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 이끄시는 그리스도”
(창 6:11-13, 마 5:21-26, 엡 2:14-18)
허석헌 목사
[딜레마에 봉착한 통일]
평화통일 주일 아침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가 평화통일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사실 오늘 우리는 통일을 말하기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2023년 12월 북측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대한민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말뿐이 아니었습니다. 3대헌장기념탑 등 '조국통일' 관련 상징물들이 완전히 철거되었고, '민족대단결', '평화통일' 같은 용어가 모든 활자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올해 5월에는 공화국헌법을 개정하여, 북한 지역만을 자국 영토로 규정하는 조항을 신설하고 '조국통일' 조항 자체를 삭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며 마음이 착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통일을 향한 어떤 노력도 무력해 보이고, 우리는 영구분단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상실감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통일운동에 앞장서 온 우리 교단이 겪는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같이 살기 싫다는데 자꾸 합치자고 하면 그것도 스토킹 아니냐"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결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통일은 상호적인 것인데 북이 두 국가를 선언한 이상 우리만 일방적으로 통일을 외치는 것이 맞느냐, 중요한 문제입니다. 통일이 딜레마에 놓여 있는 겁니다. 통일은 여전히 필요한가, 해야하는가? 정치적 문제로 보면 아닌 것 같은데, 해도 되나, 안되면 이제 통일대신 뭘 말해야 하나? 우리가 안고 있는 딜레마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르다! 우리는 여전히 통일을 말해야 하고, 기도해야하고, 힘써야 한다!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서, 분단과 적대의 시대에 우리 교회가 여전히 통일을 말할 수 있는 신앙적 근거는 무엇인지 말씀 안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한국교회는 왜 반북대결의 온상지가 되었는가]
한국교회에서 '반공', '반북'은 이제 하나의 공통어가 되었습니다. 북한 선교는 단순한 포교활동을 넘어, 공산주의에 장악된 지하교회를 해방시키고 복음주의 교회를 재건하는 일과 동일시됩니다. (북한교회재건위원회, 한기총, 1995)심지어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복음 선교의 숭고한 사명처럼 여기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민족복음화를 외칠수록 비방과 중상, 적대심이 오히려 커져가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 한국교회가 그랬는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반대였어요. 그렇게 된 역사적 굴곡이 있었던 겁니다.
한국 개신교는 1910년대까지 주체적으로 신앙을 수용하고 성장시켜 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개신교가 알렌, 아펜젤러, 언더우드 같은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식 식민사관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식민사관은 역사의식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개신교는 외국 선교사들이 개항기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조선의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공동체를 세우며 성경을 한글로 번역(서상륜, 신약완역1882)해 온 자생적 역사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18세기 말, 이승훈 북경 예수회 신부에게 세례)
이 때가 19세기 말이에요. 무슨 일이 일어났나면, 반봉건·반외세를 외쳤던 동학농민운동이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우금치 전투로 좌절되었습니다. 이때 그 많은 동학교도들은 종교적·사상적 친연성을 가진 조선의 토착 개신교로 개종해서 기도처를 만들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정읍, 익산 등에 뿌리내린 백 년 넘은 기장교회들이 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한신정신의 고향이라고 하는 북간도 명동촌도 그런 역사를 갖고 있어요. 거기서 민족적 신앙교육 운동을 시작한 지도자들 가운데 김하규, 문병규 선생 같은 분들은 동학운동에 직접 가담했던 분들이기도 합니다. 이분들이 길러낸 주체적 신앙인, 민족지도자들이 한신과 기장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한국 개신교가 민족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타종교와 함께 자발적으로 뿌리내려 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1882~1919까지 약 35년은 조선의 기독교가 자생적으로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서왔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조선의 주체적 신앙운동의 계보가 근본주의 신학, 탈정치적 내세주의, 개인주의적 기복신앙으로 방향을 틀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 이후, 미국의 메이첸과 같은 프린스턴 신학자에게서 근본주의 신학의 세례를 받고 파송된 제2세대 선교사들입니다. 이들은 1세대 선교사들과 달랐습니다. 성경무오론과 축자영감론을 앞세워 한국교회의 민중 주체적 신앙전통에 균열을 내고, 근본주의 신학으로 강제 통합해 나갔습니다. 민중들의 해방운동을 하나님이 세운 종들에게 대항하는 불순종한 죄로 단죄하고 신앙의 비정치화를 주입시켰습니다. 그 결과 한국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회는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와 교권주의에 포로가 되었고, 교회는 민족의 얼을 잃었고 결국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하며 스스로 배교하는 역사적 과오까지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1940년 조선신학교건립과 1953년 기장교단 분립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역사는, 바로 그 잃어버린 주체적 신앙을 되찾으려던 눈물겨운 신앙 투쟁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주도한 정교분리 정책과 배타적 기독교 문화, 교리주의에 기반한 교권주의는 1930-40 동안 일제 치하에서 반공주의와 공생 관계를 이루었고, 분단 이후에는 반북대결주의와 결합하며 교회가 권력의 중심에서 부흥의 신화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근본주의 신앙이 상식처럼 통용되는 한국교회의 현실, 극우 기독교 논리가 아무런 역사의식과 신학적 거름망도 통과하지 않은 채 강단에서 복음으로 둔갑하는 현실은 교회가 진리의 보루가 아니라 세속 이데올로기의 아성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뼈아픈 징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무오론, 축자영감론, 배타적 문화론, 교권주의로 대표되는 이 근본주의 신학은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해악을 남겼을까요? 저는 그것이 분단의 현실, 적대하는 남북상황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핵심에 '죄'와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죄'란 무엇인가]
