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7. 31.
나는 먼저 성서적 개념들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에 몰두하고 있네. 이 과제에는 내가 이미 해결한 것보다 더 많은 숙제가 남아 있다고 보네. 역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계의 자율성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의 거대한 발전이었지. 신학에서는 우선 허버트(Herbert von Cherbury)가 종교적 인식에 있어서 이성의 권한을 주장했지. 도덕에서는 몽테뉴와 보댕(Bodin)이 계명들 대신에 생명의 법칙들을 제시했지. 정치에서는 정치를 일반적 도덕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국시론을 창설한 마키아벨리를 들 수 있지. 내용적으로는 마키아벨리와 매우 다르지만 인간 사회의 자율성이라는 방향에서는 그와 유사하게 생각했던 그로티우스(H. Grotius)도 이에 속하네. 자연법을 국제법으로 제시했던 그로티우스는 자연법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esti deus non daretur) 타당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지. 마지막으로 철학적 도정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네. 데카르트의 이신론은 세계를 하나님의 간섭 없이도 잘 돌아가는 장치라고 생각한다네. 그러나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자연을 신으로 부르지. 칸트는 근본에 있어서는 이신론자였고, 피히테와 헤겔은 범신론자였지. 어디에서나 인간과 세계의 자율성이 목표였지.(자연과학에서 이 문제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kolaus von Cues)와 브루노(Giordano Bruno), 그리고 세계의 무한성에 대한 그들의 - “이단적” -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지) 고대의 우주는 중세에 만들어진 세계처럼 유한하지. 무한한 세계라는 명제는 – 어떠한 형태로도 -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설에 기초하고 있다네. 물론 현대 물리학은 다시 세계의 무한성을 의심하고 있지. 그러나 그렇다고 지난날의 유한성의 개념으로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지. 도덕적·정치적·자연과학적 작업가설(Arbeitshypothese)로서의 하나님은 폐기되었고 극복되었네. 그러고 철학적이고 종교적 작업가설로서의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네(포이에르바흐). 이러한 작업가설을 거두어들이는 것, 즉 가능한 한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지적 성실성의 문제라네. 경건한 자연과학자, 또는 의학자 등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혼혈아들이지. ~~ 중세기로 되돌아가는 것을 첨가해 두어야 할 것 같군. 그러나 중세기의 원리는 성직자주의 형식을 취한 타율성이지. 그러나 중세로 되돌아가는 것은 단지 지적 성실성을 희생시킬 때에만 얻을 수 있는 절망의 발걸음일 뿐이지. 그것은 “어린이의 나라로 향하는 넓은 길을 내가 알았다면”이라는 노래를 연상시켜 주는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지. 그러한 길은 존재하지 않지. - 어쨌든 그러한 길은 지적 성실성을 임의적으로 포기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마태복음 18:3의 의미로만, 즉 참회, 즉 궁극적 성실성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etsi deus non daretur)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성실해질 수 없지. 그리고 바로 이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 하나님 앞에서지. 하나님 자신이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인식을 갖도록 만든다네. 따라서 우리의 성인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를 진정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신다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버린 하나님이시니까!(막 15:34) 작업가설이라는 하나님 없이 우리를 세상에서 살도록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이지.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네. 하나님은 자신을 세상에서 십자가로 추방하지.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고 약하며, 오직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돕는다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하심이 아니라, 그의 약함, 그의 수난으로 도우신다는 것은 마태복음 8:17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네. 바로 여기에 다른 종교들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지. 인간의 종교성은 인간에게 곤궁에 빠졌을 때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법을 가르치지. 그것은 deus ex machina(기계장치로서의 신)이지. 반면에 성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무력함과 수난을 지시하고 있지. 오직 고난 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지.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앞서 말한 성인이 된 세계를 지향해 나가는 발전 과정이 그릇된 신 관념을 제거하고, 이 세상에서 그의 무력함을 통해 능력과 공간을 획득하시는 성서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준다고 할 수 있지. 여기서 “세상적 해석”(die weltliche Interpretation)이 시작되어야 하지.
본회퍼 지음/손규태.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 (대한기독교서회, 2010년 10월 15일), 675-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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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목사는 데카르트 이후,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주음(主音)이 된 이후,
인간과 세계는 이미 자율성을 획득했고,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즉 세계는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니라 성인이 된 세계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세계는 바로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도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자라서 제 스스로 살기를 바라지 않는가!
성인이 되어 자율성을 획득한 세계가 낯설다고
고·중세로 회귀할 수 없고,
마치 마술램프의 지니 요정처럼 하나님을 불러내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과거를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붙잡는 것은
지적 성실성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적확한 비판을 한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훈련이 필요한데,
바로 그것은 수난당하시는 하나님의 무력함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즉 곤궁 당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일이
성인 된 세계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어린이는 잘난 척 하다가도 막상 힘들면 부모에게 기댄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자기 일을 알아서 하면서 부모일을 돕는다.
우리의 신앙은 어린이 신앙인가, 어른의 신앙인가?
- 향린 목회 270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