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기도회

수요평화 "어쩔 수 없는 것들" | 2026-10-07 | 이민하

by 이민하 posted Oct 08, 2026 Views 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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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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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7. 수요평화거리기도회

 

"어쩔 수 없는 것들"

출애굽기 23:1-9

 

[누구의 무사를 비는가]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아시나요? 아마 10년, 길게는 20년 전쯤의 오래된 유행어입니다. 누군가의 불행을 두고 하는 우스갯소리로, 한때 이 말이 들불처럼 번져서 어디에서나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 불편하고 괴로웠습니다. 첫째는 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는 사람을 보며, 어쩌면 저렇게 내어놓고 이기적일 수 있는가 싶어서였고, 둘째로는 제 마음 깊숙한 곳에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아서였습니다. 나만 아니면 괜찮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는 저러한 고통을 겪지 않고 있다는 지저분한 안도감이 제게도 있는 것이지요.

저는 평탄하게 일상을 지내고 싶습니다. 넋 놓을 만큼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만끽하고 싶고, 때로는 일이 분주해서 발바닥에 땀나도록 부지런 떨고 싶고, 애정하는 이와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평소에 하지 않던 상상을 가끔 합니다. 지금의 일상이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다는 상상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하루를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다른 이의 오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버릇처럼 더듬으면서부터 상상이 잦아졌습니다. 어느 퇴근길, 평화롭고 맑은 경복궁과 인왕산 위로, 푸른 하늘을 가르고 불길이 날아드는 모습을 환상처럼 봅니다.

그러나 전쟁의 소식에 세상만사와 나의 삶을 가상처럼 느끼다가도, 곧이어 당장에 남은 일과를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제게는 상상뿐인 일을 누군가는 지금도 겪고 있고, 이미 너무 많이 겪었지만, 저 멀리의 일을 나의 일이라 여기기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누구든 겪지 않아야 할 일이라는 당연한 소리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요. 그렇게 어떤 현실은 그저 안타까운 일, 마음 아픈 일, 어쩔 수 없는 일 그뿐에 그치고 맙니다.

하루의 무사를 비는 마음이 누군들 없겠습니까. 그 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간의 그러한 바람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내가 누리고 싶은 하루를 저이 또한 원하리라는 데까지. 내가 잃지 않고 싶은 사람이 있듯, 저이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으리라는 데까지. 더 나아가서는 이미 그러한 바람을 빼앗긴 이들의 삶이 나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그리고 나의 평탄한 일상이 무엇에 기대어 있는지까지 말입니다.

거리에서, 기도의 자리에서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의 무사를 빌고 있습니까?

 

[마주한 생명 앞에서]

오늘 읽은 출애굽기 본문은 '정의를 이루기 위한 법'입니다. 송사에 관한 이 조항들은 금기사항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씩 짚어 가다 보면, 법은 결국 같은 것을 묻고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가? 누가 내 편인지, 내가 무엇을 얻고 잃는지, 다수가 어느 쪽에 서 있는지는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뇌물은 멀쩡한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고 의로운 사람의 일을 비틀어 버린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법은 그렇게 가려진 눈이 끝내 무엇을 낳는지도 압니다. 7절에서 말하듯, 잘못 없는 사람, 의로운 사람이 죽습니다.

그런데 이 법령 한가운데, 뜬금없이 나귀가 등장합니다. 그것도 원수의 나귀입니다.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떠돌다가 너와 마주치거든, 반드시 돌려보내 주어라. 너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깔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냥 내버려두지 마라. 반드시 도움을 주어라.” 나귀의 사례는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와 화해했는지도 묻지 않습니다. 조건은 하나뿐입니다. ‘마주치면, 보면.’ 생명을 마주한 사람에게 이 법이 주어집니다.

이 법령을 읽을 때면 단어 사이사이마다 우리의 불편한 마음이 스며듭니다. 나귀를 일으키면 원수가 덕을 봅니다. 나귀만 살리고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5절은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새한글은 “그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옮겼는데, 히브리어로는 “그와 함께”입니다. 쓰러진 나귀를 미워하는 사람과 같이 일으키라는 겁니다. 원문은 동사를 거듭 써서 반드시 도우라고 강조합니다.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도움받을 만한지 판단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지금 짐에 깔려 버둥거리는 생명을 마주한 것으로 내가 움직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3절에서는 힘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툼에서 편들어 주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조금 의아하지요. 반면 4, 5절에서는 원수라고 해도 도움을 거두지 말라고 합니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법은 신기하게도 짝을 이룹니다. 나와 그의 관계가, 그를 대하는 내 책임을 비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사실을 굽혀서는 안 되고, 미운 마음이 든다고 필요한 도움을 거두어서도 안 됩니다. 원수는 여전히 원수일 수 있습니다. 그를 도우면 그가 이익을 얻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모든 불편함을 안고도, 쓰러진 나귀 앞에서는 함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관계가 내 책임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제껏 무엇을 보아왔습니까? 사실 우리가 이 전쟁을 아예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기름값이 오를 때, 주식 시장이 출렁일 때, 우리는 날마다 이 전쟁을 보았습니다. 다만 우리 쪽으로 난 창으로만 보았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만큼만 말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보았으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의 삶은 보지 않은 셈 쳤습니다.

