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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ㅣ 2026-08-16 ㅣ 한문덕

by phobbi posted Aug 16, 2026 Views 19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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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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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107:23-32, 고후 1:8-11, 4:35-41)

 

한문덕 목사

 

[시편의 말씀과 인생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은 107편입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에 큰 축제가 열리면 제일 첫 행사로 여는 예배에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축제에 참석한 각 사람이 제단 앞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각각 감사 제물을 드리며(22),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 사람 중에는 광야 사막길을 걸어야 했던 상인들도 있고(4),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사람도 있고(10), 자신의 실수로 온갖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17).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여러 페니키아 항구로부터 지중해의 여러 섬과 해안지역을 다녔을 상인들의 고백입니다.

  지중해를 건너던 그 상인들의 절절한 고백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 앞에 그대로 되살아납니다. 아무리 큰 배라 하더라도, 폭풍을 만난 파도의 물결이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면,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유능한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습니다. 모두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립니다. 평생 쌓아온 지혜도, 손끝의 기술도, 그 순간만큼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저는 바닷사람이 아니라서 파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르지만, 1990년도에 큰물의 무서움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엄청난 비로 한강의 수위가 높아졌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여 일산 쪽으로 내려오는 둑이 터졌는데, 그때 제가 살던 파주 교하도 홍수로 인해 엄청난 농경지가 다 침수되고, 마을도 잠겼습니다. 그때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때 온 사방이 물로 가득 차서 마치 노아의 홍수처럼 정말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순풍에 돛 단 듯 큰 격랑 없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면 정말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아버립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자신이 알던 그 모든 지식도 지혜도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그 순간에, 막막함 속에서 부르짖었을 때, 주님께서 구해 주신다면, 주님께서 저 거센 풍랑을 잠재워 주신다면 그래서 그 위기를 넘겼다면, 그 순간의 감격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감사와 은총이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온전히 자기 삶을 맡긴 사람들은 인생의 파도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잠시 무너질 수는 있지만, 이내 일어서고,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온 날들을 점검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위기와 고난의 순간을 통하여 더 많은 깨달음도 얻고, 하나님도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합니다. 미처 몰랐던 것도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하고, 깊고 단단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있고, 공자는 내가 허드렛일들에 많이 능한 이유는 젊어서 빈천하였기 때문”(吾少也賤, 故多能鄙事. 論語』「子罕, 6)이라고 말하고, 맹자는 근심과 걱정 속에 살길이 있고, 편안함과 즐거움 속에는 죽음이 있다(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 孟子』「告子, 15)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일까요?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어려움과 고난을 자처합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이렇게 말씀하신 시점은 안식일 저녁이었습니다. 안식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쉬지도 않았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손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고, 그에게 몰려든 많은 병자를 또 고치시고, 산에 올라가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다시 바닷가에 나아가 큰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223~433) 그렇게 매우 바쁘고도 피곤한 하루를 보내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십니다. 사장님이 토요일까지 직원들을 불러서 함께 죽어라고 일하고, 그다음 날에는 다른 공장에 또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나, 주일에 하루 종일 사역에 힘쓴 부교역자들을 담임목사가 불러서 내일은 노회와 총회의 사역도 함께 해 보자라고 제안하는 것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다 저쪽이라고 할 때 과연 예수 일행은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건너간 걸까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동쪽에는 데카폴리스라는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고 서쪽은 유대 땅이었지요. 오늘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말한 것은 갈릴리에서 이방 땅 데카폴리스로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사역에 목숨을 바치기로 한 예수님 생각은 아마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유대 회당과 유대 마을들, 그리고 산과 바다 근처의 유대 민중들에게 전해졌다면 이제는 저 이방 땅에도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저쪽으로 건너가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안에 힘이 솟고 기대가 넘쳤을까요? 아니면 정반대였을까요?

