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씨를 뿌리지

by phobbi posted Jul 15, 2026 Views 8 Replies 0
Extra Form
날짜 2026-07-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6. 07. 15.

 

아침 식사가 끝나고 얼마 후에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부는 날더러 소를 끌라고 한다.

 

조부와 머슴과 나는 소를 몰고 뒷산 밭으로 갔다. 머슴은 소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갈기 시작한다. 조부는 밭 가장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말없이 담뱃대를 빨고 있다. 나는 이럴 때만큼 조부가 바보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밭 갈아 봐도 소용이 없지 않아요. 농사 지어봤자 또 가져갈 건데 뭐.” 조부는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말했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잠시 한숨을 쉰 후에 조부는 산골짜기를 보랏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여기저기의 진달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어른이 되어도 모를 거다. 아니 모르는 게 나아. 봄이 되면 가랑비가 온다. 그러면 농군들은 말이다. 들이나 산의 밭을 갈아서 어김없이 씨를 뿌리지.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거지.” 국민학교 2학년인 나는 무슨 뜻인지 통 알 수가 없어 조부가 더 상세하게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뿐 조부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영원히 조부한테서 그 뜻을 듣지 못하고 말았다.

 

이우환 지음/서인태 옮김,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 1994. 9. 27. 12쇄 펴낸날), 29-30.

 

===================================

 

해방 직전, 일제시대 이야기다.

저자의 아버지는 독립 운동을 했고,

한국인 순사가 매번 찾아와 깽판을 놓으며 아버지를 내놓으라며

집에 있는 가재도구들을 망가트리고, 곡식을 빼앗아 가던 시절이다.

농사지어 다 털리고 말던 그 시절,

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에게 농사지어 무슨 소용이냐고 투덜댄 것이다.

 

다 털려도, 내가 지은 것 남이 먹어도,

기후가 좋지 않고, 날씨가 맞지 않아도,

농군은 언제나 씨를 뿌린다.

그렇지. 봄이 되면 농군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거지.

 

- 향린 목회 61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