오늘 교회 대부분의 강단을 채우고 있는 죄와 구원에 관한 고백은, 불행하게도 ‘신앙적 상징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신화적/신앙적 상징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것이 마치 신앙의 순수함인 양 가르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지성이 마비된 채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교회의 자기 독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창세기와 마태복음, 에베소서 세 본문은 바로 이 문제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죄가 도대체 무어냐고 물을 때,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기록을 통해 설명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 하나님처럼 되려 한 교만, 인간의 자유의지의 만용, 이것이 죄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불순종으로 모든 인류가 원죄를 지니게 되었고,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스스로 이 단절을 회복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한 대속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우리는 배워 왔습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나려면, 첫째는 순종이고, 둘째는 악의 발원지인 이성과 자유의지를 억누르는 것, 셋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의 능력을 무조건 의심없이 믿는 신앙의 태도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개신교 설교는 지금까지 이 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죄의 교리가 한국교회를 망가트렸습니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이 전통적 죄론에는 세 가지 결정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죄의 대상을 누구로 놓느냐의 문제의식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반역이고, 불순종이라고 보는 것이 과연 성서가 말하는 죄의 본질인가 되묻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나요. 선지자를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거로 나타나죠. 그 말씀이 하시는 명령은 뭔가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여기에 다 있지요.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는 이 말씀이 너무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그렇게 보기 싫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교회에 대한 충성, 목사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가르친다는 거에요. 교회, 목사, 국가지도자에게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고 불순종이다! 이런 죄의식을 계속 심어주고 쇄뇌시켜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없도록 계속 묶어두는 하나의 권력담론으로 작동해 왔다는 겁니다. 죄를 수직적 관계로만 다루는 교리는 결국 신자를 통제하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창세기 6장 11절은 죄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여러 종족을 이루며 살아가던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찬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어 있었다"(새번역). 그런데 이 '무법천지'라는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다소 흐립니다.(현대인-죄, 개역한글-강포, 개역개정-포악함)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 단어는 그냥 "폭력" 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으로 충만하도록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죄로 물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심리적 교만이나 자유를 가진 부도덕한 인간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힘으로 누르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명백히 하나님 보시기에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만 나타난다? 폭력으로 나타난다! 폭력의 문제다!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폭력은 곧 하나님에 대한 폭력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밖에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숨결로 만드신 세상 속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반역으로 죄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피조세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의 구조를 떠나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을 굳이 분리시켜서, 하나님에 대한 죄가 따로 있고, 인간에 대한 죄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를 성역화 해서 다른 이득을 취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둘째로, 죄를 개인의 내면 문제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죄를 내면화한다는 것은, 사람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어 죄를 심리적 문제로 다루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5장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흔히 오해되어 온 본문입니다. 21절에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형제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말씀, 27절에, 간음도 마찬가지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사용합니다. 물론 이러한 내면의 성찰은 불의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죄를 내면의 문제로 보면 어떻게 될까요? 폭력이 발생하는 현실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책임을 등한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가해지는 실제 폭력에 대한 물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만 몰두하는 자기도취적 신앙이 자라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의 내면화 논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왜곡됩니다. 하나는 폭력 피해자의 정당한 분노를 오히려 부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입니다. "겉으로 죄를 안 지었을 뿐이지 우리 모두 속에는 죄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가 감히 가해자를 비난할 수 있는가"라는 논리입니다. 살인한 사람이나, 분노한 사람이나 똑같으니 살인한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는 괘변이 정당성을 얻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내면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니 "의도하지 않은 폭력"이라는 알리바이로 둔갑시키는 방식입니다. "가해자도 알고 보면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고, 상대가 피해를 입기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는 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의 내면화를 이용해서 피해자의 고통을 덮어버리고, 가해자를 두둔하는 논리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교회에서 죄를 대신해서 쓰는 '교만'이라는 용어가 대표적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교만’한 죄를 문제 삼을 때, 그것은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만은 국가 권력자들의 탐욕과 제국주의적 권력욕을 지적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주의 신학은 이 교만을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내적 태도로 일반화시켰습니다.
