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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나눔

그저 믿음이 있을 뿐

by phobbi posted Jul 25, 2025 Views 24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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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5-07-25

2025. 07. 25.

 

믿게 하는 것은 참입니다. 이랬다저랬다하는 것으로는 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소금 한 알을 입에 집어 넣고, “, 짜다!” 했을 때 나는 그 잘 뵈지도 않는 한 알에 내 전신을 들어 항복한 것입니다. 흉악한 독재군주의 권력과 무기는 다 거부할 수 있어도 소금 한 알의 짠 맛을 짜지 않다 할 놈은 없습니다. 그것이 참입니다. 그러나 그 짬은 또 내 속에 본래부터 짬이 들어 있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나를 두렵고 겁나게 하며 슬프고 낙심나게 하는 것으로는 나를 믿게 할 수 없습니다. 빛 한 가닥이 어둠 속에 들어오는 순간 아 밝다. 아 따뜻해!” 했을 때 나는 내 전신을 들어 감사, 찬송한 것입니다. 부부애, 동포애는 잊을 수 있어도 이 빛의 사랑은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랑도 생명 속에 본래 밝고 따뜻함이 들어 있지 않고는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믿게 하는 것은 또 스스로 함입니다. 물질계에서같이 무자비한 법칙만이 다스린다면 나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가벼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감을 당하고 저도 모르게 아 시원해!” 했을 때 나는 내가 바람인지 바람이 나인지 모를이만큼 자유한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함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이 우주의 숨결은 또 내 속에도 본래부터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아보고 하나가 된 것입니다.

 

내가 불교를 모르면서도 부처님은 감히 아노라 한 것은 부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는 것은 내 속에 본래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본래부터 부처님이 계신 것을 알려 준 것은 예수요, 공자요, 노자요, 장자입니다. 그들은, 다 그 온 때와 곳과 그 말씀하시는 식양은 달라도 그 참인 데서 그 사랑인 데서 그 스스로 함인 데서 하나인 것은 마치 소금이 구워낸 곳이 지중해냐 황해냐 인도양이냐 하는 데서도 달라도 그 짠 맛에서는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음과 같고, 빛이 그 들어온 것이 창문을 통해서냐, 산에서냐, 바닷가에서냐 하는 데서는 달라도 그 따뜻하고 밝음에는 다름이 없는 것과 같으며, 바람이 그 통해서 온 곳이 숲 사이냐, 물결 위냐, 감옥 창살 틈에서냐 하는 데서는 달라도 그 시원한 데서는 추호도 다를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제도적인 데, 교리적인 데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어느 종교도 사람을 상대하는 이상 제도나 교리를 전혀 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 집착해서는 아니됩니다. 집착해 버리면 그 안에 진리가 있어도 못 봅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라톤은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플라톤보다도 더 위대하다.” 한 말을 빌어서,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진리는 기독교보다도 더 위대하다.” 했더니, 열심있는 친구가 거기 반대하여서 아닙니다. 진리는 위대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진리보다도 더 위대하다 해야 합니다.” 했습니다. 그 어느 개념이 더 큰 것이냐 하는 것은 어린 학생도 알 만한 것인데, 열심이 나면 그런 잘못을 하게 됩니다.

 

나는 아는 것은 적습니다. 그러나 내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은 가지지 않으려 애씁니다. 또 진리는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낡은 허울을 아낌없이 버리려고 힘씁니다. 이제 어떤 종교도 자기를 절대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 그 어느 부분, 어떤 나타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나타냄 속에서 완전을 믿게 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믿음에는 주격도 목적격도 붙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혹은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또 내가 믿고, 네가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믿으면 우주도 있고 부처님도 있고 하나님도 있습니다. 믿음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함석헌, <함석헌 전집 5, 서풍의 노래>(한길사, 1984. 9. 30. 2), 34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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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有限)한 우리가 무한(無限)을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무한 속에 노니는 법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믿음은 우선 정신의 삼 요소,

지성(知性)과 감정(感情),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조화롭게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함 선생님께서 믿게 하는 것은

’()이요, ‘사랑’()이요, ‘스스로 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함 선생님은 참과 사랑과 스스로 함을 모두 몸의 경험에서 말하고 있다.

즉 정신과 육체가 나뉘지 않음을 말한다.

동시에 이 모두가 우리 안에 이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믿음은 있는 것이 드러나고 발견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자도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던 것이다.

 

믿음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힘이다.

아직도 불교나 기독교라는 종교 제도에 갇혀서

부처님 말씀이나 예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하면,

사람들은 또 달이 영원 불변의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는 날로 끊임없이 자라는 것이다.

유한한 우리에게 진리는 생성 변화하는 상대적 일리일 뿐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결국 다시 손가락에 머물게 된다.

 

믿음에는 주격도 목적격도 없다.

믿음만 있을 뿐이며,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참과 사랑을 스스로 하는 이가 제대로 믿는 이다.

 

 

- 향린 목회 264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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