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 27.
이제 분명해졌기를 바라지만, 우리가 터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 중 하나인 촉지성(tactility)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된다. 우리는 터치에 대해 더 포괄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세상 속에서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방식, 그리고 피부가 터치하고 터치될 때처럼 열려 있고 취약한 것들에 대한 실존적 접근 방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내 주장의 핵심 중 하나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터치는 단지 터치에만 국한되지 않고, 잠재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터치는 촉지성뿐 아니라 시각, 청각 등에도 존재한다. 정확히 말해, 촉감은 모든 감각을 가로지르며, 우리에게 근본적인 육체적 지능, 즉 안목, 육감, 통찰력, 그리고 공명을 제공한다. “터치를 가진” 사람은 여러 섬세한 감각을 동시에 결합한 사람이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민감한 감수성은 공감각적(syn-esthetic)으로, 오감 사이에서 다각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터치는 모든 감각에 내재되어 있다. 왜냐하면 터치의 “이중 감각,” 즉 만지고 동시에 만져지는 감각이야말로 이 모든 감각을 상호적인 경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특정 감각을 고립시켜 그 감각을 다각적으로가 아니라 더욱 일방적으로 만들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시각, 청학, 후각, 미각은 일단 촉감과 분리되면 협소하게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보지만 보이지 않고, 듣지만 들리지 않으며, 냄새를 맡지만 냄새가 나지 않고, 맛보지만 그 맛을 느끼지 않도록 우리의 지각 환경을 조정하는 것이 가능은 하다. 하지만 (우리의 자연스러운 인간의 상호성을 부정하는 “비자연적”인 무관심이나 폭력 행위를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만지지 않고는 결코 만져질 수 없다. 건강한 삶에서 감각의 상호성은 보편적인 촉감의 편재성을 전제로 한다. 터치의 횡단성이 없으면 감각은 선정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즉, 감수성이 없는 감각, 공감 없는 지각, 책임 없는 자극이 된다.
모든 감각을 아우르는 섬세한 지각에는 지각하는 그리고 지각되는 사람 사이의 적절한 상호 관계가 일어난다. 이 섬세한 지각의 유무가 미각, 시각, 후각, 청각이 좋은지 나쁜지를 구별해 준다.
리차드 카니 지음/김연민·김은혜 옮김, <터치, 생명의 감각을 회복하다>(한국문화사, 2025. 2. 21. 1판 1쇄 발행),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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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험이 사이버 공간을 통해 매개됨에 따라,
우리가 본래 지닌 직접 감각의 세밀함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모든 존재와의 상호 터치를 통해 세상의 두께를 익혀가는 그 감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감각의 소실은 남아 있는 감각마저도
감수성 없고 공감 없고 책임지지 않는 것들로 떨어지게 한다.
적절하고 건강한 상호성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신체적, 정신적 행복의 필수인 촉각을 통한 소통을 되살리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경험의 멸종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이때,
더욱더 진짜 경험을 향한 도전이 필요할 것이다.
- 향린 목회 631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