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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웃음 ㅣ 2026-07-26 ㅣ 정승우

by 이민하 posted Jul 31, 2026 Views 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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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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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웃음

(17:22, 4:4, 7:31-35)

 

정승우 목사

 

  주일 설교를 아주 길게 하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분이 5분만에 설교를 끝냈습니다. 의아한 교인들이 목사에게 물었겠죠. “아니 목사님 웬일로 이번 주일에는 이렇게 빨리 끝내셨는지요?” 목사 왈, “토요일 저녁에 설교문을 다 작성하고 일찍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키우던 강아지가 제 설교문을 다 물어 뜯어 버렸더군요.” 예배가 끝난 후, 장로님들이 급하게 모임을 갖고, 목사에게 강아지 몇 마리를 더 사드리기로 결정했답니다. 그런데 다음 주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옆 동네 교회를 다니시는 장로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아니 장로님 저희 교회에는 웬일이십니까?”하고 묻자. 그 장로 왈, “목사님! 설교문 물어 뜯은 강아지 좀 빌려 주시면 안될까요?” 안타깝지만, 저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왜 웃을까요? 웃음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웃음은 “굳어진 것을 깨뜨리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즉 웃음은 권위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엄숙하고 진지한 사람이 바나나 껍질을 밟는 순간 권위는 사라집니다. 찰리 채플린이 주연과 감독을 맡은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히틀러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엄숙한 연설은 횡설수설로 들리게 만들었고, 위엄 있는 몸짓은 우스꽝스러운 몸 개그가 됩니다. 그리고 독일군의 퍼레이드는 희극적인 안무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웃음은 독재자의 신비와 공포를 벗겨내 버립니다. 찰리 채플린은 총으로 독재자를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웃음으로 독재자의 권위를 해체하였습니다. 예수도 로마제국과 종교 권력을 칼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과장과 풍자,그리고 역설을 통해 그들의 위선을 드러냈습니다. 해서 저는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parables)야말로 세상을 뒤집는 해학과 풍자가 담긴 “큰 웃음”이라는 사실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예수께서 웃으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에 관한 다양한 서양 그림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 진지하거나, 매우 엄숙한 표정일 것입니다. 가령, 프라 안젤리코, 그루네발터와 렘브란트의 그림들은 대개가 진지하고 고통스러운 예수의 모습들 그리고 있습니다. 웃는 예수의 모습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가 항상 진지하고 엄숙한 모습만을 보였을까요? 복음서를 한번 살펴 볼까요?

 

