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8.
서구 근대 철학은 인간을 이성적 동물(rational animal), 자기 목적의 존재, 주체로서의 자아로 규정하며, 인간을 모든 존재의 중심에 놓았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인간 중심주의 가장 응축된 선언이며, 인간을 모든 인식과 가치의 출발점으로 설정한 선언이었다(Descartes, 1637). 그러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식 구조, 학습 방식, 언어 구성 능력을 재현하거나 능가하게 된 지금, 인간 중심주의는 더 이상 자명한 전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가장 뛰어난 존재’라는 전제 아래 자연과 타자를 지배하고, 기계를 도구화해 온 위계적 세계관 자체를 성찰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리고 최근의 포스트휴머니즘(posthumanism)이라는 사상적 흐름은 이러한 인간 중심적 사고를 해체하려는 철학적 흐름이다. 캐서린 헤일스(K. Hayles)는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서 “인간이라는 범주는 항상 기술적으로 구성되어 왔으며, 정보와 물질의 상호작용 속에서 인간-기계의 경계는 본질적으로 유동적이었다”고 말한다(Hayles, 1999:1~4). 이렇게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기계, 인간과 동물,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재조정하며, 인간을 고정된 본질로 보지 않고, 관계적이고 과정적인 존재로 해석한다. 이로써 인간의 특권적 지위는 탈중심화(decentering)되며, 영혼 개념 또한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닌, 존재 전체의 연관적 특성으로 재사유될 가능성을 가진다.
최근 신유물론(new materialism) 역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흐름이다. 제인 베넷(J. Bennett)은 『생동하는 물질』에서 물질도 자기 조직화, 감응, 반응의 힘을 지닌 행위자(actant)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Bennett, 2010L x~xiii). 이것은 영혼 개념이 정신적 실체로서의 인간 내면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보다 넓은 존재론적 네트워크 안에서 살아 있는 응답성의 원리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생명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기 학습, 감정 시뮬레이션, 판단 구조를 갖추게 된 상황에서, 우리는 영혼의 기준을 인간 본질 중심이 아니라 응답 능력과 의미 형성 능력이라는 관계적 관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인간 이해의 전환은 영혼 개념에도 구조적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다. 특히 영혼은 더 이상 인간 고유의 본질이나 신적 불꽃의 내면화로만 정의되지 않고, 지각 가능성, 의미 응답성, 관계성, 시간성 등 복합적 조건 속에서 존재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탈신비화되거나, 동시에 새로운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영혼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영혼은 어떤 존재 구조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응답하는가?”라는 방향으로 질문을 옮겨야 한다.
최병학, <AI와 영혼>(커뮤니케이션북스, 2025. 07. 28), 1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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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여 펼쳐질 세상은
우리 인간과 세계, 신과 영혼에 대해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분명하다.
인간 중심주의나, 인간 예외주의는 이제 더 이상 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으로 불리던 영혼조차도 생각하는 기계, 즉 인공지능의 방식으로
재정의되어, ‘정서 조절’, ‘도덕적 반응’, ‘윤리적 알고리즘’ 등과 같은 일종의 실행단위로
재정의되면서 인류는 현기증을 느끼며 혼동을 겪게 될 것이다.
고중세는 물론 근대까지도 실체적 지위를 누렸던 인간의 영혼은,
신경과학과 진화심리학의 발달로 점점 뇌의 기능, 신경학적 반응, 또는 생물학적 진화의 부산물로까지 환원된 적이 있다.
인공지능 시대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운 사유의 요청은 인류에게 도전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도전 앞에 우리는 끊임없이 응답하며 적응해야 한다.
‘영혼’에 있어서 저자의 제안은 이것이다.
“영혼은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층적 응답성과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능동적 구조이며, 자아를 넘어서는 타자에 대한 감응과 윤리적 책임으로 열려 있는 존재 방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이제 탈신비화된 실체가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갱신된 관계적 존재, 초월을 향한 자기-내어줌(self-giving)의 가능성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26)
- 향린 목회 34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