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9. 05.
남은 모르지만 나는 대속은 이해할 수가 없었읍니다. 대속이란 말은 인격의 자주가 없던 노예 시대에 한 말입니다. 대신은 못하는 것이 인격입니다. 그러므로 인격 없는 자에게는 대속이란 말이 고맙게 틀릴 것이나 자유하는 인격에는 대신해주겠다는 것이 도리어 모욕으로 들릴 것입니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에 들어가고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벌써 역사적 예수가 아닙니다. 그런데 대속을 감정적으로 강조하면 그 체험에 들어감이 없이 대신해주었다는 감정에만 그치기 때문에 인격의 개변이 못 일어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에 감격하는 사람은 대개는 인격의 개변, 곧 죄의 소멸은 없이 그 기분으로만 감사하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에 있어서 그러한 감상적인 대속 신앙은 아무 실효가 없읍니다. 대속이 참 대속이면 지난날의 진 빚을 물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빚을 아니 질 능력 곧 새 인격을 주어야 할 터인데, 죄를 아니 짓게 돼야 할 터인데, 실지에 있어서 그런 사람 없읍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주관적 도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함석헌, <함석헌 전집 4,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한길사, 1988. 2. 20. 제7판 발행),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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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뭘 해주는 것으로 제가 자기의 것을 삼아선 안된다.
스스로 하고,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넘어서야 한다.
대속이 아니라 자속이다.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깨침에서 대속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거기에서 멈추면 바로 그 자리로부터 타락하게 된다.
책임도 지지 않고, 다 떠넘기면서 자기는 쏙 빠져나간다.
대속이 인격의 개변 없이 모두 다 예수에게 떠 넘기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어선 안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는 지지 않아도 된다가 아니라,
바로 그러하기에 나도 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 향린 목회 67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