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생존을 넘어 생명으로
본문: 창세기 47:13-20
[들어가며]
설교에 앞서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평등한 분이십니까?"
어떻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시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 하셨고(롬 2:11),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공평하고 정의롭다 선언합니다(시 33:5; 렘 9:24 등). 그런데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평등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이 질문을 답하기 곤란하시다면 제가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공평하고 평등합니까?"
만약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하신다면, 혹시 여러분은 세상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마저 평등하지 않다고 느끼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성경 속 하나님은 분명히 공평하고 평등하신 분으로 묘사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평등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다르고, 지능과 자질이 다르며, 부와 환경에 있어서도 출발선이 다릅니다. 당연히 불평등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하고 평등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평등을 이 땅에 어떻게 구현하기를 원하실까요?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고 가꾸어 나가는 방식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을 통해 이루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탐욕과 이기심으로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늘 두 가지 세계관이 충돌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움직이는 '하나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수탈과 독점의 '피라미드 제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 두 길 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평등을 외치기에 오늘날 현실의 장벽은 너무나 높습니다. 그 대표적인 현장이 바로 '기후위기'입니다. 기후위기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점에서는 평등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자가 가진 자원과 환경에 따라 다가오는 위협의 무게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지만, 누군가는 뙤약볕 아래 논밭에서 폭염과 싸웁니다.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배달 라이더와 택배 기사님들은 이 무더위 속에서 도로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본론 1: 기후위기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살려낸 요셉의 토지 정책 이야기]
그렇다면 기후 재난이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 성경은 어떤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7장의 요셉 이야기가 바로 그 질문에 답을 주는 본문입니다. 사실 요셉 이야기는 묵상할수록 조심스럽고 어려운 본문입니다. 요셉은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는 성경 인물이지만, 본문을 냉정하게 읽어보면 그가 마치 이집트 주변국과 백성들의 재산과 토지, 심지어 노동력까지 몰수하여 파라오의 제국을 완성시킨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제국주의를 완성하는 데 일조한 관료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이집트 백성을 구원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오늘 저는 이 본문을 당시 가장 밑바닥에 있던 '최하층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7년의 대기근이 닥쳤을 때, 백성들은 가축을 팔고, 땅을 팔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었습니다.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자산을 빼앗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없던 최하층민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요? 7년의 기근을 지나며 모두의 신분이 평등해졌고, 무엇보다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요셉이 펼친 토지 정책을 보십시오. 요셉은 백성들에게 씨앗을 주고 농사를 짓게 한 뒤, 소출의 5분의 1(20%)을 세금으로 내게 했습니다(창 47:24-26). 오늘날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이것이 부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 소출의 30~50%를 수탈해 갔습니다. 가장 최근의 일만 생각해봐도, 해방 직후 1945년 10월 16일 북한의 좌익과 우익의 연합정치체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가 북한 농민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발표했던 토지개혁 제도가 3.7제 개혁이었습니다. 지주들은 3을 가지고, 소작농민들은 7을 갖게 하는 제도였지요. 그런데 무려 4,000년 전에 소출의 20%만 세금으로 매기고 나머지 80%를 농민의 생계로 보장해 준 것은 당대 기준으로 엄청나게 파격적이고 온건한 생존 안전망이었습니다.
또한, 만약 요셉이 양식 공급을 시장 자율에 맡겼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대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들이 곡식을 독점하고 폭리를 취해, 가난한 이들은 헐값에 땅을 빼앗기고 대량으로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반면 요셉은 국가가 중앙에서 자원을 통제함으로써 시장의 폭주를 막고 모두의 생명권과 경작권을 보장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Jubilee) 제도'와 상당 부분이 맞물립니다. 희년은 토지 독점을 막고 가난한 자들의 생계와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제도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7년의 대재앙 속에서 단 한 사람도 굶어 죽지 않게 만드는 '공공의 생명 안전망'을 구축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너의 자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요셉을 통해 실현된 순간이었습니다.
[본론 2: 말씀의 적용 세 가지]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저는 여러분께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이 말이 너무 틀에 박힌 소리처럼 들려서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요, 하나님의 공동체이지 않습니까? 성경 시대 사람들은 가뭄이나 기근 같은 기후 재앙을 '신이 내리는 벌'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을 통해 인류의 잘못과 탐욕으로 지구 온도가 올라갔고, 그 결과 기후위기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인류세(Anthropocene)'의 위기를 정확히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가올 미래가 정확히 어떻게 펼쳐질지 모른다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상력과 지혜, 어떠한 구원의 방법으로 우리를 이 위기에서 건져내실지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단순히 현실을 피하기 위한 포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이 기후위기 시대에 보여주실 새로운 구원의 길과 지혜를 기대하며 무릎을 꿇는 거룩한 응답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께 권면하고 싶은 것은,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부의 정책과 관리의 눈으로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비록 창세기의 사건이 파라오라는 절대 권력자 아래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시각을 바꾸어 이를 국가의 행정 체계, 즉 '사회적 안전망과 시스템'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요셉이 구축한 이 국가적 시스템 덕분에, 온 나라를 뒤흔든 극심한 대기근 속에서도 백성들이 유랑하거나 무너지지 않고 상당히 안정적으로 재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기후위기를 개인의 노력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적 시스템과 제도'를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인 이 기도회 장소 바로 옆에는 동자동 쪽방촌이 있습니다. 한 사람당 1평에서 1.5평 남짓한 공간에서 살아가며 20~30만 원의 월세를 냅니다. 반면 같은 서울 저 잠실의 랜드마크인 롯데타워는 월세가 수천만 원에 달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평등한 존재인데, 삶의 자리는 너무나 불평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와 사회의 시스템이 약자들의 생존권을 어떻게 보장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고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차원의 실천과 반성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전력을 노동력으로 환산해 봅시다. 4인 가구가 집에서 사용하는 평균 전력(약 3"kW" )을 마력으로 환산하면 4마력이고, 1마력은 5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힘이라고 계산할 경우, 우리는 매일 20명의 노동자가 옆에서 땀 흘려 발전기를 돌리는 힘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직장과 대중교통 등 사회 전체에서 소비하는 에너지를 합치면, 대한민국 시민은 매일 약 100명의 '에너지 노예'를 부리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편안하게 에어컨을 쐬고 전기를 쓸 때, 배출된 탄소로 인한 기후 재난의 피해는 정작 전기를 마음껏 쓰지 못한 개발도상국 주민들과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에게 전가됩니다. 이것이 기후 불평등의 비극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차피 기후 재앙으로 인류는 멸망할 테니 그냥 살던 대로 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평생 노력해도 예수님을 완전하게 닮을 수 없다고 해서 예수 닮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어제보다 오늘 더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듯, 기후위기 앞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들을 찾아내고 행동해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평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몫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의 몫입니다. 요셉이 7년의 기근 속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며 아무도 죽지 않게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도 공공의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이 거대한 기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지혜와 구원의 길을 보여주실지 기대하며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또 공공 정책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이 보장되고, 희년의 정신처럼 공평한 분배와 기후 정의가 실현되도록 정치와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일상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무분별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약자의 곁에 서서 작은 희년의 동심원을 함께 그려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이 정의와 생명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