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운다는 것

by phobbi posted Sep 30, 2026 Views 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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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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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9. 30.

 

또 여기서 인간 본성의 가장 뚜렷한 특성의 하나인 ‘운다’(weinen)는 것을 설명해 두어야만 하겠다. 우는 것은 웃는 것과 더불어 인간의 본성을 동물과 구별하는 표시 가운데 하나이다. 우는 것은 고통의 표출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아주 작을 때에도 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은 고통을 느끼고 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반성하는 데 있어서 고통을 반복할 때에만 운다. 고통이 육체적인 것일 때에도, 사람은 고통의 감각에서 고통의 단순한 표상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 자신의 상태를 참으로 동정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남이 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자기는 충분한 동정과 애정을 갖고 그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굳게, 그리고 진심으로 확신한다. 여기서 그는 자신에게도 진실한 동정의 대상이 된다. 그는 남을 구해 주려는 강한 마음을 가지면서, 동시에 그 자신이 구원을 청하는 자이며, 남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도 고통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 이러한 이상하게 차분해진 기분으로 고통의 직접적인 감각이 먼저 이중의 우회로를 돌아 다시 지각되기에 이르러, 남의 고통으로 표상되고 동정받아, 거기에서 갑자기 직접적인 자기 고통으로 지각된다. 자연은 이렇듯 이상한 육체적 투쟁으로 고통을 덜어 가볍게 한다. 따라서 ‘우는 것은 자신에 대한 동정’, 즉 그 출발점으로 다시 던져진 동정이다. 그러므로 우는 것은 사랑과 동정의 능력과 상상으로 인해 제약되어 있다. 냉혹한 인간이나 상상력이 없는 인간은 쉽게 울지 않는다. 우는 것은 한편으로 착한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라 여겨 분노를 가라앉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울 수 있는 사람 같으면 반드시 사랑, 곧 다른 사람에 대해 동정도 할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정은 방금 말한 방법으로 울음을 일으키는 기분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가 그의 감정을 소박하고 진실하게 표현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여기에 설명한 그대로이다.

 

사색에 잠기면서 산책을 하면,

갑자기 ‘나 자신을 동정하고 싶은 심정’이 강하게 일어나,

가끔 소리 높여

울게 된다.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거늘.

 

위에서 말한 것은 어린아이들이 고통을 받았을 때 위로의 말을 듣고 비로소 운다는 것, 다시 말해 고통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표상 때문에 운다는 것을 보아도 확인된다. 우리가 자신의 고통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상상으로 생생하게 그 괴로워하는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거나, 그 사람의 운명 속에서 인류 전체의 숙명을, 무엇보다 자신의 숙명을 보거나 하여, 결국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울고 자신에게 동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울지만, 그 주된 이유 또한 이것과 꼭 같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슬퍼하는 사람이 우는 것은, 그 죽은 사람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눈물이라면 부끄러워할 일이지만, 때로는 오히려 울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정도이다. 그가 죽은 자의 숙명 때문에 우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죽은 자가 오랫동안 힘겹고 절망적인 고통을 겪어 죽음이 소망스러운 구원이었던 경우에도 역시 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인간 전체의 숙명에 대한 동정이다. 인간이란 유한성의 손아귀에 돌아가며, 이 유한성 때문에 아무리 부지런하고 활발하게 생활을 해도 결국은 사라져 무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인류의 숙명 속에서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숙명을 본다. 또한 그 죽은 자가 자기와 가까울수록 이 생각은 더욱 강하며, 아버지인 경우에는 가장 심하다. 아버지가 늙거나 병에 걸려 사는 것이 고생스럽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들에게는 무거운 짐이었다고 할지라도, 아들은 그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게 된다. 이것도 지금 말한 이유에서이다.

 

쇼펜하우어 지음/권기철 옮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동서문화사, 2025. 4. 1. 1판 5쇄 발행), 44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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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반성 속에서 떠올릴 때 운다.

인간은 자기 고통을 남의 고통처럼 바라보며 동정하고,

그 동정이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올 때 운다.

그래서 그는 “우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동정”이라고 말한다.

남의 고통이나 죽음 앞에서 울 때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의 운명 속에서 인류 전체의 숙명과 나 자신의 숙명을 보며 운다.

따라서 울음은 상상력과 동정의 능력을 전제한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인간이 운다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분석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울음이 흔한 의미의 이기적 자기 연민은 아니지만,

나와 남 사이의 이중의 우회로를 거쳐서,

인류의 숙명을 동정하는 것이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결국 타자의 타자성은 사라지고, 동일성의 형이상학 속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가?

쇼펜하우어라면 나와 남의 구별은 애초에 현상일 뿐이라고 답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예수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고 울었고(눅 19:41-44),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었다(요11:33-35).

예수의 울음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울음과 다르다.

예수는 막연한 “인류의 숙명”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나사로,

자기 역사를 가진 예루살렘을 향해 운다.

예수의 울음은 자기에게로 되돌아와 고통을 달래는 울음이 아니라,

무덤의 돌을 옮기게 하고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울음이다.

그의 울음은 나와 남이 본래 하나라는 동일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차이를 유지한 채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무는 연대에서 나오는 울음이다.

 

바울은 이런 예수의 울음을 보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b)

 

- 향린 목회 696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