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20.
2. 한편 몸이 좋은 사람은 ‘산책’의 주체들이기도 하다. 자본제적 삶과 창의적인 불화를 일삼으려는 일련의 실천이며, 따라서 (다소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정치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이는, 내가 오랫동안 유지해오고 있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의 버릇이 정치사회적 실천인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이 ‘몸’은 권상우나 정다연 등으로 재현되는 그 ‘몸’이 아니다. 이 몸은 새로운 삶의 양식에 얹힌 채 응공(應供)을 향하여 지속되는 상호작용의 매체이지, 근육운동을 하거나 닭가슴살을 먹고 얻는 어떤 살의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이 좋은 사람은, 바로 그 진지함과 급진성으로 인해서, 세속의 몸짱-쏠림 현상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관계 형성의 주된 매체이자 형식이 된다.(물론 나는 이런 사람들의 형식을 ‘동무’라는 이념 속에 수렴하고자 했다.)
3.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은 응공(應供)이다. 이 말은 내가 불교 용어 중 하나를 새롭게 전유한 것으로서, 응하기와 이바지하기라는 두 의미를 합병한 조어다. 몸이 좋은 사람이란 한마디로 응하기의 달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응공이란, 좋은 응하기가 이미 좋은 이바지하기와 내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거꾸로 호혜적 이바지는 다시 현명한 응하기를 재생산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천국도 어떤 응하기의 형식 속에서야 개창(Erschließung)되며, 지옥도 어떤 응하기 속에서 가능한 지경인 것이다.
응하기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삶에서 다만 인간이 매일 실천하는 언행의 일반 형식에 불과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응하는 게 일상이며, 더 나아가 동물 및 식물과 더불어, 혹은 그 사이에서 적절히 응하는 게 또한 일상이고, 주변의 갖은 사물과도 유익하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는 게 우리 일상이다. 심지어 (귀)신이나 외계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응하기의 차원과 외연을 넓혀가고 있지 않은가? 동아시아 사상에서 주된 관심거리를 이루었던 윤리학의 실천의 요령 중에는 이른바 ‘응화(應和)’의 이치가 면면한 것이다. 천지자연과의 어울림이 노자(老子)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포함한 넓은 인간관계 속에서 적절하고 합리적인 응대의 순서를 얻는 게 유교이고,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연의 망(網) 속에서 현명한 응대를 실천하려는 게 곧 불교인 것이다.
4. 응공을 지향하는,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이 비근한 일상 속에서 나날이 확인된다. 일상의 조직 자체가 이미 응하기의 쉼 없는 연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겪는 삶의 질곡과 상처와 갈등과 우울은 거의 전부가 응하기의 실패 및 결락과 관련된다. 가령 ‘타인은 지옥L'enfer c'est les autres’이라는 사르트르의 명제는 이 같은 어긋남의 기저를 치는 언명이다.
김영민 지음, <자본과 영혼>(글항아리, 2019. 5. 6), 22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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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하기’와 ‘이바지하기’는 모든 수행(修行)의 목표일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천국이나 지옥도 결국은 ‘응하기’라는 삶의 한 형식일 뿐이다.
일상의 조직 자체가 응하기의 쉼 없는 연쇄이기에,
현명한 응하기를 통해 호혜적 이바지로 이어지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삶이고,
응하기의 실패 및 결락이 바로 지옥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이상을 가지고 말해 보자면,
천국이란 이웃을 넘어서 원수마저도 사랑으로 응하려는 부단한 노력 속에서
서로 사랑의 경지에 이를 때 완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옥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 실패 또는 자기 안에 갇힌 사랑이라고 하겠다.
- 향린 목회 29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