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6. 03.
생명을 살리는 종교와 해로운 종교 간 갈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갈등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가 번성하는 걸 방해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종교들 사이의 관계 형성을 방해한다. ~~ 이 책에 담긴 예수와 기독교에 관한 우리의 관심은 우리 자신에서 시작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기독교인들만 유일하게 “길, 진리, 생명”(요 14:6)에 이르는 권리를 가졌다는 소중한 전제를 다시 생각해 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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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자신이 길, 진리, 생명이라는 주장을 아무리 해석해 보아도, 이 주장은 예수에 관한 주장이지 기독교에 관한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고립된 생각이라기보다는 실제로 구체화 된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 주장을 기록한 요한의 전통을 보면, 진리는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에 속한다. 진리가 그저 지식 자체로 머무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내재할 뿐만 아니라 육신을 지닌 사람들을 해방하기도 한다(요 8:32). 기독교는 예수에 대한 소유권을 당연한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 기독교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을 추구하는 예수의 삶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진리와 연관된다면, 우리는 모든 게 다 똑같이 참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주장할 수도 없다. 카이사르의 길과 억압하는 권력은 결국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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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주요 이미지들은 대체로 일방적이다. 제국들 대부분과 오늘날의 많은 신앙 공동체가 진리란 하나의 소유물이고, 자신들이 바로 그 진리를 소유했고, 다른 대안은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제국들은 늘 대화를 거부한다. 혹 대화할 경우가 생기면 제국들은 온통 정답을 제공한다. 만일 자신이 진리라는 예수의 주장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실제로 우리는 그 어떤 종교와도 대화할 필요가 없다. ~~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제국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예수와 거의 무관한 방식들로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 제국들이 위에서 아래로의 다양한 권력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이 권력은 예수가 제시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구체화한 권력과 대비된다. ~~
예수의 진리와 카이사르의 진리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
자신이 진리라는 예수의 유명한 주장은 다른 관점과의 교류 없이 일을 처리하는 카이사르의 진리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종종 대화를 주도하고, 때로는 예상 밖의 장소들에서 진리를 밝히 드러낸다. ~~ 예수의 비유들에는 평범한 사람, 목자, 어부, 빵 굽는 여인, 빚에 허덕이는 노동자가 나오는데, 예수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위에서 아래로 선포되고 강요되는 현실에 관한 지배적 견해와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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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진리는 특권층의 자리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진리는 투쟁과 회복력 있는 고난의 자리에서 발견된다. 루터교 전통은 하이델베르크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다. 즉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예수의 주장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에, 승리자 그리스도(triumphant Christ)와는 분명히 반대된다는 지적이다.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훌륭한지를 다투는 제자들의 반복적인 논쟁(막 9:33-37)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진리를 다시 구성하고, 그 진리의 자리를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옮겨간다. 따라서 실재의 지평을 확대하고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곧 드러났듯이, 이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들과 세리들이 예수의 편이 될 수 있지만, 가장 작은 자를 돕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은 예수의 편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한 가능성이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외르크 리거 지음/정준화 옮김, <예수 대 카이사르 : 문명 붕괴 시대에 예수 새로 찾기>(한국기독교연구소, 2025. 03. 05.), 16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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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로운 지도자가 우리 땅에 탄생한다.
이 정부는 생명을 살리는 정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해로운 정부가 될 것인가?
자신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서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정답을 던져주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제국, 독재, 파시즘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약한 처지에 있는 국민들, 시민들과 대화하며 십자가를 지려 한다면 이 정부는 이 땅을 살리는 정부가 될 것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교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카이사르의 길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르겠다는 표시일까?
그는 예수의 편에 서서 가장 작은 자를 돕는 정치 지도자가 될까?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지만,
제자들은 그 길에서 누가 자리를 차지할까를 두고 숱하게 싸웠는데,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숱하게 자리다툼을 할 것인가?
새로운 정부가 진리의 자리를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옮길 수 있기를,
그래서 실재의 지평을 확대하고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기를,
내란 세력을 종식시키고, 무너진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를,
가장 어려운 이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도한다.
- 향린 목회 21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