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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없는 구원 | 2026-06-07 | 유영상

by 유영상 posted Jun 07, 2026 Views 4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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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6-06-07

조건 없는 구원

(42:7-11; 2:1-4; 19:1-10)

 

유영상 목사

 

[낯선 삭개오]

 

삭개오는 어릴 적 참 본받고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이 대단해 보였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낭만적인 이야기로만 알았던 동화 <신데렐라>가 의붓언니들과 얽혀 있는 잔혹 동화이기도 했던 것처럼 성서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로 늘 아름답고 말끔하지만은 않습니다. 낭만적인 이야기로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본문이 있는 반면 진흙탕 같아 보이는 인생을 살면서 전적으로 옹호할 수도 없는 인물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바로 삭개오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그의 삶은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뒷배경에는 한 가지 대조되는 이야기, 극적인 전환을 기대하게 하는 구도가 있습니다. 평생을 '거래'로 살아온 한 사람과 아무 거래 없이 먼저 다가오시는 한 분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환대, 거리낌 있는 것을 도려내지 않고 끌어안는 위대한 공동체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에 관해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관장이었습니다. 둘째, 부자였습니다. 셋째, 잃은 자였습니다. 세관장과 부자는 삭개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입니다. 반면 '잃은 자'는 그의 상태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이 다 가진 부자 세관장이면서, 동시에 잃은 자이기도 했던 이 양가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깊은 의문을 남깁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의 눈에 그는 잃어버린 자로 보였을까요? 한 가지 실마리가 있습니다.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느닷없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는 것은 기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니요. 궁금해집니다. "삭개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스스로 저렇게 시인할까?"

대개 그 잘못은 세리라는 직업이 제국에 부역하여 낳은 죄들로 이해됩니다. 세리는 민중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로마 제국에 바칠 세금을 걷는 제국의 부역자,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친일파에 가깝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삭개오가 말한 "강제로 빼앗은 것"은 제국에 부역한 죄를 상징하고, 그가 배상하려는 재산의 절반과 빼앗은 것의 4배는 그 뉘우침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숫자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삭개오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구나', '로마에 부역한 죗값을 배상으로 치르려 하는구나'. 하지만 이 해석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한 가지가 남습니다. 그가 말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상징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무엇이었다면 어떨까요?

 

[삭개오: 세관장, 부자, 잃은 자]

 

삭개오의 직업, 세리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그 실마리가 보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어마어마한 하청 사회였습니다. 세금부터 그렇습니다. 오늘날 세금은 국세청이라는 국가 기관이 담당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의 세금 체계는 국세청 업무가 민영화된 상태였다고 보면 됩니다.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로마 제국은 급격히 늘어난 영토를 다 관리할 수 없게 되자 징세를 민간에 외주로 넘겼습니다. 각 지역의 민간 징세 청부 업체(푸블리카니, Publicani)에 징수권을 팔았고, 낙찰받은 조직이 세리를 고용해 독점 권한으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세리가 자기 밑에 또 사설 세리를 두기도 했습니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세리는 모두 이 구조 안에서 고용된 사람들, 곧 하청노동자였습니다. 세리는 흔한 공무원이 아니라 하청노동자였던 것이지요. 이들은 주로 지방 관세나 통행세 같은 간접세를 걷었는데, 삭개오가 있던 여리고는 최고급 향료(발삼) 무역로와 통상로가 겹치는 엄청난 세수 요충지였습니다. 이곳을 지나는 상인이 정말 많았으니, 세리 삭개오는 통행세로 큰 돈을 벌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세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걷어, 곧 과다 징수(overcollection)하여 폭리를 취했습니다. 규제가 비교적 약한 간접세의 사각지대를 파고든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여리고에서 1년에 통행세로 1억만 걷으면 되는데 2억을 걷어 1억을 가로챈 셈입니다. 로마 제국은 약속된 액수만 국고로 들어오면, 그 사이에서 이들이 얼마를 남기든 크게 관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1세기 유대 철학자 필론(Philon)은 세리가 세금을 내지 못한 사람의 집에 쳐들어가거나 도망치는 이를 뒤쫓아 학대하고 재산을 갈취했다고 기록합니다. 팔레스타인과 통치 제도가 비슷했던 이집트에서는 세리가 무장 조직을 데리고 마을과 집을 강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제 삭개오가 말한 "강제로 빼앗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그는 세관장의 지위를 남용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리를 취했습니다. 동족의 고혈을 짜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렇게 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부족분은 고스란히 세리 개인이 책임져야 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43, 로마의 카시우스가 유대에 막대한 조공을 물렸을 때, 이를 채우지 못한 세관장들은 노예로 팔려 갔고 유대의 네 개 도시 주민이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세관장이었던 삭개오에게도 이런 위협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지만 늘 실적 압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그를 '잃은 자'라고 부르십니다. 여기서 '잃은 자'는 헬라어로 아폴뤼미(apollymi)인데 단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놓쳤다는 뜻을 넘어 '파멸하다'라는 뜻까지 품은 말입니다. 이 원어를 있는 그대로 살려 읽으면 삭개오는 파멸한 자였습니다. 세관장으로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사형이든 노예든 목숨에 실질적인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조건 없는 구원]

