게 되는데 무려 12년이나 갇혀 있다가 만기 출소를 합니다. 마을 여관의 주인들은 장발장의 험악한 인상과 남루한 옷을 보고 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소를 거절합니다. 결국 밤거리를 헤매다가 그는 어느 불이 켜진 외딴집을 발견하는데 이곳은 그 마을의 주교 신부가 사는 관사입니다. 이 관사는 신부의 뜻에 따라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습니다. 신부의 이름은 Miriel Bienvenu인데 ‘Bienvenu’란 말은 주교를 흠모하는 마을의 신자들이 부르는 애칭으로서 Welcome, 즉 ‘환대’란 뜻입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신부의 이름에서 이 소설의 핵심 주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발장은 그날 밤 주교와 함께 살고 있는 주교의 여동생이 가장 아끼는 은촛대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그러나 다음날 경찰에 붙들려 주교 앞에서 대질심문을 받게 되고, 그때 주교는 자신이 그 은촛대를 장발장에게 그저 주었노라고 말하며 은접시마저 함께 장발장에게 줍니다. 평생을 살면서 가난한 하층민으로 무시당하며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던 장발장은 주교의 환대와 배려에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소설은 그 후 장발장의 회심과 선행을 통하여 Bienvenu, 즉 환대가 모든 인류가 마땅히 지녀야 할 기본 덕목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Bienvenu 주교의 입을 통해서 “그대에게 숙소를 달라는 사람에게 그 이름을 묻지 마라. 스스로 이름을 밝히기 거북한 자야말로 특히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고 소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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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창세기 18장에는 아주 무더운 한낮의 열기 속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현신한 나그네를 보자마자 얼른 장막에서 뛰어나가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리고 세 천사에게 머물기를 간청하고 극진한 환대를 실천합니다. 이 그림은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그림으로 유명한 유대인 화가 샤갈이 노년에 그린 것으로 바로 나그네를 환대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 <아브라함과 세 천사>입니다. 유대인 화가 마르크 샤갈은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의 작은 마을 비텝스크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도시에서는 살 수 없는 차별을 받았고, 비텝스크 마을의 절반 정도가 유대인으로 항상 노란색의 다윗별을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습니다. 샤갈은 20세기 후반까지 98년의 길 세월 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과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을 옮겨 다니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적대의 세계 속에서 환대를 갈망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그림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화합이라는 주제, 수난당하는 예수 등의 모습은 그의 이러한 경계인으로서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샤갈의 그림에서는 동물이나 식물들조차 세상의 일부분이 되고, 사람과 사물들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샤갈은 이 그림에서도 다양한 원색을 자유롭게 사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며, 우리 시대에 더욱 절실한 환대의 의미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바탕의 붉은색은 환대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합니다. 세 천사를 자세히 보면, 그들이 입은 옷의 색깔이 희색, 보라색, 파란색으로 모두 다릅니다. 또한 머리카락 색깔도 약간씩 달라 보입니다. 그리고 왼쪽 두 천사의 날개는 하얀색이고 오른쪽 끝에 앉아 있는 천사의 날개는 노란색입니다. 마치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피부색이 다른 여러 인종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전체주의의 광기와 폭력을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샤갈은 이 그림을 통해서 하나의 이념을 절대화하면서 다른 생각들을 파괴하는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한 색깔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하여 타자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환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샤갈의 이 그림은 또한 환대에 대한 헨리 나우엔의 통찰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우엔은 “환대의 공간에서 낯선 사람은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춤을 추고, 또한 자기 소명을 따라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 환대는 주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라는 교묘한 초대가 아니라, 손님이 자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찾을 기회를 선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인의 색깔과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받는 손님의 색깔과 생각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참된 환대라는 것입니다. 

