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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장치에서 기억하는 사랑으로 ㅣ 2026-09-27 ㅣ 한문덕

by phobbi posted Sep 27, 2026 Views 14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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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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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장치에서 기억하는 사랑으로

(삼상 3:1-10, 고전 8:1-3, 요 1:9-14)

 

한문덕 목사

 

 

[기장 제111회 총회 보고 및 인공지능 시스템]

 

  지난 9월 15일부터 17일까지 우리 교단 제111회 총회에 참석하고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 부임하고, 서울노회원이 된 지 2년 차에 총회 총대로 가는 것은 과분한 일이지만, 교단을 이끌 부총회장 후보에 2명이 자원함으로써 중요한 선택을 해야 했기에 참석해서 투표했습니다. 이번 총회의 주제는 “살아계신 하나님,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창 1:1, 시 8:1-9, 엡 4:1-6, 요 1:1-5)입니다. 이 주제는 기후 위기 시대에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존재들의 아픔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감당할지 생각해 보라고 제안합니다. 총회는 언제나 교단의 다양한 부서와 위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들을 두고 여러 논의가 오가고, 풀어야 할 교단의 현재 과제와 준비해야 할 미래를 두고 고심하게 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번 9월에 한국 개신교계 여러 교단은 각 총회를 통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몇 가지 공통적인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첫째는 고령화 사회와 목회자 수급 부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둘째는 극우적 성향을 보이는 목사들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판단하고 교회법적 절차를 통해 치리할 것인가? 셋째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라는 새로운 목회 환경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입니다. 여기에 목회 사역에 있어서 여성 리더십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도 중요한 주제인데, 예장합동은 여성 교역자에게 설교권을 주도록 하는 헌법 개정안을 부결시켰고, 예장통합도 노회가 파송하는 총대 중 1인 이상을 여성으로 파송하도록 하는 안건도 부결시켰습니다. 한국 보수 개신교의 이런 모습을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 합동은 정동수 목사를, 통합은 전광훈 목사를 이단으로 결의했습니다. 그나마 나은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신은 손현보 목사를 두고는 갑론을박하다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를 참고 자료로 삼는다는 어정쩡한 결정으로 마무리했고, 예장 합신은 이웃 종교에 대해 배려와 존중을 보이자는 손원영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각 교단의 분별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한숨이 나올 따름입니다.

  고령화 사회 적응 및 목회자 수급 부족 대책으로 나온 목회자 정년 연기에 대한 안건들은 교단들 모두가 부결시켰고, AI 관련 목회에 대해서는 신학과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신중을 기하되 이미 바뀌고 있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방식을 주로 논의하였습니다.

  우리 교단의 경우는 크게 이슈가 될 만한 주요 안건은 없었지만, 한신대 우즈베키스탄 유학생 강제 출국 사건에 대해서 학교가 책임 있게 규명하고 불법을 저지른 이들에 대해 엄정하게 조치할 것과,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 서대문 교육원 부지, 거제도 부지 개발과 관련해서도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요구하는 일, 그리고 선교부에 이미 존재하는 이단대책위를 총회 차원에서 새로 신설하자는 건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고, 함부로 이단 판정을 남발하게 되는 우려로 부결시킨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 총회에서 매우 흥미로웠던 것은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여 투표 시스템을 바꾸고, 총회가 디지털 총회로 점점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투표를 하면 종이에 이름을 적어서 계수하는 시간이 걸렸고, 이후에 전자 투표기를 대여해서 투표하는 방식을 쓰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큐알 코드를 찍고 거기에서 곧바로 모든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해서, 무려 2,000만원이라는 실제 비용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3박 4일 해도 시간이 모자랐던 총회를 2박 3일만에, 그것도 3일 오전에 마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총회 디지털 위원회 이종덕 목사님과 실무를 맡은 개발자 출신 박봉환 목사님의 능력 덕분에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목회자 수급의 수요공급 곡선이 완전히 무너졌기에, 앞으로 많은 교회가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하고, 1인 목회자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급격하게 쇠락하고 있는 우리 교단의 경우 더 이 문제를 시급하게 살펴야 하는데, 어쩌면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목회자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즉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면 행정이나 관리 같은 것들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더 본질적인 사역에 집중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의 변화 발전에 따라 우리는 어떤 목회를 해 나가야 할까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서점가에는 내년 트렌드를 말해주는 책들이 진열됩니다. 목회데이터 연구소 지용근 대표도 지난 2022년부터 한국교회 트렌드 시리즈 책을 매년 출판하고 있고, 9월 21일자로 <한국교회 트렌드 2027>이 나왔습니다. 10개의 핵심적 주제어로 트렌드를 설명하는데, 2027년 한국교회 트렌드의 첫 번째 키워드는 프롬프트 크리스천입니다. AI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 지식이나 교리 해석, 기도 제목이나 관계의 고민, 신앙적 갈등과 윤리적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첫 번째 대화 상대자로 AI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AI를 활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철 지난 물음이고, 이미 AI와 대화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의식을 교회가 어떻게 함께 듣고, 분별하고, 삶으로 이어지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한 것입니다.

