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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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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교회(담임목사 한문덕)는 서울 종로구 경희궁 2길에 위치한 도심지 교회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많은 사람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 소속되어 있는 향린교회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갖고 있다. 오늘의 향린교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출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다.

 

1. 향린교회의 창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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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상잔의 비극 6‧25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3년 5월 17일. 폐허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안병무, 홍창의 등 12명의 젊은 신앙인이 한 교회를 창립했다. 창립자 중에는 신학 전공자가 없었다. 이들은 학창 시절부터 신앙 동지로 지내오면서 민족과 교회가 직면한 위기를 뼈저리게 체험하였고, 이를 극복하려면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믿어 교회를 창립한 것이었다. 이렇듯 향린교회의 창립에는 민족의 고난으로서의 6‧25전쟁 체험과 그 고난 가운데서 철저하게 무능했던 교회의 체험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민족의 위기에 둔감하고, 민족의 고난을 외면한 채 교파 분열과 교권 싸움으로 편할 날이 없던 당시 기성교회를 갱신하려는 열정을 갖고, ① 생활공동체 ② 입체적 선교공동체 ③ 평신도교회 ④ 독립교회라는 네 가지 창립 정신을 내세웠다. 또 저들은 자기들의 공동체를 “향린”이라 이름 붙여 스스로 ‘향기로운 이웃(香隣)’이 되기로 결단했다.

 

2. 일반교회로의 전환과 급속한 성장

 

처음에 서울 중구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향린교회는 초대교회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반(半)수도원적인 형태의 생활공동체로 시작했다. 창립 당시 모습은 아무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 교회였고 그런 의미에서 독립교회였다. 어떤 목회자도 모시지 않은 평신도교회였다. 목회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 형태의 교회가 아니라 모든 교인이 목회자처럼 주체적으로 선교에 직접 참여하는 평신도교회를 이상적인 교회 형태로 이해했다. 또 교인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통해 입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선교해 나간다는 것이 저들의 처음 생각이었다. 이것이 입체선교 또는 입체적 선교 공동체였다.

 

하지만 창립 때 내세웠던 높은 이상과 꿈은 상황에 따라 하나씩 퇴색했다. 처음 출발 때 12명에 불과하던 교인이 그해 12월 50명이 되었고, 이듬해 85명, 그리고 그 다음 해 135명 등을 거쳐 150명 선에 이르렀다. 이렇게 교회가 외부에 알려지고 성장하면서 공동체 교회는 일찍이 무너졌다. 그러는 동안 창립자 중 여러 명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남에 따라 교회의 처음 모습은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교회로 출범한 지 6년 만인 1959년 3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한국기독교장로회에 가입했다. 더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고 전문화되어 더 이상 장로들만으로는 교회를 꾸려나가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담임목사 청빙 문제가 깊이 있게 논의되었고, 결국 1974년 10월 김호식 목사가 제1대 담임목사로 취임해 향린교회는 창립 후 21년 만에 목회자를 모시는 교회가 되었다. 이로써 향린교회는 일반교회 형태로 전환했다. 김호식 목사는 당시 경동교회 부목사를 역임하고,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김호식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향린교회는 교인 수와 재정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했다. 하지만 향린교회가 처음 갖고 있던 모습에서는 점점 멀어져갔고 오히려 대형교회를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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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자 중 한 사람인 안병무 선생과 현 담임목사 이전의 단임목사(안병무, 김호식, 홍근수, 조헌정, 김희헌)

 

 

3. 창립정신으로 되돌아간 향린교회와 시련

 

이에 1983년 창립 30주년을 맞아 청년들은 향린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조명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향린이 창립 정신으로 돌아가기를 호소했다. 이때부터 교회의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이 와중인 1986년 김호식 목사가 사임했다.