 

  샤갈의 그림 속의 세 천사도 마치 자기 집 식탁에 앉아 있는 듯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아브라함은 통상적인 주인과는 다릅니다. 식탁의 중앙에 앉아서 베푸는 자의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시중드는 종처럼 가장자리에서 두 손을 겸손히 앞으로 한 채로 서 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도 음식 그릇을 들고 천사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있습니다. 그림 좌측 상단과 중앙에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낙타를 타고 하란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환대가 절실했던 아브라함의 당시 나그네의 신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 상단에는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고 적대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파괴를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샤갈은 환대와 적대의 극적인 대조를 이 그림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태어난 순간부터 삶의 질이 대부분 결정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우리 선조들이 일본과 만주로 저 멀리 하와이와 미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외국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 우리나라로 오고 있습니다. 2024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이주민 수는 약 250만여 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5%에 달합니다. 그중에서 소위 ‘불법체류자’로 분류되는 미등록 이주민이 40만여 명이고, 그들의 자녀들 약 2만∼3만여 명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에 살고 있지만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입니다. 이 숫자는 초등학교 400∼500개에 달하는 큰 숫자입니다. 부모가 유효한 체류자격이 없으면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법을 어긴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추방되는 것은 아니고 ‘유엔아동권리협약’에 의해 학습권이 주어져서 고등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정부의 임시조치에 의해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상당수의 아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초등교육마저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학교생활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외국인등록번호가 없어서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을 할 수 없고, 공공기관 견학을 가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자원봉사 사이트에 가입도 안 되고, 티켓 예매 사이트의 회원 가입이 안 되니까 이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도 못 가고, 은행 계좌 개설도 못합니다. 이러한 소위 ‘비국민’ 이이들에게 배제와 좌절은 일상이고, 그들은 공부할 권리는 있으나 살아갈 자격은 없는, 작가 은유의 책 제목대로 ‘있지만 없는 아이들’로 자라는 것입니다. 우선 이주아동들에게 학번 같은 ‘등록번호’라도 주어져서 배움과 복지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학교를 마친 후에는 실존의 불안은 더 커집니다. 현행 법체계 안에서는 이들은 성인이 되면 언제든지 강제퇴거명령이 내려질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나고 자란 한국 땅을 떠나, 말도 안 통하고 친구 하나 없고, 가본 적도 없는 부모의 국적국으로 쫓겨갈 처지에 놓입니다. 단지 한 살 더 먹었다는 이유로 만 18세까지 살았던 나라에서 나가라는 것은 삶의 연속성을 깨뜨린다는 점에서 참으로 비현실적이고 몰인정한 일입니다. 또 한국에 남아 있더라도 단속을 피해 소위 ‘불법체류자로’서 저임금으로 그림자 노동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사실은 이들을 ‘불법체류자’라는 말 대신에 ‘서류미비노동자’ 또는 ‘초과체류자’라는 뜻의 ‘미등록이주노동자’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왔고 한국 경제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인류학자 김현미는 “소위 ‘불법 이주노동’은 비자 통제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관리하고자 하는 국가권력이 만든 것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거주민, 노동자, 세입자, 소비자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구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우리나라에서 살 수밖에 없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우리나라도 이 이주노동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들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가장 낮은 사회계층으로 1970년대에 전태일 열사가 고발한 노동 현실에 버금가는 참혹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지금까지 도맡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이주노동자가 산업재해의 위험이 아주 높은 소위 3D업종에 배치되어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합니다. 농축산어업 노동자들은 보통 하루 11시간 이상 일하고, 한 달에 고작 하루나 이틀쯤 쉽니다. 숙소는 흔히 비닐하우스 안에 설치된 낡은 컨테이너나 샌드위치 패널 구조물로 샤워 시설도 없고, 여름에는 찜질방 같고, 겨울에는 냉골이 됩니다. 이처럼 노동환경과 주거환경이 동시에 열악하다 보니 사철 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수년을 버티는 동안 병들거나 다치고, 결국 사망하는 일이 쉽게 생깁니다. 포천의 채소 농장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행 씨가 숨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 2020년 겨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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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들을 힘들게 하는 건 육체적 고통만이 아닙니다. 