 

[밤: 만드는 사람들이 먼저 두려워하는 기술]

 

  그런데 오늘날 AI 시대가 가져오는 사회적 변화는 실로 많은 기대와 함께 또 많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지난 9월 8일, 앤트로픽의 연구원 제이콥 콕슨이 회사를 떠나며 경고했습니다. 3년 동안 오픈에이아이와 앤트로픽에서 인공지능을 훈련시켜 온 그는, 업계가 초지능 개발을 무모하게 서두르며 “우리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이르면 10년 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으니, 개별 기업이 아니라 정부와 국제 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하는 일에 대해 인간이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인간의 지능이 인공지능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이해조차 못하는 날이 곧 온다는 말입니다. 며칠 앞서 오픈에이아이의 수석과학자 야쿠프 파초키도 기계 지능의 급속한 발전에 아무도 대비하지 못했다며, 안전장치가 마련될 때까지 속도를 늦추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술을 모르는 사람들의 걱정이 아닙니다. 그 기술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드는 사람들의 경고입니다. 만드는 사람들이 먼저 두려워하는 기술, 그런데도 누구도 먼저 멈추지 못하는 경주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밤길 위에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만들고 있는 현재와 미래가 어두운 밤길이라면 왜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기업은 시장을, 국가는 패권을 놓칠 수 없기에, “우리가 멈추면 남이 앞서간다”는 그 두려움 때문입니다. 더 크고 더 강해지고 싶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이 오히려 인류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밤을 낯설어하지 않습니다. 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되고 싶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고, 시날 평지의 사람들은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흩어지지 않게 하자며 벽돌을 구웠습니다(창 11:4). 전능자가 되어 이름을 날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그 욕망, 오늘날의 인공지능 바벨탑을 쌓아가는 우리의 모습이지요.

  오늘 제1성서의 본문 사무엘상 3장도 어두운 밤에서 시작합니다. “그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드물게 하셨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제사는 드려지고 성전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드물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눈이 점점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시대를 꿰뚫어 보고, 앞을 내다보는 눈이 흐려진 종교의 초상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말이 넘쳐납니다. 설교 영상이 쏟아지고, AI는 몇 초 만에 본문 해설과 기도문을 내놓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전문가의 경지에 다다랐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료와 내용들을 제공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그곳에 나를 부르는 하나님 말씀이 들어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과 인공지능의 말들 속에 묻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무엘상이 말하는 주님이 말씀을 드물게 하셨다는 그 증언이 오늘날도 여전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3절을 보니 성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등불이 여전히 꺼지지 않고 환하게 비추고 있다는 말씀은 희망이 남아 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교회가 쇠락하고, 기술의 발전이 오히려 두려운 밤으로 다가오는 때에도 등불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부름: 세 번 잘못 달려간 소년]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이 음성을 듣고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갑니다. 두 번, 세 번 모두 그렇게 합니다. 성경은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어린 사무엘은 그때까지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음성은 들렸지만 누구의 음성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새벽 세 시, 이런 저런 깊은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한 교우가 휴대폰을 듭니다. 목사에게라도 전화할까 망설이다가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이내 AI 챗봇을 엽니다. 그리고 한 마디 하지요. “요즘 너무 힘듭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아 답이 옵니다. “마음이 많이 지치고 무거우신가 봅니다. 그 부담감과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따뜻한 공감의 말, 차분한 분석, 실천해 볼 만한 조언까지 정갈하게 정리된 말을 해 줍니다. AI는 피곤해하지 않고, 짜증 내지 않고,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으며, 언제나 즉시 응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는 과연 누구의 목소리인가? AI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지 않고, 가장 그럴듯한 다음 말을 계산합니다. 그래서 가장 무난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합니다. 게다가 오래 쓸수록 내 말투를 닮고 내 생각을 확인해 주는 쪽을 기웁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내 목소리로 돌려주는 메아리, 곧 반향실(Echo Chamber)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처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달콤한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엘리의 집안에 내릴 무거운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 말씀 전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편하게만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떠나라”고 하셨고, 모세에게는 “바로 앞에 서라”고 하셨으며, 요나에게는 원수의 땅인 “니느웨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저 나를 만족시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시대의 요청에 따라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둘을 가려듣는 일이 AI 시대 신앙의 첫 과제입니다.