 

이런 삭개오에게 '구원'이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살아온 세계의 셈법으로는 구원이란 곧 할당량을 채우고, 노예로 팔려가지 않고, 내년에도 세관장으로 남아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조건을 채워야 얻는 구원, 끝없이 거래해야 겨우 지킬 수 있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에게 베푸신 구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관장이자 부자인 그가 동시에 잃은 자이기도 했던 자신의 실존적 환란을 딛고, 예수님께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고 4배를 배상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대단한 결심입니다. 두 가지 모두 율법이 요구하는 규모를 훌쩍 넘습니다. 레위기 645절에는 강탈하거나 착취한 것에 대한 배상법이 나오는데, 원금에 그것의 5분의 1을 더하면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을 훨씬 웃도는 4배를 약속합니다. 게다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겠다고 결심합니다. 삭개오의 놀라운 결단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한 건 바로 예수님의 함께하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려도 예수님은 먼저 그의 집 문턱을 넘으셨습니다. 삭개오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미움의 대상이었음을 모르지 않으셨을 텐데도 말입니다. 일찍이 누가복음 527~32절에서도 예수님은 세리 레위를 비롯한 많은 세리들과 그 이웃들을 한 식탁에 부르셨습니다. 서로 채무로 얽혀 불편한 사이였을 그들 가운데로 예수님이 먼저 들어가 중재에 나서신 것이지요. 시비를 거는 바리새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은 죄인 취급받던 세리를 어떻게든 돌이키려 애써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학교 일진이 한 학생을 줄곧 괴롭히는데, 사정 모르는 선생님이 끼어들어 둘이 똑같이 싸우지 말라고 타이른 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원인 제공자가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리 레위는 이 사죄의 자리를 위해 식사를 베풀어야 했고,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기부와 배상을 약속합니다. 예수님은 어물쩍 봉합하는 거짓된 화해가 아니라, 자발적 뉘우침을 가능케 합니다. 제국의 폭력적 시스템이 빚어낸 또 한 명의 가해자, 삭개오가 참으로 구원에 이르려면 자기 죄를 직면하고 책임지며 스스로 그것을 매듭지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영화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2001년에 개봉한 조폭들이 절에 잠시 얹혀살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미션을 조폭과 승려가 편을 갈라 수행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독이 깨져 있으니 물이 찰 리가 없지요. 모두가 애를 먹습니다. 깨진 곳을 몸으로 막아도 보고 급기야 독에 들어앉아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합니다. 그때 한 조폭 두목이 기지를 발휘해 부하들에게 그 독을 냇물에 던져 깊이 누르라 합니다. 독이 냇물에 잠기자 물이 가득 찼습니다. 미션 성공이지요. 훗날 그가 주지스님께 묻습니다. 어째서 조폭인 우리를 감싸 주느냐고. 스님은 도리어 밑 빠진 독을 어떻게 채웠느냐고 되묻습니다. 조폭은 그저 물속에 던졌을 뿐이라고 대답하죠. 그러자 스님이 말합니다. "나도 밑 빠진 너희를 그저 내 마음속에 던졌을 뿐이야."

