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평화를 위하여
(사 11:1-9, 갈 6:11-18, 막 5:1-9)
한문덕 목사
[10월에 우리 곁을 떠나신 두 분]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운이 도는 가을이 왔습니다. 엊그제 2026년을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10월이 되었습니다. 추억을 부르는 계절, 그리운 누군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 계절에 여러분에게 시 한 편을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 최정원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 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10월이 되면 저는 우리 곁을 떠나신 두 분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은 쨍한 가을 하늘 고요한 적막이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하면 차라리 다행이라 노래하지만, 오히려 저는 10월이 되면 어떻게 두 분의 뜻을 되살려 이어나갈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분은 바로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이십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거론된 일본 문학의 거장이었던 엔도 슈사쿠의 소설『침묵』의 무대가 된 나가사키현 소토메 지역(長崎市の外海地区)에 가면 지인들이 엔도를 기억하며 세운 비석 하나가 있습니다. ‘침묵의 비(沈默の碑)’입니다. 이 비석 앞 바위에 유명한 글귀 하나가 새겨져 있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릅니다.(人間が こんなに 哀しいのに 主よ 海があまりに 碧いのです)”
오늘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다를 건너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푸른 갈릴리 너머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것은 무덤 사이에서 살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군대 귀신에 의해 영혼을 사로잡힌 채 돌로 제 몸에 상처를 내던 사람, 소리를 질러 대고 쇠고랑이나 쇠사슬로도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상태는 로마 군대가 어떠했는지를 드러냅니다. 전쟁의 폭력은 온 땅을 폐허로 만들고, 사람의 내면까지도 무덤으로 만듭니다. 우리들의 10월은 너무나도 청명한 가을날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푸른 하늘 아래에서 이 땅에는, 그리고 전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슬프고 괴로운 민중의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명과 평화, 참된 자유,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위해 온 열정을 바치셨던 두 분 스승의 길을 어떻게 이어갈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안병무 선생 서거 30주기를 맞아]
특히 올해는 안병무 선생님 서거 30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한신대 신학대학원에서는 안병무 선생님 특집으로 그의 사상과 삶, 신학을 오늘에 되새기는 6회의 목요강좌를 합니다. 이번 주 목요일에는 서재정 교우께서 신학생들을 위해 “한국의 민중, 세계의 오클로스, 안병무의 눈으로 본 한반도와 국제정치”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주십니다.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열린 강좌이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참석하시면 좋겠습니다. 10월 12일 다음 주 월요일에는 모란공원 묘소참배가 있고, 그리고 16일과 17일,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선천댁 연극, 그리고 민중신학 관련 심포지움과 강연, 추모 예배와 문화행사 등이 이어집니다. 목회마당을 참조하셔서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0월 18일 추모 예배와 문화행사는 우리 교회에서 진행되고, 30주기를 맞아 안 선생님의 글을 가지고 작곡한 곡들을 초연하는 특별한 순서들이 마련되어 있으니, 우리 교인들은 한 분도 빠지지 마시고 참석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안 선생님의 글 중에서 마음에 새길만한 문장들을 캘리그라피로 써서 전시도 합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안병무 선생님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일한 한국신학인 민중신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시고, 우리 향린교회의 창립자 중 한 분입니다. 안 선생님은 유신 독재정권 아래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민중의 삶의 현실을 증언하고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신학과 실천의 길을 여셨습니다. 안 선생님께 교회란 “예수와 민중이 더불어 있는 공동체”(『민중신학을 말한다』안병무 전집 2, 194.)로서 밥을 나누어 먹는 나눔의 공동체 속에서 지금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생활공동체입니다. 예수는 민중과 조건 없이 만나서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룩했고,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고 세상으로 파송해서 민중의 현장으로 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안 선생님은 민중들의 현장에서 성서를 다시 읽어내고 축제를 벌이고, 억눌리고 설움을 당해 쌓인 한들을 풀어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제도 교회를 성장시키고, 교리를 준수하고, 교회를 운영하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갖춰야 한다는 기존의 교회론을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그저 자기보존과 성장에 관심을 두고, 다수의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그저 영혼 구원과 자기의 안녕을 추구한다면 안 선생님이 말한 민중신학적 교회, 민중신학적 교인은 고난의 현장에 나아가서 민중들과 연대하며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공동체이며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이 향린교회가 추구하는 목회와 선교이며, 일반 교회와는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수의 신앙인이 자신들의 고난과 곤궁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 해결을 하고자 한다면, 향린교회는 하나님이 고난당하실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 민중의 구원과 해방에 참여하는 교회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민중교회 선교에 집중하고자 하셨던 홍근수 목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향린교회가 도시의 중산층이고 진보적인 교회일 뿐 민중교회는 아니고 또 그런 교회로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민족통일 운동, 평화운동, 교회 개혁운동 등을 전개하고 민중교회와 연대함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피력하였다. 향린교회가 유별난 교회로 소문난 것은 정말 이 교회가 특별해서라기보다 다른 교회들이 특별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리라.”(<예수와 민족>, 128.)