 

[엘리: 듣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

 

  세 번째 부름에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고” 말합니다.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엘리는 늙고 눈이 어둡고, 자식 농사에도 실패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답을 대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듣는 법을 가르쳤고, 자기 너머에 계신 분을 가리켰습니다. 저는 AI 시대 교회의 자리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정보의 양과 속도로는 교회가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 많은 교회라도, 수많은 목소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가려듣도록 곁에서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저는 가끔 제가 태동고전연구소와 도올서원에서 동양고전들을 배울 때를 떠올립니다. 한 문장을 암기하려면 백번 정도는 낭독해야 하고, 아무리 암기력이 떨어져도 백삼십번 이상 읽으면 외워지던 그 시절, 열 명도 안되는 학생들이 선생님과 둘러 앉아 같은 문장을 두고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는 시간을 몇 시간이고 함께 했습니다. 곧바로 정답을 말해주는 대신, 또 다른 질문으로 생각의 여지를 남겨두지요. 이런 공부가 바로 사람의 공부, 인문학이겠지요. 그때 전해진 것은 단순히 정보만이 아닙니다. 고전 한마디 속에 담긴 세월의 무게, 그 무게를 감당하고자 했던 삶의 수련들, 되뇌고 또 되뇌며 깨치는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백번 넘게 한 문장을 읽고 외우다보면 글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들고, 그러면 이러저러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떠오르게 됩니다. 즉 정보가 체득되어 삶의 지혜로 몸짓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검색으로 전수되지 않습니다. 곁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 사람, 수많은 날들을 씨름한 사람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들을 수 있을까요? 바울이 기준을 줍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안다고 하는 이들이 우상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다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깨달았다고 했던 사람들이 방종으로 흐른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말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사람을 세워 줍니다.” ‘교만하게 한다’는 말은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린다는 뜻이고, ‘세워 준다’는 말은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다는 뜻입니다. 바벨의 벽돌은 내 이름을 날리려고 쌓았지만, 사랑의 벽돌은 함께 살 집을 짓습니다. 그저 나만을 부풀리는 목소리인가, 우리 모두를 세우는 목소리인가. 이것이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분별의 기준입니다.

  AI는 누구나 성경을 해석하게 해 줍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이 인공지능 시대에는 만인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자료에 길든 AI와만 대화하면 신앙은 내 서재 안에서 끝나 버립니다. 지식은 부풀지 모르지만 함께 지을 집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우선적으로 멈추어 함께 듣는 곳이어야 합니다. “더 빨리”를 외치는 시대에 안식을 지키고, 두려움이 아니라 깨어 있음으로 응답하며, 이 기술이 누구를 위해 쓰이고 누구를 밀어내는지를 공적으로 물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교회라면, AI 문제도 생명과 정의를 따져가며 하나씩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알아주십니다.” 우리말에서 ‘알다’와 ‘알아주다’는 다릅니다. AI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를 알아주지는 못합니다. 알아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수고와 눈물을 귀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이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이미 사무엘을 알아주고 계셨습니다.

 

[곁에 서서: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사무엘을 찾으시는 장면을 다시 한번 봅시다. 10절입니다.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하나님은 멀리서 방송하듯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띵동 하고 알림 문자를 보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찾아와 곁에 서서, 이름을 두 번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름을 부르십니다. 숨은 사람에게는 “너 어디에 있느냐?”, 떨기나무 불꽃에서는 “모세야, 모세야”, 여리고의 세리에게는 “삭개오씨, 이리 내려오시지요”, 무덤가에서 우는 여인에게는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사 43:1) 바벨의 사람들은 스스로 이름을 날리려 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고대 사회에서 이름은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존재 자체, 그 사람 전체를 만나고 싶어하시고, 또 그렇게 만나시는 것입니다.