예수님이 보시기에 삭개오도 밑 빠진 독 같았을 것입니다. 제국에 부역하는 민족의 반역자, 폭력으로 세금을 갈취해 부를 쌓은 세관장이자 부자, 민중의 목숨과 제 생계를 거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할당량을 못 채우면 노예로 팔려 가고 채우려면 동족을 강탈해야 하는 기로에서 분투하던 상처투성이 죄인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이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제국의 폭력에 의해 고갈되어 가던 하청노동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에 삭개오를 던지십니다. 그렇게 그의 집에 들어가신 것이지요. 그리고 놀랍게도 밑 빠진 독에 물이 차오르듯 삭개오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어주고, 속여 빼앗은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마음에 품어 던지신 순간 채워질 수 없던 독이 가득 차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두고 '구원'이 이르렀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거래도 없이 먼저 베푸십니다. 반면 삭개오는 거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이 그러했고, 징세 청부 업체에 고용된 그의 존재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민중의 삶을 소진시켜야 자신이 설 수 있다고 계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거래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이 됩니다. 4배의 배상과 재산 절반의 기부가 언젠가 그만한 값으로 되돌아온다는 일말의 보장도 없이 내어놓습니다. 이 순간 세상의 모든 조건은 무력해집니다. 예수님과 삭개오가 마주한 그 사이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없는 사람 취급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도려내지 않으십니다. 아픈 손가락처럼 보일지라도, '저 사람만 없으면 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친 이 여리고가 평화로울 텐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그 편집적인 상상력을 거부하시고 삭개오를 끌어안으십니다.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던 세리들과 식사하시고 삭개오의 집에 기꺼이 들어가십니다.

당연히 예수님께도 이는 도전이었습니다. 세리와 함께 있으면 모두가 손가락질했고 예수님을 따르던 민중조차 거세게 반대했습니다. 민중과 세리는 채무로 얽힌 사이였으니까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삭개오를 한 공동체로 품으시고 끝내 사과와 배상까지 이끌어 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언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제 백성에게서 잘려 나갔던 자를 다시 그 백성 한가운데로 돌려 세우시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이웃을 귀히 여기고 서로 돌보며 중보하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사랑의 울타리가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삭개오는 기꺼이 도전했고 예수님은 그것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구원이 이르렀음을 선포하십니다.

잃은 자였던 삭개오는 이제 어떻게 됐을까요? 세리가 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갔을까요? 오늘 함께 읽은 욥을 떠올려 봅시다. 욥은 고난 이후에 큰 보상을 받지만, 그렇다고 욥이 고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보상은 잃은 것에 대한 응당한 배상도 지나온 고통을 덮는 망각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제부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었습니다.

삭개오가 경험한 구원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옛 자리로 되돌려 보내지도 도려내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이라는 울타리로 품어 한 번도 살아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동행하십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없던 일로 하고 원인을 색출하고 아픈 손가락을 잘라내는 방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지나온 자리에 대한 향수도 아픔에 대한 망각도 없습니다. 다만 오늘에 충실하며 그 새로운 세상을 향해 찬찬히 나아갈 뿐입니다.

 

[살아가기]

 

어느덧 여름입니다.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의 시대에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폭력적인 여름을 살아내야 한다니 걱정이 앞섭니다.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분기점을 넘었기에 이를 받아들이고 삶을 새롭게 재편해 살아가야 하겠지요. 에어컨과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는 자발적 운동도 함께 가야겠지만 더 근본적인 해결이 시급합니다.

국제사회는 1997년 교토의정서를 채택해 탄소 배출을 제한하기 시작했고, 2015년 파리협정에 이르러 선진국에만 지워졌던 의무를 모든 국가로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위반 시의 책임은 완화되었고 강제력 역시 약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탄소배출권 '거래'는 더욱 횡행합니다. 변화하기 전의 삭개오가 그러했듯 우리 세계는 여전히 거래의 셈법 앞에 멈춰 서 있습니다. 조건 없이 내어놓지도 책임을 끝까지 지지도 못한 채 말입니다. 뜨거워지는 지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과거로 온전히 돌아가지도 못한 채 개선도 균형도 아닌 어정쩡한 '중립'에 멈춰 서 있습니다. 도려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그 머뭇거림 말입니다.

이러한 지구 안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모여 하나님 나라를 일구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세관장이자 지구를 고갈시키며 풍요를 누리는 부자, 그래서 잃은 자인 이들입니까? 당연히 양자택일 할 수 없습니다. 삭개오가 세관장이자 부자이면서 동시에 잃은 자였듯 우리도 그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향해 분투하지만 여전히 거래를 멈추지 못한 삭개오, 아니 우리. 슬픈 자화상입니다.

그러니 도려내고 싶은 기억들, ‘저 사람만 없으면 될 텐데하는 욕망을 똑바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밑 빠진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품으로 던집시다. 그렇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갑시다. 예수님의 품에 자신을 내던지며 그분의 현존을 날마다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리스도 안에서 끌어안으십시오.

그분의 따뜻한 온기를 나누십시오.

사고 팔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비가 놀랍습니다.

기꺼이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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