우리교회가 지향하는 이런 신앙 정신으로 인해 사실 교회 생활하는 것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보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아픔과 고난의 현장으로 나아가라는 촉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이기적 욕망만을 채우려 한다면 우리 사회는 모두가 살기 힘든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 더 나은 세상,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이 민중의 자리에서 예수를 다시 읽으셨다면, 홍근수 목사님은 그 민중의 고난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분단과 전쟁의 구조에서 찾으셨습니다. 안 선생님은 민중 곁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셨고, 홍 목사님은 그 민중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민중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민중의 삶은 무덤과 같습니다. 두 분의 길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민중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곧 평화를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제1성서의 말씀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새 지도자”가 다스릴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데, 그때에는 사자와 이리와 표범 같은 동물들이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고, 새끼 염소와 함께 눕는다고 말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는 이상향이 실제로 실현되려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육식 동물들이 채식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탐욕을 채우려고 폭력을 불사하는 이들의 존재론적 변화 없이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수 없다는 상징입니다. 물론 이것은 들판의 짐승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자가 풀을 먹는다는 것은, 힘으로 빼앗고 삼키던 자들이 그 방식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가 사람을 바꿀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먼저 깨닫고 나서는 이들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예수님의 뒤를 이은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우리의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이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할례라고 하는 기존의 정체성 체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눈에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15절)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고, 헌금을 하고, 성서 공부에 참여하는 모든 것은 내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서로 경쟁하며 먹고 먹히는 세상에 물들지 않고, 사람을 상품 취급하는 자본주의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고 있느냐가 우리가 오늘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의 사도 홍근수 목사님]
새롭게 창조되는 일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의 훈련 속에서, 인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스승들의 가르침과 그들에게 배우려는 자세와 실천 속에서만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안병무 선생님과 홍근수 목사님을 소개하는 것이고, 안병무 선생님은 서거 30주기 관련 행사들과 김지목 목사님이 하셨던 민중신학 강의를 통해 여러분이 쉽게 접하실 수 있기에 오늘은 홍근수 목사님에 대해서 좀 더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홍근수 목사님은 미국에서의 목회를 사임하고 1986년 12월 31일 영구 귀국하여 향린교회의 담임목사로서 16년 6개월을 목회하셨습니다. 당시 부교역자였던 김경호 목사님과의 첫 만남에서 홍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한국에 반공 때려 부수러 왔다.” 그리고 1988년 9월 3일 KBS TV의 심야토론 프로에 참석하여 “민주화과정에 있어서의 이념문제”라는 제목하에 공개토론을 벌이셨는데, 이때 했던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수감생활을 하십니다. 심야토론에서 홍 목사님께서 일관되게 주장하신 것은, 어떤 사상이든 두려움 없이 논의할 수 있는 참 자유였습니다. 홍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주체사상을 마음대로 논의하고 강의하고 연구해야 되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똑같이 기회균등을 주고 우리가 엄정하게 중립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그런 사상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는 사회를 자유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데, 그것을 부정하고 거기에 대해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칼로 찌르는 따위의 정권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옹호자라고 합리화하는 것은 국민들이 눈뜨고 각성해야 한다.”
“..... 통일에는 사상이 문제가 안된다. 자본당도 있는데 공산당이 있으면 왜 문제가 되느냐,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주의, 사상, 인종, 종교에 의한 차별 없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보장하겠다는 것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사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북한이 민족주의와 자주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점은 우리도 배울 만한 점이다.”
이 일로 인해 홍 목사님은 “빨갱이 목사” “정치 선동가”로 낙인찍히게 되고, 대표적인 반미 목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홍 목사님께서 원래부터 그러셨던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1974년 8월 13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시기 전까지 홍 목사님은 오히려 친미 목사, 미국을 좋아하는 호미(好美) 목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미국이란 나라가 저렇게 부유하고 강한 나라가 된 것은 예수를 잘 믿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우리도 예수를 잘 믿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예수와 민족>, 106.)을 가지셨는데, 오히려 미국에서의 12년 유학생활 동안 친미에서 반미 목사로 거듭나신 것입니다.
