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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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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남겨울수련회 "카이로스와 희남" ㅣ 정승우 ㅣ 2026-02-08

by 김지목 posted Feb 22, 2026 Views 145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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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2-08

* 2026년 희남 겨울수련회 

.하늘뜻펴기: 정승우 목사 

.제목: “카이로스와 희남”

(고전 7:29-31절,)

 

  저의 애청곡 중에 하나가 냇킹콜이 부른, Time and River라는 노래입니다… 흐르는 시간과 강물이, 잃어버린 옛사랑을 가져다 준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가끔 마음이 답답할 경우 자전거를 타고 한강 하류에 나가,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곤 합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상념과 번뇌가 저와같이 흘러 내리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붉게지는 노을 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은, 지난 날의 삶을 회상하고 반추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배경됩니다. 이제는 뜨는 태양보다 지는 석양에 더 마음이 가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60을 이순, 칠십을 고희라고 합니다. 남의 비판을 들어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뜻의 이순은, 아집을 버리고 경청할 수 있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리고 고희란 오래 살아온 삶 자체가 존중의 대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칠십 고희란 성과의 나이이기 보다는, 증언과 지혜의 나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옛 사람들은 노년의 덕목으로 너그러움과 성숙한 연륜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덕목들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좁아지고 작은 일에도 서운함과 노여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욥기 32장 9절은 “사람이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 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삶의 연륜과 성숙은 시간이 흐르는다고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필요한 생각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풍부한 단어들을  남겨 놓았습니다. 크로노스, 카이로스와 호라입니다. 크로노스(Chronos)는 연대기적 시간을 의미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나이가 더해지는 시간, 젊음에서 노년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탄생에서 죽음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크로노스를 자식을 잡아 먹는 거인으로 상상했습니다... 고야의 그림!이는 시간의 폭력성을 상징합니다. 크로노스는 우리를 죽음이라는 영원한 암흑으로 집어 삼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속에서 노년은 종종 남은 시간, 줄어드는 시간, 기다림의 시간으로 이해됩니다. “이제는 내려놓을 때다”, “이제는 뒤로 물러설 때다”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크로노스가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을, 우리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의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행동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실존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을 뜻한다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을 의미합니다... 미워하는 인간과의 1시간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1시간은 1초처럼 느껴집니다. 시간의 상대성이죠. 

  신약성서는 크로노스보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자주 언급합니다. 가령,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고(카이로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 여기서 말하는 ‘때’가 바로 이 카이로스입니다.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밀도 있게 개입하는 시간, 의미가 응축된 시간, 결단과 전환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노년의 시간을 크로노스로 보낼 것인가. 카이로스로 보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즉, 우리의 남겨진 시간은 크로노스의 끝인가, 아니면 카이로스의 문턱인가? 답변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노년은 결코 하나님의 시간에서 밀려난 영역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노년은 카이로스가 가장 깊어지는 시간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노년은 끝이 아니라 성숙을 의미합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리로다” (시 92:12–14). 이처럼 성서에서 노년은, 열매 없음의 상징이 아니라, 늦은 열매의 시간입니다. 젊음의 열매가 속도와 확장이라면, 노년의 열매는 깊이와 농축입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에 부름을 받았고, 모세는 80세에 출애굽의 사명을 시작했으며,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오랜 기다림 끝에 노년의 문턱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시므온과 안나는, 인생의 마지막 시간에 메시아를 알아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모두 크로노스의 효율성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카이로스의 분별력에서는 누구보다 예민했다는 점입니다.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 3:1)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흔히 숙명론처럼 오해되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질에 대한 통찰입니다. 모든 시간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심는 때가 있고 거두는 때가 있으며, 말할 때가 있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노년은 많은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상실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이 제거되는 시간, 본질만 남는 시간입니다. 노년에 접어들며 우리는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영원에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잠정적인 것인지. 이 분별력, 이것이 바로 카이로스의 눈입니다. (여담) 내 선배가 암진단을 맡았을 때, 인생의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진이라는 진단을 받고는 다시 인생의 우선 순위가 혼란스러워졌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노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 4:16). 바울에게 노년은 단순한 쇠퇴가 아닙니다. 겉사람의 약화는 속사람의 시간 밀도를 높입니다. 육체가 약해질수록, 시간은 더 이상 바깥으로 흩어지지 않고 내면과 하나님을 향해 수렴됩니다. 또 바울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이 ‘지금’은 연령과 무관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금’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이는 종종 노년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노년은 시간을 미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노년은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의 절박함을 아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임박한 종말을 살아가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의 파루시아(재림)을 기대하며 긴박하게 선교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때가 얼마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가 있는 사람들은 어내가 없는 것 처럼하고, 우는 사람은...기쁜 사람은... 무엇을 산 사람은...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이라고 권고합니다 (고전 7:29-31). 바울의 이러한 말씀을, ‘호스 메’ 사상이라고 합니다. 마치...가 아닌 것처럼(as if not). 이를 중간기 윤리하고 합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지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지침을 말하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카르페 디엠(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메멘토 모리 입니다! 임제 선사의 “즉시현금 갱무시절”, 유영모와 김교신의 일기! 하루를 생의 마지막으로 알고 충분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년의 삶과 관련하여, 우리가 한가지 더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향유(apolausis))라는 말입니다. 享有(향유)는 누리고 즐긴다는 뜻입니다.다시말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은혜 가운데 누리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일을 근심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향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34). 사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이미 손에 쥔 것을 망각하고, 남이 가진 것을  있는 것을 욕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혜)을 향유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농담) 친구의 포도주와 별장! 다시말해 향유란, 소유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누림을 뜻합니다.

즉, 내 것이어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졌기에 누리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6장 17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가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이들에게 축적과 성취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노년의 시간은 이와달라야 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축적하고 확보하기 위해 남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작으면 작은데로 많은면 많은대로 함께 나누고 향유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일 것입니다. 노년은 미래를 담보로 살수 없는 대신, 현재를 가장 밀도 있게 사는 시간입니다. 

   독일의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역사를 직선적 진보가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 즉 카이로스의 연속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먼 미래에서 자동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기억과 책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노년의 시간을 매우 특별하게 합니다. 노년은 기억이 가장 두꺼운 시간입니다. 개인의 기억뿐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와 희망을 함께 간직한 시간입니다. 노년의 신앙인은 앞으로 무엇을 더 성취할 수 있느냐보다, 무엇을 증언할 수 있느냐로 살아갑니다. 증언은 힘이 약해질수록 더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과가 아니라 진실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노년을 종종 관리의 대상, 돌봄의 대상으로만 봅니다. 물론 돌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노년을 지혜의 자리, 분별의 자리, 증언의 자리로 부릅니다. 노년의 신앙인은 교회의 주변이 아니라, 시간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교회가 젊음의 속도만을 추구할 때, 카이로스는 종종 노년의 입술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나 교회가 노년의 침묵과 느림을 다시 들을 때, 하나님의 때는 다시 열립니다.

 친애하는 희남 여러분, 노년은 늦은 시간이 아닙니다. 노년은 깊은 시간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드는 시간일지라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늘어나는 시간입니다. 말이 적어지는 시간일지라도, 말씀의 무게는 더 커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노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종종 노년의 시간 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속삭이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그랬듯이, 바울에게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향린의 희남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들을 카이로스로 간주하며,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소중한 것들 향유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

 

“주님,

제 시간을 크로노스로만 보지 않게 하소서.

지금 이 시간이

당신의 뜻이 스며드는 카이로스임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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