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한계와 위대성

by phobbi posted Aug 10, 2025 Views 19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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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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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8. 10.

 

말이 많으면 궁하다(多言數窮)거나 위험하다(佞卽殆)고 하는 데에는 제 나름의 이치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특히 동아시아의 윤리나 습속이 밑절미처럼 깔려 있다. 아니, 윤리와 습속 이전에, 인간됨과 언어성 사이에서만 엿볼 수 있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역시 말()은 근본적으로 행()에 미치지 못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행(知行)이 아니라 행지(行知)’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말은 구성적이며, 삶의 형식을 조형하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게 서구 지성사의 역량이기도 하다. 단순히 기호라거나 사후적인 표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은 상징적 재현의 장치라는 보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상징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기존의 생활양식에 비판적, 창의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뉴턴의 사과처럼, 다윈의 갈라파고스처럼, 당신의 첫사랑처럼, 한때 그 말은 당신의 세계를 뒤흔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김영민 지음,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늘봄, 2022. 09. 10.), 172-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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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보다는 삶이 먼저 있고,

모르고도 살아가는 삶 속에서 겪어야만 아는 것이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편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삶으로 녹아드는 것도 아니고,

안다는 것은 언제나 모른다는 것을 내포하기에 알았다고 할 때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

앎과 삶의 괴리를 깊이 성찰하려던 것이 동아시아의 지혜였다.

 

그러나 더 깊고 넓은 앎을 향한 끊임없는 추구는

존재하지 않던 세계를 만들기도 하고,

숨겨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기도 한다.

말은 새로운 삶의 형식을 조형하는 힘이 있기에,

새로운 상징의 창조, 새로운 언어의 상상 또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 사유로서 사유를 뛰어넘는 사색이 중요하다.

 

- 향린 목회 28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