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8. 10.
철학과 인문학 공부의 낭패는 일종의 ‘내향적 정교화(involution)’(C. Geertz)에 있다. 이를 잘라 말하면 임상(臨床)의 프락시스가 없는 공부, 혹은 심지어 그 임상성(practicality)을 체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이론적-내향적 정교화를 기하는 짓에 있다. 내가 30년 전부터 지적해온 이른바 ‘논문 중심주의’나 ‘원전 중심주의’가 다 이런 못된 습벽의 일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의 인문학부가 몰락하는 작금의 형편을 외인(外因)으로 변명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대학의 학습은 대체로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없는 현란한 고층의 색종이 건물’과 같았다. ‘모든 공부는 곧 사람의 일’이라는 전제에서 생기는 수행성(遂行性)을 놓치는 순간, 필경 그 공부는 휘발한다. 역시 지행이 아니라 행지(行知)인 것이다.
김영민 지음,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늘봄, 2022. 09. 10.),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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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없는 앎,
행함이 없는 믿음,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모두 허깨비이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몸으로 깨닫는 것이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들여 겪어야만 된다.
모든 공부가 결국 사람의 일이라면
공부하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유한성을 깊이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일상에 녹여내는 자기만의 프락시스를 지녀야 한다.
- 향린 목회 645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