 

[고백이 이끄는 곳]

정부는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군사적 기여’를 검토해 왔습니다. 초계기와 군수지원함, 폭발물 처리 인력 등을 보내는 방안이 거론되었습니다. 선박의 안전을 지키고 항행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전력은 누구의 작전에 쓰이며, 무엇을 가능하게 합니까? 침략을 지속하는 데 힘을 보탠다면, 직접 총을 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다시 같은 말을 듣습니다. 동맹국으로서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을 때 우리가 치를 값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관세와 안보와 눈치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법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놓아 봅시다. 우리에게 제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제약이 어떤 선택을 정당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동맹이 요구하고 국익이 걸려 있다는 이유로, 우리가 누구의 삶을 무너뜨리는 데에 힘을 보태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일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질문을 끝내는 순간, 우리가 한 일은 마치 누구도 결정하지 않은 일처럼 되어버립니다. 책임질 사람은 사라지고, 고통받는 사람만 남습니다. 그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폭력을 덮는 증언이 됩니다.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던 말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우며 진실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때 어떤 값을 치러야 할지를 셈합니다. 그 계산에, 다른 이들이 이미 치러왔고 지금도 치르고 있는 죽음의 값은 얼마나 들어 있습니까? 우리가 받을 손해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폭격과 봉쇄 아래 있는 이의 하루도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해는 현실적인 고려가 되고, 저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밀려납니다. 우리는 무엇을 현실이라 이르고 있습니까.

원수의 나귀조차 길을 찾아주고 또 일으켜주라는데, 도대체 무엇이 침략에 동참할 이유가 됩니까. 하나님은 악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침략과 학살은 의로울 수 없습니다. 파병으로 한국이 전쟁에 얽히는 규모가 아무리 작다 해도, 그것은 우리의 분명한 선택입니다. 기름값과 주식으로 얽혀 있는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미 무결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진실까지 굽힐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파병 반대가 "우리 자식을 사지로 보내지 말라"는 말로만 끝나서도 안 됩니다. 그 말 안에서도 '우리'의 울타리는 그대로입니다. 저 아이들을 죽이지 말라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지키려고 다른 이의 저녁을 부수는 데에 손을 보태지 말아야 합니다.

"나그네를 괴롭히지 마라. 이집트 땅에서는 너희가 나그네였으므로, 나그네의 사정을 너희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들이 서 있던 자리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낯선 땅에서 자신의 삶을 다른 이의 처분에 맡겨야 했던 자리입니다. 앞으로 어떤 자리에 서게 되더라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정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었다고 남의 고난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고생한 기억이 오히려 내 몫을 악착같이 지키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기억이 지금의 선택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괜찮으니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아직 괜찮지 않은 사람의 삶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나그네의 기억은 다른 쪽으로 난 창으로 세상을 보라 권합니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우리의 안전과 이익을 헤아리는 자리에서, 계산 밖으로 밀려난 사람의 삶을 묻는 자리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고통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 삶을 없는 셈 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짐을 함께]

아까 제가 여쭈었지요. 우리는 누구의 무사를 빌고 있습니까.

나귀를 다시 떠올립니다. 짐에 깔려 쓰러진 나귀는 제 것도 아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버둥거립니다. 나귀를 짓누르는 짐더미처럼, 어쩔 수 없다 일컬어지는 것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명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미 애써 모른 척 지나쳐 온 시간에, 우리의 어쩔 수 없음까지 얹으려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 너머에는 서로를 미워하는 두 사람이 쓰러진 나귀를 일으키는 장면이 있습니다. 말도 섞기 싫은 사이지만, 힘을 모아 짐을 집니다. 생명이 꺼져가게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상상을 놓치면, 우리는 늘 누군가를 그 짐 밑에 두고 살게 될 것입니다.

나그네의 사정을 아는 여러분,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짓눌린 얼굴들을 봅시다. 주님의 말씀을 알고 기억하는 우리이니, 그 짐을 함께 풉시다. 기여라는 이름으로, 보호라는 이름으로, 동맹의 이름으로 폭력을 덮는 증인 노릇 하지 말고, 진실을 굽히는 욕망에 깔려 쓰러진 이들을 일으키는 길을 갑시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