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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해석되지 않는 이해란 없다

by phobbi posted Sep 13, 2025 Views 30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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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9-13

2025. 09. 13.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모델을 상상했다. 이 모델은 문학 비평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어 왔다. 순환은 원래 텍스트(, 이른바 저자)와 독자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책의 독자가 텍스트에서 부분전체를 순환하며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A) 맥락(context) 없이 이해될 수 있는 단독적인 개념은 없다.

(B) 맥락을 구성하는 개념들에 대한 이해 없이,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는 맥락은 없다.

 

당신은 저 두 명제에 순환적 성격이 있음을 바로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좀 더 풀어 보겠다.

 

이 책에서 해석학적 순환의 가치는 문학 이론과는 좀 관련이 적으며, 사회-심리학과 관련이 있다. ~~ 슐라이허마허는 무언가를 이해할 때 이전에 알고 있었던 범주와 그것을 비교하게 된다고 논증하였다. 그는 어린이가 비교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예를 들었다. 어린이들은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이전에 정립한 의미 범주와 관련시킴으로써, 새로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내 조카가 이미 알고 있던 단어는 이었다. 조카는 둥근 것을 볼 때마다 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는 야구공을 가리키며 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구공, 테니스공, 비치볼을 보면 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카가 살면서 봐 왔던 둥근 것들은 대부분 공이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밖에 나갔는데 날씨가 맑았다. 그리고 조카가 달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이다!” 그때 우리는 조카가 이라고 말할 때, 공이 아니라 원형을 의미함을 알았다. 그러나 조카는 우리가 다른 둥근 물체를 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

 

조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이라는 범주는 그가 새로운 대상들을 만나면서 달라져야 했다. 그는 럭비공과 맞닥뜨리면서, 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몇몇 물체들은 다른 공들만큼 둥글지가 않다는 점을 배웠다. 그가 프리스비 원반을 맞닥뜨리면서, 모든 면이 둥글지 않은 원반도 공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 결국 조카는 연관 짓기를 통해 ’()게임같은 범주를 배웠다. 따라서 이제 조카에게 이란 단어의 개념은 전에 가졌던 개념과 다르다. 이 언어-범주는 그것이 원래 가졌던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해석이란 것이 계속 변하고 유동적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재해석이 지각 과정에서 필수적임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다. ~~

 

슐라이어마허는 사람이 필요에 따라 지각하여 구성할 수 없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 이 원리에 따라서, 이해란 끝없는 과업이다라고 썼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순환처럼, 해석과 지각은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춤춘다-서로가 서로를 이끈다. 이는 이해에 관한 슐라이어마허의 두 번째 정의로 이어진다: “해석되지(construed) 않는 이해란 없다.”

 

앤서니 르 돈 지음/김지호 옮김, <역사적 예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도서출판 110. 2018. 09. 10. 초판 1쇄 발행), 98-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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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위의 책, 97.).

 

사람들은 자신들이 볼 준비가 된 것만을 본다.”

 

해석학적 렌즈를 통해서 보자면,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된 것이 기억에 남는다면,

그것은 이미 해석 작용을 통해 이해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해석이나 이해의 과정은 이해 당사자의 과거의 기억, 몸의 상태,

자신의 관점이나 전이해 등이 모두 작용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고,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화가 되고, 서로 통하는 느낌을 받는 것이 정말 신기하고, 신비하다.

성서도 그렇게 끊임없는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늘 계속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는 아직도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 향린 목회 31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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