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적

by phobbi posted Aug 17, 2026 Views 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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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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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8. 17. 

 

한마디로, 건달이란 교양이 빠진 귀족(주의)을 가리키는 메타포다. 러셀이 말한 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등의 비용을 지불한 적이 없는 귀족, 시간지체의 퇴행과 도착의 존재인 것이다. 사치와 낭비의 취향을 ‘티내기’(부르디외)처럼 도드라지게 표상하면서 노동과 축적의 자본제적 체계에 결락한 존재감을 보충하려는 존재, 건달이 꼭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건달은 누구나처럼 축제와 폭력의 세계를 동경하는 고중세적 감수성에 기대지만, 다만 노동이라는 산업사회적 비용을 치르지 않으려는 판타지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건달이라는 현상과 현 시대 교양 대중과의 관계에 있다. 속물이 교양의 자격을 갖추었으면서도 다만 체제 속에 적응하고 안정화하는 보수주의에 머물러 교양 그 자체를 관념화, 세속화, 상품화한다면, 건달은 아예 교양이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채 도착적·퇴행적으로 신분의 상승을 노리는 일련의 사회적 행태다. 그런 뜻에서 건달은 단순한 ‘어깨’들이 아니라, 자본제적 삶의 체제와 동서(同棲)하면서도 잃어버린 쾌락의 형식을 고집하는 반(反)교양적 유물(遺物)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민과는 다른 표정과 보조(步調)로 걷는 총수(總帥)도 일종의 건달일 것이며, 사냥의 현대판 대체품인 각종 투기(投企)의 귀재들도 역시 건달의 일종일 것이다.

 

속물과 전달에 이어 세 번째로 등장하는 인문학적 교양의 적은 신자(信者)로 통칭될 만한 존재들이다. 속물이 교양의 역설적 부재 현상이고, 건달이 교양의 비용을 치르려 하지 않는 시대착오적 판타지라면, 신자는 아예 (인문학적) 교양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할 수 있겠다. 이를테면, 신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니체의 덫에 (자발적으로) 걸린 이들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대타자의 결여(缺如)를 상상적으로 미봉한 채, 재서술이나 인문적 아이러니 - 가령 윌리엄스에서부터 로티에 이르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일상어(Tagessprache)의 중요성을 살피면서 강조한 그 열정과 아이러니 - 를 허용하지 않는 종지(宗旨)로 매듭을 지은 절대존재와 낭만적·고백적으로 동일시하는 단계에 고착된 존재, 바로 그것이 신자다. 물론 신자는 단지 특정 종교를 신봉하면서 강박적으로 그 의례를 행하는 구성원들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리고 신자라는 게 하나의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고려해야 할 중요한 변수이긴 하다. 하지만 그 요체를 말하자면, 선생이라는 중심의 빈 곳을 깨쳐 그 빈 중심을 향한 전이(übergang)와 탈전이를 적절하게 수행하거나, 혹은 달리 말해 선생이라는 ‘틀’을 뚫어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꼴’을 ‘본’으로 변형시켜가는 과정이 공부라고 한다면, 신자란 원리상 그 공부의 필요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존재이며, 따라서 필경 공부에서 동심원적으로 발원하고 파급될 수밖에 없는 교양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일부 신자들의 비상식에 이르는 무교양의 집단적 모방 현상은 ‘너무 빨리 말한 진리’와 열정이 사통하는 순간에 벌어지는 짝패들의 풍경인 것이다.

 

김영민,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한겨레출판, 2011. 2. 28. 초판 1쇄 발행), 12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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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는 교양의 적으로 “속물”, “건달”, “신자”, “소비자”를 언급한다. 

여기에 신자가 들어간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하리라. 

무지성적, 맹목적 믿음의 강조는 교양의 적으로서의 신자들을 양산했고, 

이런 신자들은 종교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존재하며,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수 신자들의 등장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 향린 목회 652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