  예수께서 우셨다는 기록은 복음서에 여러번 등장 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는 우셨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예수께서 웃으셨다”라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 미술 속에 등장하는 예수는 언제나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화가, 랄프 코작(Ralph Kozak)은 전혀 다른 예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의 작품 속 예수는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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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웃어도 되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예수께 서슴없이 다가왔습니다. 아이들은 진지하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사람에게는 다가가지 않습니다. 어린이뿐만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농부들이, 세리들이 예수의 곁에 모였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언제나 예수를 서포트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는 늘 사람들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유머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예수의 눈가에는 분명 웃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미소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미소였을 것입니다. 예수는 재미있는 분이었을겁니다. 그의 가르침에는 재치와 유머가 있었습니다. 해서 그는 잔치에 자주 초대 받았고, 늘 사람들과 어울렸습니다. 오죽했으면,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를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저는 먹보요, 술꾼이고, 잔치 자리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자로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예수를 너무 근엄하고 진지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는 정말 재미있는 분입니다. 특히 제자들에게 별명(닉네임)을 붙이는 솜씨가 놀랍습니다. 시몬 베드로에게는 게바 즉, 바위라는 닉네임(nickname)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반석과 같은 믿음을 지닌 베드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는 정말 바위 같은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걸핏하면 흔들립니다. 물 위를 걷다가 빠집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합니다. 겟세마네에서는 칼을 들고 저항합니다. 어쩌면 이런 베드로의 성정을 미리 간파하고 “게바(돌 대가리?)”라고 지은 것은 아닐까요? 야고보와 요한의 닉네임도 재미있습니다. 예수는 이들에게, 보아너게(Boanerges)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이십니다. 요즘 말로 성질있는 “빅 마우스”라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자, 이들은 성질이 나서 “확 불질러 버릴까요?”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혈질입니까? 예수는 그들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래, 너희는 우뢰다”하고 별명을 붙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는 제자들의 흠결을 유머러스하게 닉네임으로 풍자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장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웃기기 위해 웃기지 않으셨습니다. 웃음으로 진실을 드러내셨습니다. 일종의 ‘골계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骨稽美(comic aesthetic)란 익살과 재치를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한 유머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골계미는 웃게 만드는 동시에 청중들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골계미는 과장과 풍자, 아이러니, 그리고 역설과 전복을 통해 인간의 탐욕과 위선, 자기기만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비판합니다. 우리의 탈춤이나 판소리가 골계미를 잘 드러내는 장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의 말씀 중에, “형제의 눈 속 티는 보면서, 자기 눈 속 들보는 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입니다. 눈에 들보가 들어간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운 모습입니까? 예수는 일부러 과장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웃습니다. 그러나 웃다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정한 벌레를 걸러내려고 포도주를 천으로 거르곤 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 이 얼마나 촌철살인이 넘치는 해학과 풍자입니까? 당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사소한 규칙에는 목숨을 걸면서, 정의와 사랑은 잃어버렸습니다. 이웃의 작은 잘못에는 개거품을 물면서, 정작 자신들의 큰 잘못은 무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유머는 사람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선을 드러내기 위한 해학이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유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겨자씨 비유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왜 예수는 멋진 레바논의 백향목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지 않고, 보잘 것 없는 작은 겨자씨에 비유했을까요? 백향목은 고대시절부터 지금까지 가장 고급스러운 목자재입니다. 백향목은 곧고 길게 자랍니다. 그리고 벌레와 부패에 강하고 향기가 좋고, 튼튼합니다. 그래서 왕궁과 신전을 짓는데 최상의 목재로 간주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설할 때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뱃길로 운반했습니다. <시편 92편 12절>은 의인을 백향목에 비유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자라리로다.” 지금도 레바논의 국기에는 백향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사람들은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겨자씨라니? 그러나 이것이 예수의 유머입니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나무가 됩니다. 가장 약한 것과 보잘 것 없는 것이 생명을 품어 줍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패배처럼 보이는 것이, 승리가 됩니다. 죽음처럼 보이는 것이 생명이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한마디로 역설과 아이러니로 가득찬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신학자, 엘턴 트루블러드는 『The Humor of Christ』(1964)에서 예수의 유머를 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많이 웃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사람을 희화화하는 웃음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웃음이었습니다. 예수의 웃음은 언제나 권력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의 비유 속에 담겨있는 풍자와 해학은 언제나 권력을 향했습니다. 웃음에는 두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비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자의 웃음은 전파력이 없고, 자기 파괴적입니다. 또 하나의 웃음은 약자가 권력을 향해 던지는 웃음입니다. 웃음과 해학은 강자에게 저항할 수 있는 민중의 가장 강력한 정서적 무기입니다. 민중의 조롱을 받는 권력자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예수의 웃음은 언제나 두 번째였습니다. 예수는 권력자들을 향해서는 매우 신랄했습니다. 그는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 같은 놈”이라고 불렀고, 종교 지도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겉은 새하얗지만 속은 시체가 썩고 있는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놈들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정치인들 중에는 회칠한 무덤같은 자들이 너무 많아 보입니다. 예수는 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풍자와 해학으로 권위를 해체하셨습니다.

 

