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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기뻐할 것이다(들녘교회 강단교류)

by phobbi posted Jul 26, 2026 Views 22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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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7-26

들녘교회 강단교류

함께 기뻐할 것이다

(1:12-18, 4:27-38)

 

한문덕 목사

 

[도농선교협력 31주년을 맞이하며]

 

  들녘교회 교인 여러분! 농활로 애쓰시는 향린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모두 서로들 마주 보며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활기차게 인사할까요?

  작년 622일 우리 향린교회와 들녘교회는 같이 살아온 서른 살을 함께 축하했습니다. 향린의 전 교인이 이 마당에 내려와 함께 예배드리고, 이세우 목사님과 제가 나란히 강단에 서서 에스겔서 37장과 로마서 15, 마가복음서 4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날의 감격은 아직도 우리들 모두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1년이 후딱 지나가고 벌써 우리의 자매결연이 서른한 살을 맞이했습니다. 작년의 축하 행사가 함께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얻었던 지혜를 나누고 지난 세월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었다면 이제 오늘은 우리가 앞으로 또 어떤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하는가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완전히 넘어설 날이 곧 온다고 하는 데다가, 기후 위기는 날로 심각해져서 우리의 먹거리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처음 도농선교협력을 맺은 30년 전하고는 또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농어촌 교회의 현실]

 

  우리 교단 농촌선교특별위원회(이하 농특위)는 작년 75일부터 717일까지 총 12일간 전국 농어촌 교회 기초 실태조사를 실시했습니다. 20년 만(2004년에 총회 선교위원회, 전국농민선교목회자연합회, 그리고 기독교농촌개발원이 공동으로 조사)에 실시된 이 조사는 기장 농어촌 교회의 현주소를 숫자로 낱낱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과거 70~80년대 고도의 부흥기를 거치며 한국 교회가 외적 성장과 화려함에 취해 있을 때, 급격한 이촌향도와 인구 소멸의 직격탄을 맞은 농어촌 교회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고, 이제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침체와 맞물려 농어촌 교회의 현실은 단순한 쇠퇴를 넘어, 가까운 미래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소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통계가 가리키는 냉혹한 현실과 벼랑 끝 위기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개교회, 총회와 노회, 지자체, 그리고 도농 간의 연대를 아우르는 입체적이고 실제적인 대안을 찾아보자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껴지고 실제로 체험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도시농촌선교협력을 지속해 온 들녘과 향린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라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도 1%를 넘지 못하고 있는 출산율이 보여 주듯 지금 한국의 인구 구조의 붕괴와 재생산의 단절이라는 가장 뼈아픈 지표는 교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농어촌 출석 교인 중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71.4%이고, 교회학교(주일학교)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교회가 전체의 61.2%에 달하며, 최근 3년 동안 새신자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은 교회가 23.4%에 달하는 형편입니다.

  교회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소형 교회의 경우 곧바로 목회자 가정의 생계 위기로 이어지는데, 응답 목회자의 과반수인 53.4%가 교회의 존립 자체를 걱정하며 목회하고 있고, 현 상태로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비율이 43.5%에 이릅니다. 현 상태에서 우리 교단의 농어촌 교회 중 절반에 이르는 소형 교회는 10년 안에 문을 닫을 수 있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형편입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제1성서(구약성서)의 본문은 룻기입니다. 저는 룻기를 통해 오늘날 농어촌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과제를 풀어가려고 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룻기]

 

  룻기의 줄거리는 이러합니다. 한 가족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 모압에 정착합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 아들 말론과 기룐입니다. 여기서 두 아들은 모압 여인 룻과 오르바와 결혼했지만 그 땅에 10년 동안 거주하는 사이 엘리멜렉과 말론과 기룐은 모두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며느리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모압 며느리 룻이 따라나서고, 베들레헴에서 이삭을 주우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룻은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를 만나고,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해 룻을 아내로 맞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저 평범한 한 가족 이야기로 보이는 룻기가 거룩한 성서 안에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특별히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맥추절마다 반복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읽혔습니다. 왜일까요? 룻기는 기근과 질병으로 남자들이 모두 일찍 죽는 매우 비극적인 가족 상황에서 출발하지만, 그래도 결말은 매우 아름답게 끝납니다. 주인공인 룻의 아름다운 마음이 잘 드러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 또한 그를 도우려는 선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열녀전의 주인공 같은 모델이 필요했을까요? 아니면 이주민에 대한 환대를 강조하고 싶었을까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차지했던 다윗을 찬양하고, 그의 선조까지 올라가 그를 높이려고 이 글이 쓰인 것일까요? 그런데 룻기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따지며 생각해 볼 것이 많습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렇다면 교회는?]

 

  우선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들이 않습니다. 2절에 소개되는 베들레헴 출신의 유대 남자 엘리멜렉의 이름의 뜻은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룻기는 다윗왕의 조상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 기원을 이루는 첫 인물의 이름이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입니다. 이것은 다윗 왕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억하더라도 언제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일종의 상징입니다.