  지금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이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우상 숭배를 자행하는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소식이 들려올 것이라 믿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구원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까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악마화하고 저주했습니다. 제가 719일 하늘뜻펴기에서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의 마음은 아마 요나의 마음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우선 가기 싫고, 또 가보지 못한 낯선 땅이라 두렵고.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라면 수십 가지도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란 스승을 따르는 자입니다. 제자들은 선민의식이라는 고정관념과 두려움부터 버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도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반대, 헤롯 당원의 위협, 심지어 가족의 몰이해까지 겪으셨던 것을 제자들은 지켜봐 왔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로 결국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 격려하셨지만, 유대 땅에서도 이렇게 힘든데 이방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합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내키지 않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배에 오릅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아무 계획도 준비도 없이 물설고 낯선 이방인의 땅을 향해 노를 젓습니다. 어두운 저녁이라는 시간의 상징은 어쩌면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제자들의 마음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복음서에서 배가 등장하고 그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가로지르는 장면들은 대개 초대교회의 상황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배 안에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만 있고, 외부인은 없습니다. 배는 예수님이 선교 전략을 짜는 곳이고, 제자들이 몸소 겪는 훈련장입니다. 의심의 먹구름을 가득 담고 노를 저어가는 제자들에게 결국 시험이 닥치고 맙니다. 큰 광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치고 물결이 일렁이며 배에 부딪히고 배 안은 물로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저 무시무시한 어둠의 세력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교회가 위기에 처한 것이지요.

  지금 제자들이 겪는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컴컴한 어둠 속, 저 바다와 무시무시한 바람과 파도가 몰려올 때, 이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제자들의 항변은 다소 무례한 느낌이 들지만 이해도 됩니다. 제자들이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가자고 한 것은 선생인데, 이런 어려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고 있다니 말이 되는가!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돌보지 않는 이를 선생이라 부를 수 있나?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다소 실망한 것 같습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예수님의 이 한마디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예수님을 늘 따라다니며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지켜보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치유를 받고, 기쁜 소식으로 행복해졌는지 보았으면서도, 또 예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애쓰면서, 인내하고 기다리면 놀라운 성공이 오리라고, 모든 민족을 품을 세상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건만 제자들은 아직도 그런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서에선 예수가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라고 말하지만, 마가에서 예수님의 꾸짖음은 노골적입니다.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날 우리에게 바다 저쪽은 어디인가?]

 

  향린 교우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바다 저쪽은 어디일까요? 지치고 피곤하더라도 반드시 가야 하는 곳, 그러나 아직 나서지 못해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주님께 꾸중을 듣고야 마는 그 지점은 어디일까요? 갈릴리 땅에 익숙했던 제자들에게 이방 땅 데칼폴리스가 선교 과제였듯이, 우리 향린이 떠나야 할 익숙한 땅, 마주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풍랑과 파도가 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들도 저마다의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으시겠지만, 제 생각을 몇 가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향린이 가야 할 첫 번째 바다 저쪽은 깊은 신앙과 신학의 세계입니다. 한국 교인들이 그동안 들어왔던 뻔한 교리나, 그저 종교적 갈증을 순간 달래주는 위안거리가 아니라 실제 내 삶과 존재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꿔나가는 사유와 행위의 힘으로써 말씀과 묵상,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두고 하는 씨름, 2000년 넘는 기독교 전통의 지혜를 배우려는 노력 없이 하는 교회의 활동은 너무나 쉽게 세속화되고 개개인의 취미활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는 신앙 고백의 산물이어야지, 세상의 사회활동이나 자기 욕망의 충족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향린이 가야 할 두 번째 바다 저쪽은 전체를 보는 안목포용적 태도’, ‘열린 귀기다려 줄 줄 아는 마음입니다. 향린교회는 작지만 큰 교회입니다. 아홉 개의 부서와 신도회, 그리고 수많은 위원회와 소모임이 저마다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활발함이 전체를 보지 못하는 근시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몸은 다양한 지체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다른 지체는 협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져 자기만 중요하다는 생각이 커지면, 우리는 그것을 암이라고 부릅니다.

