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22.
예수라는 어떤 삶의 급진성도 세속의 체계, 즉 빌라도로 대변되는 제국의 체계와 가야바로 대변되는 유대 종교의 체계 사이를 양(羊)처럼 스쳐 지나가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그 신성한 이미지와 침묵 속에, 그 비상하게 낮은 자리 속에, 자리한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체계의 심문에 답을 하지 않는/못한다. 그것은 마치, 간통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모인 모방적 군중-안병무의 민중(the minjung)도 네그리·하트의 다중(the multitude)도 아닌-을 향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에게 첫 번째 돌을 던져라”라고 말한 다음, 그 메시아적으로 현명한 항의에 “가능한 한 많은 울림을 주기 위해 침묵을 지켰던 예수의 침묵”(『사탄』 80)과 일맥상통한다. 마치 예수의 그 침묵이 군중의 종교도덕적 허영을 ‘급진적으로’ 고발하는 것처럼, 민중의 원망(願望) 속에서 이윽고 신이 된 이 사나이는 제 땀과 제 피를 속절없이 다 쏟으며 종말을 고하는 그 역설(逆說)로써 세속에 웅변한다. 정치범의 자리에 내몰리기까지 내내 역설(力說)해왔던 그는, 그가 죽을 자리에서는 내내 침묵하는데, 그 역설과 침묵 사이에서, 제국의 유능(有能)과 신이 된 한 목수의 무능 사이에서, 미래적 인문(人紋)의 자기갱신적 급진성이 태어난다.
김영민 지음, <동무론: 인문연대의 미래형식>(최측의 농간, 신판 1쇄 발행 2018. 11. 15.),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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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예수를 아는 이는 저마다의 상(像)을 지닐 것이다.
제국의 냉정한 폭력과 강력한 신의 권위를 쥔 자들의 모함 속에서 침묵하며 무능하게 죽임당한 이가 결국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라는 역설(逆說)적 고백은 실로 위대하다.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설교자가 모든 억울함을 그대로 안은 채 침묵할 수 있다는 것에서 저자는 미래적 인문(人紋)의 자기갱신적 급진성을 찾아낸다.
내게 있어 예수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 중 하나는 바로 산상설교의 한 부분인데,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온갖 영화로 차려입은 솔로몬도 이 꽃 하나와 같이 잘 입지는 못하였다.”(마태 6:25-34)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다.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걱정과 염려를 모르고 살아가는 예수의 믿음과 삶의 태도, 들의 핀 꽃 한 송이에서 세상의 모든 휘황찬란한 욕망보다 더 큰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감수성, 공중의 새를 보며 하나님의 무한 은총을 깨닫고 누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것으로 이미 나의 구원자인 것이다.
- 향린 목회 353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