작업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욕설과 폭언, 심한 인격적 모욕에 시달립니다. 늘 ‘빨리빨리’ 하라는 지시를 받으며, 노예나 기계 부속처럼 취급받는 자신을 보며 자존감을 잃고, 일부는 당장 귀국하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올해에도 나주의 한 벽돌공장에서 지게차에 비닐로 둘둘 말려서 짐짝처럼 모욕을 당하는 비인간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등록이라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 그들은 정부의 단속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 기준에서 소위 ‘못사는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은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고 오직 노동력만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현재 고용허가제는 동남아 등 특정 국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입국한 날부터 3년 동안 한 사업장에서 일해야 합니다. 이 제도를 적용받는 이주노동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3회 이상 사업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이주노동자는 사용자의 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는 불리한 종속 관계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2024년에 나온 국가인권위 통계에 의하면 2022년 한 해 동안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수는 무려 3,340명이었습니다. 이는 국내 취업자보다 무려 네 배나 높은 숫자입니다. 이 중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사망은 4.1%에 불과한 137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살아서는 미등록 노동자로, 죽을 때에는 원인불명으로, 죽고 나서는 무연고 사망자로 취급된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그 모두가 한 가정의 가장이거나 소중한 가족이었던 이들 귀한 생명의 허망한 죽음에 대하여 아무런 애도도 하지 않은 채 일상을 영위해 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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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에 몽골에서 태어난 강태완 군은 6살 때 엄마를 따라 한국에 입국한 미등록 이주아동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명랑하고 활달한 개구쟁이였고, 비장한 표정으로 기합을 넣는 ‘태권소년’이었습니다. 강제퇴거가 유예되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친구들과 똑같다고 생각했고 별다른 차별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한국에 거주할 수 없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한국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신고한지 1년 만에 출국 일정이 잡혀서 몽골로 출국했다가 2022년 1월 한국의 2년제 대학에 입학하는 방식으로 90일짜리 단기 비자를 받고 한국에 들어옵니다.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다가 인구 소멸지역에서 5년을 일하면 ‘지역특화형 기주비자’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활용하여, 2024년 3월 당시 살고 있던 경기도 군포에서 많이 떨어진 전북 김제의 굴착기 제조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하였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며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나름 저축도 하면서 회사에도 기여하는 어엿한 직장인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을 하다가 불과 8개월 만인 11월, 시험 테스트 중이던 10톤짜리 건설기계 장비와 굴착기에 끼어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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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다문화’란 말만큼 기만적인 말도 없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민족 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을 추구한다’는 이 말을 ‘차이를 인정하지도, 공존을 추구하지도 않는’ 정부가 말하고 있는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다문화 가정’의 대상은 모든 외국인 가정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의 배우자와 결혼한 가정에만 붙는 딱지가 되었습니다. 인종관계·국제이주·불평등 연구자인 손인서는 ‘다민족 사회 대한민국’이라는 책에서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단 한 번도 다문화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 대상 교육프로그램은 ‘사회통합’보다는 ‘동화교육’에 가깝고, ‘다문화 사회’라는 알맹이 없는 명칭을 내세워 정부는 저개발국 출신 이주민을 착취하는 데 몰두하고 있고, 국내 이민법은 이미 차별적이기 때문에 큰 폭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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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현재 한국은 허구적 조어에 가까운 ‘다문화 사회’ 대신에 출신지와 민족, 또는 인종이 다른 여러 집단이 함께 살아가는 ‘다민족 사회’란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6살에 엄마를 따라 입국한 뒤 26년을 ‘미등록 이주 청년’으로 살아오다가 죽은 강태완 군은 체류자격이 없어서 ‘인종화’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외국으로 추방된 이주민 자녀, 병원과 요양원에서 간병을 도맡는 중국 동포들, 차별과 혐오에 시달리는 2세대 이주민 그리고 2024년 6월 무려 노동자 23명이 죽고, 8명이 다친 ‘역대 최악의 이주민 산업재해’였던 화성 아리셀 참사 피해자들은 모두 한국 정부의 잘못된 이주민 노동정책인 ‘인종 기획’이 만들어낸 부끄러운 민낯입니다. 