  사사기 9장에는 엘리멜렉과 비슷한 이름의 아비멜렉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값을 하려고 형제 70명을 죽이면서까지 왕좌를 차지한 인물입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들의 우화로 이스라엘이 전혀 필요 없는 왕을 세웠음을 꼬집습니다. 룻기는 이와 대조적으로, 다윗 왕조차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왕정이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보여 주고자 합니다. 즉 다윗왕도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서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아비멜렉처럼 피를 부르는 일들을 저지르지 말고 왕이 되어서도 하나님 한 분만이 진정한 왕 되심을 깨닫고, 백성들과 더불어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하는 책입니다.

  제가 위에서 룻기가 맥추절(칠칠절)기마다 읽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온 백성들은 이 이야기를 읽으며 최고 권력 다윗왕의 시원이 어디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왕에게 많은 권력을 주었지만, 그 권력은 실제로 평범한 이들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룻기를 읽으며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룻기는 한편으로 왕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기근과 위기의 시기를 어떻게 넘어야 하는지 말하는데, 바로 그것은 왕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모든 백성들이 주체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하라고 말합니다. 바로 보아스가 한 일입니다.

 

[룻과 나오미]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모압 출신 여성인 룻이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려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가겠다고 나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생길이 훤한데 말입니다. 게다가 성경은 왜 다윗왕의 선조가 모압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낼까요?

  모압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큰 틀에서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아들이기에 이스라엘과 친척관계이지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십볼의 아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사주하였고, 사사 시대에는 모압 왕 에글론이 암몬과 아말렉 자손을 모아 이스라엘을 쳐서 여리고를 점령하고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사사 3:12-20).

  이런 이유들 때문인지 신명기 233절에 의하면 모압 사람은 주님의 총회 회원이 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 십대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아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모압 여인 룻은 자기에게 적대적인 곳으로, 그것도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그 험한 길을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에 남편 잃은 여성은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보호 장치도 없었고, 경제적 후원도 받기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룻은 이삭 줍는 일로 그저 목숨을 연명합니다.

  지역 간의 이동과 교류가 별로 없던 시대에 한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집안과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혈연과 지연은 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받으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치였습니다.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모든 안전장치를 풀고 모든 위험에 자신을 내맡기는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최고의 형벌은 사형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가혹한 형벌은 살고 있던 지역과 혈연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룻은 이런 위험천만한 길로 나서는 것입니다. 룻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일까요?

 

[룻의 지혜와 사랑]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4절을 보면 나오미의 끈질긴 설득에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습니다. 여기서 달라붙었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다바크’(ךבד)입니다. 이 말은 뜨거운 사랑과 친밀함, 결속력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잠언 1824절에 보면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동기간보다도 더 가까운을 뜻하는 그 단어가 바로 다바크’(ךבד)입니다. 그러니까 룻은 지금 시어머니를 동기간보다도 더 애틋하고 더욱 긴밀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나오미는 한결같이 며느리들을 내 딸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딸 같은 며느리에게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줄곧 애를 씁니다. 룻기 전체를 보면 나오미는 내내 룻의 삶을 돌보아주고, 그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고향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으로 왔습니다. 이방 땅에서도 나의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이름의 남편처럼 이 여성도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내린 불행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생각하고 감내하는 믿음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도 주님의 뜻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숙한 믿음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으로 이방 땅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기 며느리들을 딸처럼 아끼고 사랑했고, 남편과 아들을 잃었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나오미의 모습에 룻은 매우 깊은 인생의 깨달음과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결단합니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이 말은 나오미가 이방 땅에서 고생하면서도 자신을 챙겨 주었듯이, 자신 또한 낯선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될지라도 나오미와 함께 그 어려운 삶을 나누겠다는 각오가 배어 있습니다. 룻은 이어서 말합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는 나오미의 사랑을 통해 룻이 깨달은 또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새로운 신앙의 길입니다. 지금 모압 여인은 자신이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어머님과 같은 신앙에 귀의하겠다고 말합니다. 모압의 주신은 그모스(Chemosh)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가 정의로운 신이고, 강한 신이기에 모든 전쟁에서 자신들을 승리로 이끌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모스는 아내도 있는데, 이쉬타르 그모스입니다. 또 동시에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 뿐만이 아니라, 바알도 숭배하고, 엘도 숭배했습니다. 즉 모압 사람들은 고대에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보이는 다신교적 종교를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압 여인인 룻의 고백은 이런 모든 신들을 버리고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다신교적 전통은 대체적으로 자기중심적 사고를 갖게 합니다. 즉 자기의 삶을 중심으로 해서 벌어지는 온갖 재앙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신들을 보험처럼 모시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례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드러나는데, 다신을 섬기는 이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닌 동일한 문제를 이 신 저 신에게 다니면서 계속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면 고대의 유일신교는 다신교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게 됩니다. 즉 내 중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랑과 자유, 자유와 평등 같은 가치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당장의 내 문제만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즉 고대의 다신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종교이지만, 고대의 유일신교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위해 헌신하게 하는 종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태도와 가치를 배우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관점, 자신의 경험, 자신이 태어나 자라 온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이 만든 세계라는 한계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더 넓은 세계, 더 크고 깊고 높은 세계에서도 통하는 뜻을 찾아내고, 그 진리의 바다에 자기를 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자기의 생각만 주장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제 꾀에 제가 넘어집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지혜롭게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룻은 바로 자기를 열어서 남의 고난을 함께 질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고, 그것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삶을 통해 배웠던 것이며,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니까 기근과 가난, 고통의 한복판에서 당시의 힘 없는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서로를 아끼는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는 헌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들녘과 향린이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날 지방과 수도권, 도시와 농촌은 서로 상생의 길을 함께 모색해야 합니다. 각자 자기 살길만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좀더 보편적 가치,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먼저 챙기지만 신앙은 관계를 중요시 여깁니다. 자본주의는 편리함만 추구하지만 신앙은 좁고 험한 길이 구원의 길이라 말합니다. 들녘과 향린이 걸어왔던 길이고, 앞으로도 가야할 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 중 하나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나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룻과 나오미 이야기에서 먼저 씨를 뿌린 사람은 나오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룻이 또 새로운 씨를 뿌립니다. 그래서 둘 모두는 씨를 같이 뿌리고 함께 추수하는 결실 속에서 큰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그렇습니다. 때로 누군가 심은 것을 전혀 다른 사람이 얻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제가 심고 제가 먹으려고 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누가 먹든지 간에 늘 씨를 뿌리는 사람입니다. 향린과 들녘은 우리 교단의 도시농촌선교의 씨를 뿌린 존재들입니다. 씨앗 뿌리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계신 이제 90을 넘으신 이우환 화백이 어릴 때 겪었던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우환 화백의 부친은 독립운동을 하셨고, 그래서 늘 순사들의 단골 핍박의 대상이었습니다. 순사들은 시시때때로 들이닥쳐 부친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립니다. 장독을 깨고, 집안의 모든 곡식을 빼앗고, 말리는 가족들을 때립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화백의 할아버지는 9살 먹은 손자를 이끌고 밭을 갈러 갑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다 빼앗기던 시절, 그럼에도 밭을 갈러가는 할아버지를 따라간 손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밭 갈아 봐도 소용이 없지 않아요. 농사 지어봤자 또 가져갈 건데 뭐.”