홍 목사님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인혁당 사건’에 항의하여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출국당한 시노트 신부님의 북미기독학자회 연례대회 강의였습니다. 이때 시노트 신부님은 다른 나라들은 자기 땅에 발을 붙인 미국에 대하여 곧바로 “양키 고 홈!”을 외치는데, 한국은 50년이 넘도록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래서 한국에 오는 미국인들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멸시하고 깔보며 인권도 짓밟고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들은 저항도 하지 않고 미국인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강연을 들은 홍 목사님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하고 당황스러웠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들 수 없었고, 이 한 번의 경험이 미국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크게 바꾸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사회윤리학을 전공하시면서 만난 주임 교수들의 신학 성향입니다. 매카시 열풍이 불었을 때 감옥도 갔다 왔던 교수들은 하나같이 진보적이고 비판적 시각을 가진 분들이었고, 그들이 지닌 신앙적 소신과 사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각들을 홍 목사님은 배웠습니다.
셋째는 미국에서 발간된 신학 서적과 신문, 잡지를 통해서 홍 목사님은 해방신학, 정치신학, 역사적 예수 등을 공부하시고, ‘보스톤 글로브’나 ‘뉴욕 타임즈’와 같은 신문들을 통해 미국의 실체를 발견하기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들을 살펴보시면서 친미적 성향은 여지없이 무너졌다고 고백합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홍 목사님을 용공, 좌경, 주사파, 김일성-김정일 신봉자, 친북 인사, 위험하고 과격한 혁명적 사상의 소유자 등으로 매도하지만, 홍 목사님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늘 고민하고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 매진하셨던 분입니다. 호미(好美) 목사가 반미 목사로 거듭나신 것은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 사람의 새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홍 목사님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십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참 신앙과 향린의 목회]
고등학교에 입학하시고 1학년 말이 되었을 때에, 홍 목사님은 20여명의 부산 시내 남녀 고등학생들과 함께 “시온의 친구”라는 신앙동지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하십니다. 1953년 전쟁으로 폐허로 된 사회 속에서 신앙동지회 목표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한국 사회에 일대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민족 공동체로 거듭하게 하고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었고, 이들은 매주 목요일 저녁, 같은 시간대, 각자가 처한 곳에서 같은 제목으로 기도하고, 매일 지정된 성경 말씀을 읽으며 묵상합니다. 매주 금요일에는 불우한 이웃을 찾아갔는데, 고아원, 양로원, 나병환자촌, 병원, 당시 부산 보수동 산꼭대기에 동굴 같은 데에서 노숙하며 집단적 생활을 하던 걸인들의 촌락을 찾아갔습니다. 방학 중에는 농촌 계몽활동을 하고, 전도 집회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신조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산다”는 것이고, 홍근수 목사님은 이때 이미 독일의 본회퍼 목사, 일본의 우찌무라 선생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서 참다운 목사가 되어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신앙동지회는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까지 이어지는데, 홍 목사님은 이 시절 간디, 함석헌, 유달영, 장준하, 조향록 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이들의 민족적 포부와 염원에 영향을 받았고, 한편 종교와 사회를 개혁했던 루터와 칼빈에도 심취하여 위대한 개혁자가 되기를 바라며, 모세와 같이 민족해방과 구원을 이루는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 두 사람처럼 법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시게 됩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홍근수 목사님에 대해 정치적 설교를 한다면서 비방하고, 마치 홍 목사님의 설교가 신앙적이지 않은 것처럼 규정하지만, 홍 목사님은 오히려 자신이 낸 설교집의 제목에 “정치적 설교” “선동적 설교”라는 제목을 달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적임을 선포합니다. “설교란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선교를 증언하고 선포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하여금 이에 참여하게 촉구하는 것이므로 설교는 인간을 억압하는 이 땅의 사회·정치적인 모순이 구조화된 체제에 대한 비판, 도전, 심판을 의미하고, 동시에 선동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다.”(<산 아래 현실로 내려가자: 홍근수 목사의 선동적 설교> 6.)고 말씀하십니다.
유학 시절 홍 목사님이 깊이 공부하신 내용들은 해방신학, 유럽의 정치신학, 역사적 예수, 윤리학,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었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 결정적 영향을 준 에른스트 블로흐에게 심취하여, “에른스트 블로흐의 프로메데우스적인 기독론”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내십니다. 즉 홍 목사님은 신앙적 실천과 신학적 사유 모두 매우 진지하고 깊이 있게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2002년 향린에 교인으로 등록하고 홍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 느꼈고, 홍 목사님의 향린 목회 말년 3년에 걸친 누가복음 강해 설교집 <빈들에서 외치는 설교>을 편집했을 때, 출판사 사장에게도 말씀드렸지만, 홍 목사님의 설교는 깊은 신학이 녹아 있고, 복음의 총체성을 제대로 설파하는 설교입니다.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위해 한신대 신학대학원을 택하신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 당시 한국신학대학이 대학 인가를 받은 유일한 신학교였고 학문적, 자유주의적 교육을 지향해서 홍 목사님의 열망과 기대에 맞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법대에서 기독학생회 운동을 하고 있었을 때 한국신학대학 교수이셨던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서 그가 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에 대한 설교를 감명 깊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처음 한국신학대학이 있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우리 교단의 목사님이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과 목회하시던 시절 홍 목사님은 북미기독학자회 이사를 맡으시고, 홍동근 목사님, 강위조 박사님과 함께 통일신학동지회도 만드십니다. 뉴욕에서 활동하시던 한완상 박사가 교수 복직으로 귀국하시고, 워싱턴 DC에서 목회하시던 문동환 목사님마저 귀국한 후에 홍 목사님은 미국 동북부 지방의 유일한 통일 운동가로 캐나다, 워싱턴 DC, 로스앤젤레스까지 통일 강연과 행사를 주도하셨습니다.