  향린교회는 73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역사에서 배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배움이 제 몸에 스며들어 꽃처럼 피어나는 향기를 뿜으려면 무르익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고,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다소 무미건조한 듯이 보여도 차근차근 한 걸음씩 겪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향린교회가 겪고 있는 풍랑은 우선 한국 개신교계의 몰락입니다. 가장 큰 충격파는 지도력의 상실입니다. 따를만한 신앙인이 잘 보이지 않고, 신학생과 목회자가 급속하게 감소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깨울 수 있었지만, 한국 교회는 기댈만한 참 신앙인을 자꾸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장점을 잘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점과 실수를 거듭 지적하며 비난하기 전에 사랑으로 서로 잘하는 것들을 키워서 빈구석을 메꿀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교회의 온갖 활동을 해내는 것보다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목회도 선교도 사역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담임 목사를 모시기 위하여 수년간 수많은 목회자를 인터뷰하였던 청빙 위원회가 교인들에게 8명에 대한 중간 보고서 한 장을 제출했습니다.

 

1. 노아: 120년을 설교했으나 단 1명도 회개시키지 못했음.

2. 모세: 말을 더듬으며, 이전 교인들에 의하면 사소한 일에 심하게 화를 낸다고 함. 그리고 국제결혼을 했고, 살인 전과도 있음.

3. 다윗: 우리에게 꼭 맞는 지도자였으나, 신원조회 결과 이웃집 아내와 간통한 성범죄자. 자신의 비리를 숨기기 위해 권력을 남용함. 도덕성의 문제만 아니면 찬양 사역자로 고려했을 수도 있음.

4. 세례 요한: 자칭 세례자라 부름. 입은 것은 못 봐줄 정도. 잠은 늘 야외에서 자며, 이상한 다이어트 음식이나 혐오 음식을 즐김. 충동적인 데모를 일삼는 선동가로 보임.

5. 바울: 강력한 지도자. 그러나 융통성이 없이 너무 엄하고, 외모 또한 형편없음, 한번 시작하면 끝낼 줄 모르는 긴 설교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듣던 청년이 졸다가 창에서 떨어져 죽었음.

6. 디모데: 가능성은 있으나 너무 젊음. 적어도 나이 50이 될 때까지 더 많은 성숙이 요구됨.

7. 예수: 한창 인기 있을 때는 5,000명 이상의 신도를 가지기도 했으나, 결국 12명으로 줄어들었음. 독신자이며, 외모와 생활 방식, 거친 말투가 우리와 맞지 않아 성도들이 시험들 여지가 많음. 특히 청빙위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해서 난처하게 만듦.

8. 가룟 유다: 참고인의 말을 종합해 볼 때 후보자 중에 가장 유력자임. 보수주의자이며, 정치 세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특히 재정을 잘 관리할 줄 앎. 다음 주 설교를 들어본 후 우리 교회 담임 목회자로 청빙할까 고려 중임.

 

  우스개 이야기이지만, 웃음 뒤에 남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향린교회가 할 일은 부족한 서로를 사랑으로 세워주는 것입니다. 서로의 단점만 들추거나 자기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각자의 장점들을 살려서 상승효과를 일으켜야 합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에서 자신만 옳다고 여기게 되면 우리가 겪어야 할 큰 물결의 풍랑은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이제 하반기가 되면 내년을 생각하면서 각 신도회와 부서, 위원회는 부서장, 위원장, 임원들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9월에는 장로 선출을 위한 공동의회도 있습니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서로 돕는 마음으로, 책임과 권리는 나누면서 2027년도 준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워라]

 

  오늘 풍랑을 겪은 제자들의 상황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은 또 제자들에게 서로 아쉬운 부분을 토로하고 신뢰보다는 약간의 불신의 그림자마저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을 확고히 믿었더라면, 그 능력에 힘입어 저 광풍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더라면 굳이 예수님을 깨우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오늘 시편의 말씀처럼 주님은 우리를 온갖 곤경에서 구출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런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그 위기를 넘을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제자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한 자리에 서본 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고후 1:8). 바울은 지금 우리처럼 배 위에서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9).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바울이 붙잡은 것은 자기자신의 능력도, 자기 신학도, 자기 경험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9).

