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능력

by phobbi posted Jul 12, 2026 Views 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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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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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07. 12.

 

능력은 한가지가 아니며 그 사람의 전부도 아니다. 그런데 사람을 특정한 평가기준으로 단정지어 판단해버리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 첫 차별의 경험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편애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교사에게 신뢰를 받고, 잘못을 해도 쉽게 용서를 받거나 적어도 조롱과 모욕을 당하지 않으며, 이름을 기억해주며 관심받는 걸 보았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겨울에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 따로 모아 따뜻한 난로를 켜주기도 했다.

 

이런 편애가 아예 제도화되기도 한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에는 고등학교의 우열반 편성이 성적이 낮은 학생들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이라는 진정이 접수되었다. 학교는 성적에 따라 ‘평반’과 ‘특반’으로 나누어 학급을 편성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2학년과 3학년의 각각 7개 학급을 평판 4학급, 특반 3학급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전년도 성적에 따라 문과 1-60등과 이과 1-30등은 특반에 배정하고, 나머지는 평반에 배정했다. 

 

학교 측에서는 이 제도를 ‘수준별 학급 편성’이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추어 수업을 하는 것이 수요자 중심의 이상적인 교육과정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을 획일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별 요구에 맞춘다면 어쩌면 좋은 방식일 수도 있겠다. 만일 학교 측의 주장이 맞다면 우열반 편성은 평반 학생과 특반 학생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교육이어야 한다. 정말 그랬을까? 

 

국가인권위원회는 평반과 특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특반 학생의 88.9퍼센트가 특반 편성에 만족하는 반면, 평반 학생의 78.5퍼센트가 평반 편성에 불만족했다. 물론 모든 특반 학생이 만족하고, 모든 평반 학생이 불만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로 이 우열반 제도가 특반 학생에게 유리하다는 점도 분명했다. 우열반 제도는 모두에게 이로운 제도가 아니었다. 

 

우열반 제도는 수요자 중심의 교육도 아니었다. 교사들은 평반 학생들에게 관심이 적었다. 특반과 비교하며 평반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들이니 ‘그냥 놔둬도 된다’고 말했다. 학교는 입시 지도 경력이 많은 교사들을 특반에 우선 배정했다. 특반만 누리는 혜택들도 있었다. 학교는 특반에만 프린트물을 나눠주거나 보충수업의 기회를 주었다. 평반은 위축되고 소괴감을 느끼며 공부를 포기한 분위기인 반면, 특반은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에 전념하는 분위기였다. 

 

성적이 다르니 다르게 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는 오해가 있다.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명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대하면 불평등이 생긴다는 의미로서는 타당하다. 청각장애인에게 영어듣기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불평등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평가기준으로 순위를 갈라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하여 한편에는 존중과 지원을, 다른 편에는 무시와 박탈을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보상이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 승자가 모든 기회와 존경을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모멸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김지혜 지음,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25. 9. 11. 초판 82쇄 발행), 1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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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성과 획일성에 머무르는 사회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이래서 중요하다. 

 

하나의 특징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사회가 아니라 

저마다의 장점을 존중하고 약점들을 보완하도록 돕는 사회여야 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진리를 주장하면서 그것을 힘으로 관철하려 할 때,

그것은 곧 폭력이 된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진리는 언제나 일리의 모습으로 등장할 뿐이다. 

 

일리들 가운데, 

상황과 맥락에 가장 적실한 하나의 일리가 많은 공감을 얻어 선택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영원한 진리일 수는 없다. 

어쩌면 땅의 세계에서 진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었을 수 있다. 

아니면 공중에 붕 떠서 땅에는 뿌리내리기 어려운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신학과 신앙도 하늘만 쳐다보아선 안된다. 

땅에서 열매를 맺도록 훨씬 구체적이고 다양해야 할 것이다. 

 

- 향린 목회 616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