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07.
그 어떠한 신학적인 사상도 그 자체로서 하나님 자신을 파악할 수 없다. 신학적 사상은 오히려 “엄격하게 말하자면, … 악마에 관한 증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시며, 비대상적이고, 순수 행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수한 은혜로 인해 신학 안에서 증언하기 위해 신학을 이용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 안에 있는 것이다. ~~
‘이론’은 현실 개념을 결코 형성할 수 없다. 현실은 ‘타자’의 요청이라는 우발적 ‘사실’ 속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오직 ‘밖으로부터’(außen) 오는 것만이 인간에게 그의 현실과 실존을 지시할 수 있다. ‘이웃의 요청’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만 자아는 현실 속에 실존할 수 있으며,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이것이 윤리, 즉 무시간적 진리가 아닌 ‘현재’(Gegenwart)의 의미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결코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절대적인 것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결코 체계가 될 수 없다. ~~
그래서 절대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그 자리에 이웃인 ‘너’(Du)와의 만남, 곧 –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만 역사를 함께 형성하는 존재로서 – 타자에 의한 한계 설정을 위치시킨다. 이러한 너에 있어서, ‘휴머니즘적이며 체계적인’ 존재 개념을 지향하는 모든 사고는 거부된다. 왜냐하면 역사, 즉 나와 너의 만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의 요청이 유일회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이다.
본회퍼 지음/김재진·정지련 옮김, <행위와 존재>(대한기독교서회, 2010. 10. 15. 초판 1쇄) 1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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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본회퍼 목사의 천재성이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서의 신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그것은 바로 악마에 관한 증언이라는 것을 너무도 통쾌하게 밝힌다.
신을 있는 그대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신학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물론 본회퍼 목사님 말대로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하나님이 신학을 이용하실 수는 있다.
신학은 오직 이웃의 요청, 역사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나-너의 만남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즉 신학은 인간의 학문이다. 신에 대한 학문이 아니다.
신학을 하면서 마치 자기가 절대적인 것을 이뤄냈다든가,
체계를 세웠다고 하는 순간 이미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신은 역사를 형성하는 현재의 순간에서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 향린 목회 277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