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9. 13.
진리, 혹은 하나의 정답이나 정전이 삶의 현실에 부합하는 지침이 될 수 없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역사가 일깨워준다. 예를 들어 중세의 종교적 폭력이나 근세 이후의 정치적 폭력들 중 어느 것도 한 사회를 지배하는 중앙 집권적 진리가 없어서 생긴 비극이 아니다. 비극은 진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진리의 숫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비극은 늘 진리의 독점에서 생겼다.
진리의 독점은 하나뿐인 진리의 허상을 조장했고, 이 허상은 인륜과 상식을 무시하는 폭력을 정당화했다. 조직적이고 참학한 살육은 늘 하나뿐인 진리의 이름에 자신의 정당성을 얻고 있었던 것을 역사를 배운 이들은 잊지 않고 있다. 진리의 후광을 입고 허위의 혀를 자르는 검이 얼마나 날카로우랴. 진리라는 단답으로 무장한 채 곡절과 사연 많은 삶을 한 가지 모양으로 재단하는 열정 속에 어떤 폭력이 잠재해 있는지. 진리를 묻는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는 예수와, 서울역 앞을 횡행하며 지옥불을 경고하는 전도 대원들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경지는 사회철학의 모토로서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물론 종교성의 사밀하고 묘연(杳然)한 구석을 아는 이라면 이 경지의 현실성을 전적으로 도외시할 수도 없겠다. 그러나 별다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삶을 마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진리에 집착하는 태도보다는 자유의 폭을 넓히는 쪽으로 공동체를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자세히 볼수록 오히려 복잡하고 애매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진리가 보장하는 낙원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남의 자유를 꺾는 폭력을 행사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민, <컨텍스트로, 패턴으로>(문학과 지성사, 1996. 10. 16.),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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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을 뒤집으면,
자유하게 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얼마나 많이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해 왔는가?
특히 진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긴 종교가 이념이, 이데올로기가 그러했다.
진리에 대한 집착보다 더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복잡성과 애매성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늘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내 고집대로 진리를 고수하기보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가장 적절한 응하기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폭력을 줄이고 지혜롭게 살아가는 길일 것이다.
- 향린 목회 67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