그 결과 사회·정치·경제적 불의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열망과 노력조차 모두 '교만'으로 치부되고 말았습니다. 불평등한 처우에 항의하며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정당한 울분과 요구, 부당한 법과 권력에 당한 고통에 대한 보상과 회복.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는 교만한 죄로 낙인찍혀 온 역사가 있습니다. 백인우월주의 노예제 시대에는 흑인들의 인종차별 폐지 요구가,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성평등 요구가, 산업화 시대의 천민자본주의 아래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바로 이 '교만의 죄'라는 낙인 앞에서 철저히 무시당해 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1절에 살인을 분노와 연결하고 27절에서 간음을 정욕과 동일하다 하실 때, 그건 단순히 "내면의 죄"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분노와 동일하다 하신 것은, 숨겨진 마음의 악함에 솔직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의 폭력이 비록 작을 지라도 형제와 자매를 향한 분노의 언어와 사소한 폭력적 행동이라도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간음에 대한 말씀도 마찬가지지요. 음욕이라는 내면적 상태를 문제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성적 소유의 대상으로 격하시키는 작은 폭력적 태도조차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일상에서 사소하게 일어나는 폭력에는 눈감고, 큰 폭력의 죄만을 문제 삼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깨우침의 말씀입니다.
셋째, 죄의 보편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다는 죄의 보편성은 원죄론이라는 교리로 수용되어 왔습니다. 원죄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해방적인 방식으로도 사용되기도 했고, 파괴적인 방식으로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원죄가 해방의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건 이런 것입니다. 죄인과 의인 모두가 같은 '범죄'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의 법과 질서 밖에 있는 사람이라 하여 죄인으로 낙인찍고 정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죄의 보편성/원죄를 해방을 위한 방식으로 사용한 예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의 보편성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로막고 불의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논리로 악용되어 왔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3:23에서 말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선언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때, 원죄는 절대 씻을 수 없는 죄이고, 따라서 정의를 향한 열망과 그 노력은 헛된 것이고 심지어 불경스러운 것으로 매도하는 근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씻을 수 없는 원죄, 이 원죄의 보편성은 교회 권력의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수백 년간 고해성사를 통해 신자를 사제에게 영구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어 온 것이 그런 예입니다. 이렇게 원죄의 보편성과 변경불가능성은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교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결과 무기력한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남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인류역사를 억압 속에 가두는 논리가 되었습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매달려 피흘리신 순종과 희생을 길을 미화시킵니다. 우리도 그렇게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희생양의 흘리신 피를 믿고’ 같이 따라 순종하는 것에 신비한 구원의 길이 있는 것처럼 길들입니다.
교회 전통은 순교자의 죽음을 진정한 신앙인이 보일 수 있는 최상의 미덕으로 풀어 왔습니다. 식민지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해 노예들이 무고한 죽임을 당할 때, “왜?”라는 물음을 갖기보다, 교회는 희생과 고통을 신성화하고, 그들을 우주적 드라마 속의 승리자로 추앙해 왔습니다. 노예들 스스로가 이 고통을 희생양의 신앙으로 내면화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죄를 내면화하고, 예수의 십자가 피를 신성시 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는 죄값을 치러야할 제국주의자, 식민통치자들이 양심의 가책없이 차지한 풍족한 자본과 노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그분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있는 것은, 그 분의 피가 우리 피보다 더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는 인류라는 종족이 탄생하면서부터 켜켜이 쌓아온 폭력과 죽임의 문명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그 죄의 구조 속에서 벌어진 죽임의 사건이었습니다. 특별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성시 해온 시오니즘이라는 유대주의와 로마 제국주의가 공모하고 결탁된 “폭력이 가득 찬” 이스라엘 땅에서, 누구나 죽어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 없는 그 때에, 예수라는 한 사람이 ‘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네 형제자매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 사람을 원수지게하고, 담을 쌓게 하는 이 폭력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누구도 죄의 편에 서게 되거나 죄로 인해 희생당할 수밖에 없다는 이 진실, 그 폭력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에 예수 자신이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결단 하였을 때, 두려움을 느낀 권력자들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 사건은, 그 죽임의 비극 속에 하나님이 친히 참여하시고 세상의 고통을 함께 느끼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드러내는 두려운 진실은 다름 아닌 이것입니다.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이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잔혹함과 폭력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하나님마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는 비극성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도 피흘리시고 그 곳에서 하나님도 함께 고통당하신 십자가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가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면, 부활은 그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자, 폭력을 넘어서는 신적 혁명의 표현입니다.
[폭력의 구조를 바꾸는 신앙]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폭력적 구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그러하셨듯이 지금도 폭력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문제삼아야 합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해야 하고, 몸부림 쳐야 합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통일, 말하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논리로 하자면 더 어렵고, 정치로 하자면 길이 안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폭력으로 쌓은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셨기 때문입니다.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십니다. 교회는 정세를 판단하고 정치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죄의 담장을 허물고, 원수 만드는 폭력의 질서를 없애시러 오신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통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폭력의 실상을 짊어지고, 깨뜨리는 부활의 길을 가는 꺾일 수 없는 우리의 신앙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폭력의 구조를 바꾸는 신앙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평화통일 주일을 지키며 고백해야 할 신앙입니다.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십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평화를 이루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정치의 문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평화와 통일을 외치십시오.
폭력이 난무하는 죄의 세상에
갈라져 있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신
평화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십시오.
온갖 폭력에 저항하여 흘린 그리스도의 피를 증언하며
세상에 주님의 평화를 외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