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3. 수요평화거리기도회
"오로지 공의를, 겸손히 네 하나님과"
미가서 6:6-8
얼마 전, 새교우 가입식을 신청한 교우분들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만나 삶을 나누고, 또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지요. 마음을 터놓기 위해 질문 카드를 나누던 중, 한 분에게 이런 질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잘 지내나요?" 밥을 먹었냐는 말처럼,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기 위해 으레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말은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지극히 익숙할 테지요.
민생 파탄, 민주 파괴, 전쟁위기 고조, 윤석열 정권 심판... 이 주제를 전해 듣고, 어떤 묵상을 교우 여러분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그' 인사말이 떠올랐습니다. 잘 지내냐는 인사말 말입니다. '아, 그 인사를 거리에 나오신 분들과 나눠야겠다.' 그러한 단상이 제 마음에 작은 이야기 하나를 틔우도록 힘을 주었습니다.
잘 지내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잘 지내냐는 인사를 누구에게 건네십니까?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네 세상 돌아가는 꼴이 그렇습니다. 정부는 인력 부족을 이유로 이주자 확대 정책을 펼쳤지만, 정작 이주노동자의 최소한의 안전망이 되어줄 수 있는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예산을 올해부터 전액 삭감했습니다. 아시아 8개국에서는 이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공식서한을 보내기까지 했지요. 여성주의에 반발하는 백래시를 적극 활용하여 정권을 잡은 것으로 모자라, 성평등 예산을 삭감하고, 성평등 지수는 석 달째 공개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노인빈곤율이 하늘을 찌르는데,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만 65세 이상 노인을 최저임금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건의안을 발의했습니다.
당최 사람을 사람으로 볼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어떤 누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의문이 떠오릅니다. 이들이 잘 지낼 만한 적이 있긴 했던가?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자유로이 이용하지 못하고, 목사가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로 출교 선고를 받고, 페미니즘은 감히 입에 올려서도 안 되는 악의 축이 되어가는 곳에서, 우리가 잘 지냈던 적은 있던가?
오늘 본문이 실린 미가서는 재미있는 성서입니다. 이 성서에는 예언자 미가의, 좋게 말하면 예언이고 나쁘게 말하면 욕설에 가까운 비판이 실려 있지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신랄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욕쟁이 선지자 양반은 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요?
미가서에 실린 구절들을 읽어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국가 권력자들은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종교 지도자들은 타락하여 돈을 받고 율법을 가르칩니다. 돈을 받고 계시를 밝히는 예언자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돈에 눈이 뒤집힌 부자들은 남을 등쳐먹고, 어떤 이들은 저울과 추를 거짓으로 달아 사기를 칩니다. 자기 배 불리는 욕심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나타납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이스라엘의 행태에 미가 선지자는 속이 뒤집혀도 백 번은 뒤집혔을 겁니다. 흥미로운 건, 이 상황이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지요.
어지럽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명명백백히 드러냅니다. 이는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요.
당신이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져와서 바치든, 양을 수천 마리 바치든, 천 갈래 만 갈래 강 줄기들을 다 채울 만큼 올리브 기름을 바치든, 심지어 당신이 그토록 아끼는 자식을 바치든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 쓸짝도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믿는다면, 당신은 전제 자체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신처럼 떠받드는 그 율법! 율법에 적힌 글자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물을 백 마리 천 마리 준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대체 무엇인가? 미가는 명확하게 말합니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고, 긍휼한 마음을 가지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미가 선지자의 때에도 세상은 어지러웠습니다. 힘을 유지하고자 하는 권력자들의 욕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 과연 권력자에게만 있었을까요? 누군가를 철저히 타자화하여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알량한 힘을 행사하고픈 욕망은 어디에나 도사립니다. 누구에게나,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니 저울과 추를 속여 사기를 저질렀겠지요.
권력자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빨아먹으며 자라납니다. 선거철이 되니 국회의원 후보들이 문자를 자주 보내더군요. 한 후보는 문자를 보낼 때마다 재개발 이야기를 빼먹지를 않습니다. 재개발 이야기'만' 합니다. 조합원들의 꿈을 이뤄주겠답니다. 마치 그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곤 조합원이 전부인 듯 말입니다. 재개발 지역에서 재개발 지역 옆으로 이사를 한 저는 그 문자를 보고 기가 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땅값 올려주겠다는, 아파트값 올려주겠다는, 인간들을 홀린 듯이 지도자로 뽑는 땅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요? 갈 곳 없는 청년들이 늘어나든 말든, 그저 내 배 불리면 된다는 생각이 가득한 땅에 희망이 있을까요? 공의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는 잘 지낸 적이 도통 없는 인생들과 함께했습니다. 멸시받고, 천대당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존재 취급받는 사람들. 말해도 그 말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과 함께하며 자기 삶을 불태우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잘 지낸 적 없는 이들과 삶을 보내며, '심판'을 받았습니다.
진정 심판을 받아야 할 이들은,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잘 지내지 못하게 만드는 이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자리에 두는 이들입니다.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이들입니다. 타인의 노동력에 기대어 살아가면서, 정작 그들을 자신의 발밑에 둬야 직성이 풀리는 추악한 인간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을 못내 선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꿉니다. 누구는 시민이고, 누구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람, 범법자인 세상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가 내려앉은 세상을 꿈꿉니다. 그 나라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서로 칼을 빼어드는 일이 없고, 전쟁이 없는 곳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가꾼 나무 아래에서 쉬는 곳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상 없이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습니다. 작은 것들을 버리기를 택한다면, 그저 권력의 꼭대기에 선 이들만 바뀔 뿐, 세상은 뒤집히지 않을 겁니다. 거대 담론 사이에 사라져가는 이야기들이, 바로 예수가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구해내려고 했던 이름들입니다. 소수자라는 지칭에는 차마 다 담기지 못하는 삶들이 거대 담론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를 빕니다. 심판을 받아온 그 이름들이 우리의 이름이 되기를 빕니다.
다시 여쭙습니다. 잘 지내냐는 인사를 누구에게 건네실 건가요? 우리, 늘상 심판 당해온 존재들에게 안부 인사를 건냅시다. 그들의 편에 서서, 세상의 심판에 맞섭시다. 우리 안에 드리운 욕망의 그늘을 걷어내고, 자기 배 불리기 급급한 강도 같은 이들에게 대항합시다. 그것이 공의를 실천하는 길이고, 긍휼한 마음을 갖는 일이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부활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제주 4.3 평화공원에서는 제76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렸지요. 부활을 기다리는 존재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삭제당한 존재들이 우리 곁을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곧 나의 이름임을 고백합시다. 그 고백과 함께, 오로지 공의를, 겸손히 우리의 하나님과 이뤄가길 빌어봅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