홍근수 목사님께서 향린으로 오시게 된 것은 문동환 박사님의 소개였는데, 오실 때 공동의회 전 설교를 하게 되셨고, 그때 열 두분의 장로님이 미리 만나자고 하면서 세 가지를 부탁하게 됩니다. 설교할 때 정부 비판하는 설교를 삼가고, 정치적인 문제는 삼가고, 미국 찬양하는 것도 삼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홍 목사님은 원래 하시던 대로의 설교를 그대로 하셨고, 당연히 거기에는 정치적인 것과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 ‘반미’와 반전, 반반공이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한 삶을 산다는 신조는 홍 목사님의 삶에서 초기 모습 그대로 끝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런 설교에도 향린교회는 홍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청빙하였고, 이후 홍 목사님의 설교와 강연 원고는 한 부는 검찰로, 한 부는 안기부로, 한 부는 경찰 고위층으로 가는 그런 선포였습니다. 호랑이처럼 예언자적 외침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거리에서 지내셨던 홍 목사님에게는 박사, 의장, 공동대표, 상임 공동대표, 회장, 선생 등 여러 호칭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홍 목사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호칭은 ‘통일 목사’였습니다.
홍 목사님은 안병무 선생님의 민중신학만큼이나 우리가 처해 있는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통일신학이 한국신학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평화와 민족 통일을 위한 목회는 기독교인의 ‘필수과목’이라는 성서적 확신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그의 뒤를 따른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반드시 평화와 통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홍 목사님은 예수가 화해, 통일, 평화를 가르쳤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 것이라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홍 목사님도 죽음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이 일에 온몸을 드려 매진하셨던 것입니다.
1988년 KBS 심야토론 후에 향린의 청년들이 교회 사택에 왔다 가면서 홍 목사님께 질문을 하나 합니다. “목사님,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옵니까?” 홍 목사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글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 살고 그것도 아주 짧게 산다. 이 짧은 생을 일관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차피 죽을 몸인데 죽는 것을 겁내지 않고 내가 소신대로 살겠다고 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목사님이 심야토론으로 감옥에 가신 때는 1991년 2월이었고, 그때 향린교회는 창립 38주년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감옥에서 향린 40주년 목회 계획을 하시고, 40주년 기념교회를 창립, 교회갱신 선언과 통일공화국 헌법 초안을 작성, 국악 찬송가를 발행 등을 구상하고 편지를 써서 교회에 보냅니다. 감옥에서의 목회 계획들은 92년 8월 24일에 석방된 후에 절차를 밟아 실행하게 됩니다. 그때의 목회적 열매들이 지금의 향린을 만든 것이고, 또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본회퍼, 마틴 루터 킹, 우찌무라 간조, 성 프란치스코, 체 게바라를 존경하셨던 홍 목사님의 모든 목회와 선교와 사역은 진정 이 땅의 민중의 평화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향린의 목회가 이 시대의 민중의 생명과 참된 평화를 위한 것이 되기를 빕니다.
거라사에서 군대 귀신에 의해 시달린 사람을 예수님이 고치셨듯, 오늘날 우리를 병들게 하고 망가뜨리는 것들을 정확하게 명명하고 쫓아내야 합니다. 홍 목사님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입을 열어 말씀하셨고, 그래서 “빨갱이 목사”라는 낙인을 얻으셨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낙인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홍 목사님이 얻으신 그 낙인도 같은 흔적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붙인 낙인이 아니라 십자가가 새긴 흔적이고, 새롭게 창조된 사람의 표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가자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신음 앞에서 평화를 외치고 전쟁의 폭력을 물리치는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되기를 바랍니다.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을 둘러싼 패권 전쟁으로 인해 아파하는 모든 생명의 수난에 동참하여 그들과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두 스승을 따라 고난의 현장으로,
민중이 있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신음하는 이들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유인으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