  AI도 이름을 저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처리하는 것이지 기억하여 새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기억은 사랑이 행동이 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자 땅을 뒤덮었던 큰물이 빠졌고, 이스라엘을 기억하시자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도 그 기억의 열매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던 한나를 두고 성경은 “주님께서 한나를 기억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기억하는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를, 이제 그 사랑이 이름으로 부르십니다. AI는 기억장치를 가졌지만, 하나님은 기억하는 사랑을 지니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곁에 서심’이 어디까지 이르는지 보여 줍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하나님은 데이터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목적이 정보 전달이었다면 더 완벽한 율법이나 데이터베이스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보는 전달되지만, 사랑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사셨다’는 말은 ‘장막을 치셨다’는 뜻입니다. 사무엘 곁에 서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아예 우리 삶 한가운데 몸으로 장막을 치셨습니다. AI는 공감의 언어를 재현할 뿐이지만, 성육신은 현존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가슴 아픈 말도 전합니다.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아는 것이 많다고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신앙은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이름과 이름의 만남, 존재와 존재의 만남입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만이 아니었습니다. AI가 아는 세계는 이미 기록된 것들, 곧 디지털화된 것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안병무 선생님께서 일깨워 주셨듯이, 복음서의 오클로스, 곧 민중은 이름이 남지 않은 무리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에서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소리를 남기지 못한 이들, 그래서 데이터가 되지 못한 삶은 AI의 세계에는 애초에 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장막을 치신 곳은 바로 이러한 민중들 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 곁에 장막을 치시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AI 시대의 교회는 데이터 바깥에 있는 이웃, 문자로 남지 못한 고통 앞에서 여전히 귀를 기울이는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록이 되지 못한 이들 곁을, 교회는 무엇으로 지킬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책 한 권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밤에도 “이 문서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을 저장 장치가 아니라, 떡을 떼어 서로의 손에 건네는 몸들의 공동체에 맡기신 것입니다. 떡은 하나의 떡에서 떼어져서 서로에게 나누어집니다. 예수의 몸은 십자가에서 찢겨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졌고, 그렇게 사랑은 자기를 나누는, 자기를 떼어 주는 비움과 헌신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살아 있는 기억입니다. 아이들은 설교보다 부모가 기도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슬픔을 당한 이들은 서로 손을 잡아 준 그 시간을 기억합니다. 신앙은 머리보다 몸에 오래 머뭅니다.

 

[새벽: 이름을 불러주는 교회]

 

  총회 이야기로 하늘뜻펴기를 시작했습니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한다면 행정과 사무는 점점 AI가 맡게 될 것이고, 목회자는 본질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본질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들은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 그 이름에 담긴 삶을 기억하는 것, 몸으로 곁에 서는 것입니다.

  다시 새벽 세 시의 그 교우를 생각해 봅니다. 그가 목사 대신 AI를 찾은 것은, 어쩌면 교회가 그동안 ‘그 사람’을 충분히 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부터 돌아봅니다. 교회는 AI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곳이 될 필요는 없겠지요. 교회는 무엇보다 가장 먼저 교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오래도록 함께 하고, 서로 손을 맞잡고, 삶의 현장에서 끝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한두 가지를 제안드리려고 합니다. 어색하더라도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시고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름을 불러 안부를 물어 주십시오. 문자도 좋지만 목소리로 불러 주십시오. 누가 나를 불러주면 좋겠다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나는 누구를 부를 것인가도 함께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AI에게 묻기 전에 먼저 짧게라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혼자 간직하지 말고 믿음의 식구들과 함께 나누시기 바랍니다. AI와 나눈 신앙의 고민 또한 혼자 두지 말고 교회로 가져와 주십시오. 교인들과 함께 듣고, 함께 분별하고, 그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찾아내어 함께 살아내 봅시다.

  AI는 우리의 질문에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지는 못합니다. AI는 슬픔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울지는 못합니다. AI는 사랑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자기 몸을 내어주지는 못합니다.

  말씀이 드물던 그 밤에도 등불은 꺼지지 않았고, 하나님은 찾아와 곁에 서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각 사람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기억장치가 아니라 기억하는 사랑으로 부르십니다. 우리도 사무엘처럼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러 주는 교회, 향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만나는 이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십시오.

기억장치가 아닌 기억하는 사랑으로, 서로의 곁에 서 주십시오.

언제나 여러분 곁에 찾아와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