 

  예고 없이 방문한 이방인을 위한 환대, 보답을 기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상대방이 누구인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환대를 철학자 데리다는 ‘순수한’ 환대 혹은 ‘절대적’ 환대라고 부르며, 이는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아무리 선하고 개방적인 사람일지라도, 레미제라블의 Bienvenu 주교처럼 찾아오는 사람 모두에게 자기 집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조건이나 제한 없이 무엇이든 가져가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환대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 권리의 근거를 주인과 손님의 ‘관계 윤리’가 아니라 ‘인류에게 공동으로 귀속되는 지구 표면에 대한 공통의 권리’에서 찾았습니다. 칸트는 자신이 박애가 아니라 법적인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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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우리 잠시 지구 밖으로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달에서 지구가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해돋이’가 아니라 ‘지구돋이’이지요. 맑고 푸른 지구를 흰 구름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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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이 사진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명명한 ‘창백한 푸른 점’이란 영상입니다. 이 사진은 1990년에 우주탐사선 보이저1호가 지구로부터 약 61억 km 떨어진 태양계의 가장자리에서 촬영한 지구의 모습입니다. 이 사진에서 보듯이 지구는 끝없이 넓은 이 우주에서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리 역사 속의 모든 이들이 태양 빛에 떠다니는 저 작은 먼지 같은 점 위에 살다 갔고, 지금 우리도 이 티끌 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은 티끌 위에서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경계를 나누고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을 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우습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한 이 우주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인 지구의 크기는 한정되어 있고, 사람들은 지구 위에서 도시와 마을을 이루어 살 수밖에 없는 까닭에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본래는 어떤 사람도 지구상의 특정 지역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식물을 포함한 다른 어떤 생명체들보다 더 우선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낯선 손님을 집안에 들이는 것은 큰 모험이자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낯선 손님이 이방인이거나 외국인일 경우 더욱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그 손님이 환대를 고마워하면 둘은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거나 흑심을 품을 경우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환대의 예시를 들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 행동은 ‘절대적 환대’에 속합니다. 비록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전혀 모르는 타자에게 환대를 베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 비유를 보고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행하기가 몹시 어려운 비유를 내세워서 저 같은 평범한 크리스챤에게 마음의 부담을 주고 죄책감음 느끼게 할까?”하고 말입니다. 저는 성경의 비유를 시대와 환경에 맞게끔 해석하고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절대적 환대라 할지라도 사적 공간의 개방이 아닌 공공성의 창출을 통하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국가 또는 사회가 그 사회에 ‘도착한’ 모든 낯선 존재들을,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국경을 넘어온 이주자들을 조건 없이 환대하는 것은 상당한 정도까지 적절한 제도와 문화를 통하여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낯선 존재로 이 세상에 도착하여, 환대를 통해 사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번 ‘사람’으로 만들어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샤갈은 “모든 색은 가까운 색의 친구이고, 다른 편 색의 연인이다. 우리 삶에는 미술가의 팔레트처럼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나타내는 오직 한 가지 색깔만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과 모양과 삶의 방식의 차이는 적대의 이유가 아니라 바로 환대의 이유입니다. 다양성은 위협이 아니라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아브라함의 환대에 이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간청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는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하늘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위에 유황과 불을 비처럼 쏟아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찾아오는 나그네를 도외시하고 차별하고 적대시한다면 여호와의 심판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환대한 것처럼, Bienvenu 주교가 장발장에게 참된 환대를 베푼 것처럼 낯선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고 우리 사회 안에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기본 자격과 품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비슷한 색채의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색채의 사람도 연인처럼, 천사처럼 반기며 참된 환대를 베풀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실현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송사 (한문덕 목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힘차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의 자리가 늘 환대의 공간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강을 품어 안는 넉넉한 바다가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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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3 거리기도회 수요평화 "미지근한 곳에서 서성이는 사람들" | 유영상 | 2025-12-03
2025-11-30 주일예배 향린의 포대기에 감싸여 ㅣ 이영라 ㅣ 2025-11-30
2025-11-23 주일예배 마주한 낯섦 ㅣ 한문덕 ㅣ 2025-11-23
2025-11-16 주일예배 삶과 숨결이 녹아있는 ㅣ 김지목 ㅣ 2025-11-16
2025-11-09 주일예배 깨어남과 성장 ㅣ 한문덕 ㅣ 2025-11-09
2025-11-02 주일예배 슬기로운 선택 ㅣ 한문덕 ㅣ 2025-11-02
2025-10-26 주일예배 적대를 넘어 환대로 | 김희국 | 2025-10-26 file
2025-10-19 주일예배 성전으로 살아가는 우리 | 이원혁 목사 | 2025-10-19
2025-10-15 거리기도회 평화의 사도들 ㅣ 2025-10-15 ㅣ 한문덕
2025-10-12 주일예배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픈 일을 하라! ㅣ 한문덕 ㅣ 2025-10-12
2025-10-05 주일예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ㅣ 한문덕 ㅣ 2025-10-05
2025-09-28 주일예배 성찰과 조율 ㅣ 한문덕 ㅣ 2025-09-28
2025-09-21 주일예배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ㅣ 김지목 ㅣ 2025-09-21
2025-09-14 주일예배 진리가 무엇이오 ㅣ 한문덕 ㅣ 2025-09-14
2025-09-07 주일예배 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말 사이에서 ㅣ 한문덕 ㅣ 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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