 

그러자 할아버지는 보랏빛으로 물든 진달래 가득한 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너는 어른이 되어도 모를 거다. 아니 모르는 게 나아. 봄이 되면 가랑비가 온다. 그러면 농군들은 말이다. 들이나 산의 밭을 갈아서 어김없이 씨를 뿌리지. 무슨 일이 있어도 씨를 뿌리는 거지.” (이우환 지음/서인태 옮김, <시간의 여울>(디자인하우스, 1994. 9. 27. 12쇄 펴낸날), 29-30.)

 

  그렇습니다. 농군들은 어김없이 씨를 뿌립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농어촌 교회 기초 실태조사 보고서는 다행히 절망스러운 현실에 이어 대안도 제시합니다. ‘마을 목회로의 패러다임 전환,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와의 정책적 연대, 교단 차원의 위기관리 시스템 구축, 기독교농촌개발원의 플랫폼적 사역, 교단 내 입체적 네트워크 구축 등 다양한 방법들을 제안하고 또 모색해 보자고 권고합니다.

  놀랍게도 농어촌 목회자의 71.8%는 현재의 목회에 만족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들은 성장 위주의 맘몬식 목회가 아니라 진정으로 의미 있고, 소명 가득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함께 소멸한다해도 예수님의 부활 신앙 안에서 비움의 목회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향린교회는 이런 교회들과 더불어 함께 기뻐할 목회를 하고자 하는 교회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처음에 예수님을 그저 유대인 남성으로만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결국 그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 마을에 전파하는 사도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여인의 증언을 듣고 달려 나와서 예수를 만나고 또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

  향린과 들녘, 들녘과 향린의 도농선교협력의 복음은 이제 더욱더 소중한 가치로 우리 교단에, 한국 개신교계의 씨앗으로 남을 것입니다. 계속 씨를 뿌리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래서 먼 훗날에도 함께 기뻐하는 날을 맞이합시다. 그 길에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어김없이 씨를 뿌립시다.

복음의 씨를, 함께 기뻐할 연대의 씨를 뿌립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이름의 나오미가 됩시다.

 

축복기도(캘틱 아일랜드 축복기도)

 

여러분 손에 일거리가 항상 있기를

여러분의 지갑에 언제나 돈이 좀 남아 있기를

여러분의 창가에 햇살이 늘 비치기를

비가 온 후에는 꼭 무지개가 뜨기를

친구들의 손길이 늘 여러분 가까이에 있기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May there always be work for your hands to do

May your purse always hold a coin or two

May the sun always shine upon your window pane

May a rainbow be certain to follow each rain

May the hand of a friend always be near to you

May God fill your heart with gladness to chee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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