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by phobbi posted Jul 05, 2025 Views 256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5-07-0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5. 07. 05.

 

우리 실존의 전체성은 결코 우리 자신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Luther) 왜냐하면 우리 실존의 전체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확증되며,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존재의 전체성 속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계시에 대한 신앙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 존재의 전체성도 진리 안에 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시로부터 나오는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은 계시 밖에서는, 즉 아담 안에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라는 것은 바로 비진리 안에 있다는 것, 즉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의지 즉 본질-가 죄 가운데서 구부러진 것, cor curvum in se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교제로부터 자신을 소외시켜, 단지 홀로-즉 비진리 안에- 서게 된다. 인간은 혼자 있기 때문에 세상은 바로 그의세상이 되고, 이웃은 사물의 세계 속으로 침전되며(참조. 하이데거의 함께 있음’), 하나님은 종교적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인간은 그의 인식 속에서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자신에게서 중단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에게선벌거벗은 자기 영광이라는 거짓 속에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죄는 어떠함’(Wie-sein)을 통해 현존재’(창조된 존재 Geschöpfseins)에 폭력을 가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죄의 개념 앞에서 현존재와 어떠함의 존재론적 구분은 대상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가 이미 자기 자신의 주()가 되었고, 자신의 현존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죄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현존재가 아직도 어떠함의 폭력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오직 피조성과 죄를 서술의 방식 속에서 서로 분리시키는 계시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을 죄인 존재, 그리고 하나님과의 연관 속에서는죄 속에 실존하는 존재로 존재론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다. ~~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사고와 철학함그 사고가 계시에 의해 그리스도의 역사적 교회 속으로 편입되지 않는 한 독단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고나 철학함이 스스로 위기, 비판적 철학이 되려는 곳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즉 모든 인식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 자신을 알라”(γνθι σεαυτόν)는 말 또한 자기 자신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마지막 정당성 주장을 지향한다. 그 때까지 인간은 세계의 창조자와 담지자라는 엄청난 부담감 속에서, 즉 영원히 홀로 있음의 냉혹한 침묵 속에서 불안에 떨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자신에 대한 최후의 심판자로 도약시키면서 자신을 고발하기-양심의 언어로- 시작한다. 고발당한 인간의 대답은 단지 후회로 나타날 뿐이다.(contritio activa: 능동적 통회)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양심과 후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마지막 파악이며, 인간의 독단적인 홀로 있음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피고인의 상황에 세우며, 자신을 좀 더 나은 자아로 부른다. 그러나 양심의 울부짖음은 단지 정신적으로 황폐한 자기 결의’(Bei-sich)의 소리 없는 고독을 넘어서서 실망할 뿐이고, 그리고 아무런 반응 없이 통제되고 해석된 자신의 세계 속으로 울려 퍼질 뿐이다.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그의 홀로 있음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신의 상황을 오해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찾으며”(Luther), 후회하는 자로서 여전히 자신의 죄인 된 실존을 구원하기를 소망한다. 그는 죄인으로서 자신이 지은 죄들 곁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죄를 양심을 통해 보기 때문이다. 양심은 인간을 사로잡으며 거듭 죄들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나 죄는-그 죄를 너무 많이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자라고,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소름끼칠 정도로 질책하는 우리 양심의 수줍음이 이러한 상황을 가속화시킨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양심은 인간을 자기 곁에서 비진리 안에 머물도록 방치하는 악마에 속한다. 따라서 이러한 양심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다가가면 죽임을 당한다. 양심은 괴롭힐 수도 있고, 절망 속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양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마지막 파악이기 때문에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인간을 죽일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또한 양심 안에서도 원할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의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매여 있으며,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은 비진리 속에서 종결된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 안에 세워지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인간은 죽음이나 생명 그 어느 것에도 자신을 바칠 수 없다. 오직 수동적 통회(contritio passiva)와 신앙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와의 만남만이 인간에게 양자를 선사해 준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홀로 있음을 깨뜨릴 때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이 진리 속에 세워져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

 

따라서 루터는 수없이 거듭 경고한다. 자신의 통회와 신앙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반성하는 한, 그리스도는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 ~~ 결정적인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곳에서만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ατοὶ ἐν αυτος αυτος μετροντες κασυγκρίνοντες αυτος αυτος οσυνισιν. 고후 10:12)

 

본회퍼 지음/김재진·정지련 옮김, <행위와 존재>(대한기독교서회, 2010. 10. 15. 초판 1) 166-175.

 

==================================

 

본회퍼 목사는 천재 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19271217,

21세가 되던 해에 그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최우등으로 신학 박사 학위를 마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8년부터 곧바로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 대해 숙고하였고,

24세인 1930712일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서 조직신학으로 교수자격을 취득한다.

그때 쓴 논문이 바로 <행위와 존재>이다.

이 논문은 인간의 의식 문제를 본격적으로 성찰하면서

신학적 주제로서 어린이가 지니는 놀라운 특징을

그리스도교적 계시와 철학의 반성이라는 비교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대학원 시절 나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다.

평범한 다수의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사는지도 모르며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자기 삶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한, 남들이 말한 남의 삶을 살아간다.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γνθι σεαυτόν)고 말한 이유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알려는 노력이 결국 자기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본회퍼의 통찰은 하이데거와 맞대면하면서 철학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즉 어린이의 통찰, 반성하는 의식이 아니라 미래를 선취하는 의식 속에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잊혀진 시간을 존재와 등치시켰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위대한 사유의 언덕이었지만, 약속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선취하는 행위 속에서만 존재가 지어져 간다고 말하는 <행위와 존재>는 얼마나 대단한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고 말한 이래,

근대적 인간은 자기를 결국 자기의식의 장() 위에서 성찰하면서 깊은 수렁으로 빠져 버렸다.

본회퍼 목사가 말한 인간의 홀로 있음의 한계이다.

서구 정신사에서 자기의식의 장에서 자기를 생각하는 것을 깬 사람은 니체다.

그는 허무의 장()에서 자기를 생각한다.

계속 추락하는 심연 위에 자기를 세운다.

낙타가 아니라 사자로 살아가 보려는 것이다.

그래서 강한 긍정과 생명의 힘으로 나약함을 넘어서는 초인(Übermensch)을 말한다.

니체가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읽어냈다는 것에서는 큰 박수를 보내지만,

니체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 또한 낙타도 사자도 아닌 어린이를 예찬했지만,

그가 꿈꾼 영원회귀,

즉 운명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미래로 하여금 자기를 규정하도록 만드는 어린이의 종말론적 가능성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그는 현재가 미래로부터 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본회퍼 목사님께 경의를!

 

결정적인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곳에서만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자기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ατοὶ ἐν αυτος αυτος μετροντες κασυγκρίνοντες αυτος αυτος οσυνισιν. 고후 10:12)

 

- 향린 목회 244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