  중세 유럽에는 아주 독특한 축제가 있었습니다. “바보제(Feast of Fools)”입니다. 이날만큼은, 주교 대신 어린 사제가 주교가 되고, 하인이 주인이 되고, 광대가 왕을 흉내 냅니다. 이러한 모습에 군중들은 웃었습니다. 왜 웃었을까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나마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이를 ‘카니발’이라고 불렀습니다. 카니발에서는 위와 아래가 뒤바뀝니다. 세상의 질서가 역전됩니다.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렇습니다.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첫째 된다.” 세상에서는 왕이나 대통령이 가장 높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가 가장 큽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것이 진실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하나님의 거대한 카니발에 관한 소식입니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작품 중에 『농담』(1967)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는 “왜 권력이 농담과 유머를 두려워하는가”라는 주제를, 이 작품에서 다룹니다. 주인공, 루드비크 얀은 대학생이자 촉망받는 공산당원이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여자 친구에게 엽서를 보내는데,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써 보냅니다. “낙관주의는 인민의 아편이다. 건강한 분위기는 어리석음의 냄새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이 엽서를 검열한 당국은 결국 그를 공산당에서 제명하고, 대학에서 퇴학시키며, 탄광으로 강제 노동을 보냅니다. 한번의 농담이 평생의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 소설의 핵심 메시지 중에 하나가, “전체주의는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아이러니를 싫어하고, 중의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웃음을 위험하게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웃음은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쿤데라는 이 작품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유머를 잃은 사회는 얼마나 위험한가?”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권력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전체주의는 농담을 두려워합니다. 독재자는 웃음을 싫어합니다. 풍자를 싫어합니다. 독재자는 사람들이 웃기 시작하면 자신의 권위가 흔들린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세상의 절대 권력을 해체합니다. 기독교의 복음(good news)은 돈과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상대화 합니다. 로마 황제가 주님(kyrios)이 아닙니다. 돈이 주님이 아닙니다. 권력이 주님이 아닙니다. 권력자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나사렛의 젊은 목수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게 가장 위험한 공동체였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고 웃었습니다. “남은 구원했으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들은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패배처럼 보이는 사건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실패라고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 되고,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높아지는 이 역전이 복음의 요체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결코 가벼운 농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오만과 권력을 뒤집는 하나님의 거룩한 역설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는 세상을 뒤집는 “하나님의 웃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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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영국의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선(Monty Python)은 Life of Brian이라는 풍자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예수를 조롱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영화의 중심은 예수가 아니라, 맹목적인 군중과 종교적 광신, 권력의 우스꽝스러움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유명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 (인생의 밝은 면을 바라보라)”. 처음 들으면 불경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던지는 질문은 생각보다 깊습니다.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도 웃을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이 노래는 영국 축구 경기장에서,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여러 구단의 응원가로도 불립니다. 원정 팀에게 패배하면 맨체스터 Ut의 경기장, 올드 트레퍼드에는 “Always Look on the Bright Side of Life”라는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왜입니까? 웃음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는 마지막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웃음은 세속적인 낙관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의 웃음은 “괜찮아” 라고 말하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질 만큼 기도하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기독교는 고통을 희화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을 끝까지 직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생명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역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제 끝났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도 골치아픈 사건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 제국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무덤 입구는 돌로 막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돌을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새 역사의 첫 문장”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했던 인간의 계산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을 뒤집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기뻐하며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는 잔치를 벌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절망은 기쁨과 환희로 뒤바뀌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사람의 얼굴을 바꿉니다. 값진 믿음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를 미소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찬송했고,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현실을 외면한 낙관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진정한 웃음을 우리에게 되찾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예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너무 무거운 얼굴로만 기억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는 어린이와 여성들을 친구로 삼으셨고, 제자들에게 별명을 붙여 주셨고, 과장된 비유로 사람들을 웃게 하셨으며, 권력을 통렬하게 풍자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절망을 부활의 기쁨으로 뒤집으셨습니다. 예수의 웃음은, 남을 비웃는 웃음이 아닙니다. 죄인을 품는 웃음입니다. 교만을 무너뜨리는 웃음입니다. 권력을 상대화하는 웃음입니다. 절망을 이기는 웃음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웃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누가복음 6:21절의 말씀이 더욱 새롭게 들립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이 웃음은 단순히 많이 웃고 즐겁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결국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비웃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다시 웃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친애하는 향린 공동체 여러분! 가정에서 먼저 웃음을 회복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따뜻한 미소를 회복하십시오. 상처 입은 이웃들을 품는 여유를 회복하십시오. 세상의 불의와 투쟁할 때도 미소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처입은 이웃들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얼굴에 따뜻한 연대의 웃음을 잃지 맙시다. 그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눈물이 닦이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웃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시계를 보니, 저도 이제 강아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교우들의 깊은 해량을 기대합니다.

 

그럼, 이제 주님의 웃는 얼굴을 생각하며, 함께 묵상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었던

나사렛 청년의 웃음을 기억하십시오.

그 미소로, 그 웃음으로,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들과 함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