  제자들이 그날 밤, 아직 붙잡지 못했던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노 젓는 힘도, 뱃사람으로서의 경험도 다 소용없어지는 그 자리에서, 결국 자기를 의지하는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 그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목표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도 크고 작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향린도 그런 시간들을 지내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지날 때,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의 힘과 경험,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쌓아온 저력을 먼저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고백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진짜 믿음은 내 힘이 바닥났을 때 시작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고, 지금도 건져 주십니다.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시리라는 희망을 우리는 하나님께 두었습니다”(10).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건지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리 향린교회가 붙잡아야 할 믿음의 시제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느 단계에 와 있습니까? 내 안에 갇혀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과 의논하십니까? 그런데 저는 우리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무시고 계실 때에도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없이 내 생각으로 하려는 것이 0단계라면, 예수님을 깨우는 믿음은 1단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깨우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믿음,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 2단계, 3단계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믿음은 우리 자신이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는 믿음입니다.

 

[바람과 바다까지도 복종케 하는 믿음을 지녀라]

 

  예수님께 의지해서 그저 고난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저 거센 세상의 풍랑을 꾸짖고 바다를 잠잠케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놀라며 이들은 누구이기에 저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가는가? 이 사람들은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이렇게 바꾸는가?”라고 감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향린교회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만큼 중요한 또 하나의 사명은 우리 향린교회가 저 세상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설득하여 예수님의 제자로 삼을 수 있도록 우리가 실력을 쌓아 나갑시다. 실력을 키우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모험과 도전에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폭풍의 현장 속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배우는 데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과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사는 자리에 따라서 크기가 달라지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일본 가정에서 관상용으로 기르는 코이라는 잉어입니다. 작은 어항에서는 5~8cm, 큰 연못에서는 15~25cm,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오른 소설가 엔도 슈샤쿠는 이를 두고 큰 꿈을 가진 사람은 훗날 큰 사람이 되고, 작은 꿈을 품으면 작은 사람이 된다고 말합니다. 꿈의 넓이가 곧 사람의 넓이이자 미래의 넓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꿈의 크기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디에서 행복을 찾습니까? 현대인들은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 속 작은 행복을 찾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꿈은 이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훨씬 더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저 세상에 나아가 한 영혼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꾼다는 높은 이상이 있어야 합니다. 불평등을 고치고, 전쟁을 막고, 불의한 일에 대해서는 과감히 나서서 저항하는 굳세고 당당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코이라는 잉어처럼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족의 행복, 나만의 행복, 우리 교회만의 행복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서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 말고도 다른 배들이 함께 예수님의 배를 따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배들도 아마 폭풍과 파도의 위협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웠고 그래서 풍랑이 잠잠해졌습니다. 당연히 이 배들에 탄 사람도 평안을 되찾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활동과 우리의 행동, 우리의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큰 꿈을 꾸어야 합니다.

  더 큰 꿈, 즉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꿈꿀 때만 우리는 저 거센 풍랑도 이겨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거센 풍랑 속에서도 비바람 속에서도 편하게 고물을 베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이 굳건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제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향린 가족들 모두가, 풍랑 속에서도 고물을 베고 편히 잘 수 있던 예수님의 장성한 믿음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라고 물으실 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향린교인들 되시길 빌겠습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낯선 세계로 나아갑시다.

거센 물결을 헤치고, 깊은 곳으로 나아갑시다.

우리 안의 하나님 형상을 깨우고

 

잠든 예수를 깨워 더 깊은 신앙의 바다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