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0. 05.
사람의 존재를 정신진화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에 저항감이 있다면 우선 ‘개념’, 혹은 개념화의 뜻과 그 내력을 살피는 게 좋다. 하늘 아래 변치 않는 게 없고, 인간의 정신이라는 놀라운 진화의 결정체도 갖은 종류의 타자들과 교섭하고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나날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개념(화)이라는 현상을 그 내적-논리적 정합성에서 따지기 전에 그 역사적-계보학적 내력을 살피면서, 그것이 그 장구한 진화의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대나무처럼 빨리 자라는 식물은 중력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내적 응집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바로 마디(節)다. 앞서 말한 대로 개념은 정신의 길과 그 결절점들이 생기는 과정과 일치하며, 요컨대 개념이란 바로 이 마디이자 정신의 결절점 정도로 비유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그 유례없는 민활성(敏活性)과 그 잡다함으로 인해 개념적 장치가 없이는 쉽게 심리적 난맥상에 빠져 문명문화적 성취에 이르는 사유를 꾀할 수 없다. 따라서 개념(화)는 정교하고 조리 있는 사유의 길을 마련해주는 이치의 마디를 구성하게 된다.
사유의 마디는 몸의 관절처럼 중심을 잡고 상하좌우를 연결하거나 소통시키고, 혹은 거꾸로 실익이 없는 전달을 저지하거나 꺾기도 한다. 목 관절에 힘을 얻지 못하는 영아(嬰兒)는 고개를 세우지 못하고, 다리 관절이 엉성해진 노인은 제대로 걷지 못한다. 개념은 관절이나 마디처럼 인간의 사유가 조리 있게 서게 하고, 또 깊고 먼 데까지 정확히 도달하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공부는, 특히 철학은 섣부른 직지인심(直指人心)을 흉내 낼 게 아니라 그 무엇보다도 ‘개념(이치)을 잘 빌려 쓰는 일(善假於理)’이다. 이치의 길을 좇아 구체성을 얼마간 떼어버리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게 철학의 본령인 셈이다. ‘추상적’이라는 표현에는 항상 얼마간의 오명이 붙어있긴 하지만, 오명의 근거는 오직 수행상의 부작용일 뿐이며 ‘추상화’는 전술한 것처럼 인간의 정신이 성취한 결코 녹록하지 않은 초월적 도약인 것이다.
김영민 지음,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늘봄, 2022. 09. 10.), 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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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있어 개념을 제대로 알고 잡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저자의 말대로 개념은 사유의 마디여서,
생각을 서게 하고, 멀리 가게 하고, 쓸데없는 것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주기 때문이다.
장구한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다른 존재와 달리 놀라운 추상의 도약을 이루었다.
다른 동물도 차이를 알아보고, 인공지능도 패턴을 읽어내지만,
인간은 개념을 통해 추상의 추상을 할 수 있고,
언어와 상징을 통해 축적을 하며, 무엇보다 더 깊이 파고드는 질문을 할 줄 안다.
로너간 신부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무엇인가?” “정말 그러한가?”를 물으면서
이해를 넘어 판단으로 계속 나아가려는 무제한적 앎의 욕구가 인간에게는 있다.
앎은 언제나 모름을 앎이어서 그 자체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앎과 모름을 함께 싸 안으려는 믿음이 요청된다.
교회에서 종종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충분히 반성되고 사유되지 못한 믿음은 언제나 길을 잃기 마련이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깊은 신앙은 단단한 정신의 마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 향린 목회 70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