 

이에 교우들은 향린이 지향할 교회상과 그런 교회를 목회하기에 적합한 목회자상에 합의한 뒤 1987년 1월 홍근수 목사를 모시게 되었다. 교회 창립 후 34년 만에 제2대 담임목사를 모시게 된 것이다. 유학과 목회로 13년가량 미국에 체류한 홍 목사는 철학박사로서 신학자인 동시에 목회자였다. 홍 목사는 취임 직후부터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악을 비판했으며, 그에 의해 시달리는 민중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다. 특히 그런 구조악의 원천인 민족분단의 벽을 허물고 남북이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함을 역설했다. 이런 홍 목사의 설교와 사회적인 활동에 대해 당시 향린교회는 찬반양론으로 갈렸고, 결국 교회가 내분에 휩싸여 홍 목사를 반대하는 교우들이 향린을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교회 내분 이후 향린교회는 1991년 홍근수 목사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는 또 다른 시련을 맞았다. 하지만 향린 교우들은 홍 목사가 1년 6개월의 형을 치르는 동안 일치단결하여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불의와 싸우며 이 고난의 시기를 극복했다.

 

4. 창립 40주년 기념사업

 

앞서 밝힌 것처럼 창립 당시의 높은 이상은 세월이 흐르며 외형적으로는 무너졌지만, 창립자가 가졌던 ‘민족 구원’과 ‘교회 변혁’의 꿈은 결코 포기되지 않고 오늘의 향린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향린교회가 1993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전개한 여러 기념사업이 그 구체적 증거다. 향린교회는 1993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향린교회의 역사인 《향린 40년》을 발간했고, 분단된 민족 앞에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을 제안했으며, 한국교회 앞에 〈향린교회의 신앙고백과 교회갱신을 위한 제안(교회갱신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40주년 기념교회로 강남향린교회를 설립했다. 이는 창립자들의 꿈을 40년이 지난 당시의 상황에서 되살려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민족사와 유리되지 않는 ‘민족교회’로서의 자기 위상을 재다짐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1)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의 제안

 

모두 7장 120조로 구성된 단일 통일국가(1국가 1체제)의 헌법 초안 발표는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누구나 통일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먼 미래의 일로 여겼기에 통일된 조국의 헌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향린교회가 마련한 〈통일공화국 헌법(초안)〉은 통일운동이 단순히 통일의 과정뿐 아니라 ‘통일 이후’까지 준비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즉 7천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이 이루어진 뒤 그 통일조국이 지향할 국가와 사회상을 응축된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통일을 지향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이 발표는 당시 통일 이후에 제기될 문제를 미리 점검하지 못했던 통일운동단체와 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과 충격을 주었다. 

 

(2) 〈교회갱신선언서〉의 발표

 

〈교회갱신선언서〉에서 향린교회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제정하고 이에 기초해 한국교회의 문제와 병폐를 진단하고 갱신을 호소했다. 향린교회는 이 선언을 발표한 뒤 자신도 개혁의 대상임을 자인하며 교회 내에 교회갱신위원회를 설치해 이 선언의 내용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연구했고, 1994년 종교개혁주일에 이를 구체화한 〈교회갱신실천결의〉를 발표했다. 그 뒤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는 이때 제시된 방향에 따라 이루어졌다.

 

(3) 강남향린교회의 설립

 

강남향린교회는 향린교회가 40주년 기념교회로 1993년 서울 송파지역에 설립한 교회다. 강남향린교회의 설립은 민족공동체를 섬기는 교회라는 정신으로 출발한 향린교회가 자기와 같은 정신의 교회를 한강 이남 지역에 세운다는 선교적 모색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이는 향린교회 창립자들이 갖고 있던 분가선교론(‘교인 수가 일정 수준에 이르면 분가’)의 정확한 실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향린교회는 강남향린교회 창립에 필요한 제반 경비(건물대여, 차량 구입 등) 일체를 지원했고, 부목사였던 김경호 목사를 담임목사로 파견했으며, 목회자가 생계 걱정 없이 소신 있게 목회해 나갈 수 있도록 자립 때까지 목회자 사례비를 5년간 지원하기도 했다(1차년도 100%에서 매년 20%씩 감축). 또 강동 및 송파 지역에 사는 교우 중 원하는 사람을 강남향린교회에 참여하게 했다. 그 결과 강남향린교회는 3년 만에 자립했으며, 그 뒤 자신의 창립 10주년에 들꽃향린교회를 분가함으로써 창립자들의 분가선교론을 스스로 실천해 내는 기적을 이루었다. 

 

5. 거듭나는 향린의 목회와 선교

 

그 뒤 향린교회는 창립 40주년에 발표한 〈교회갱신선언서〉와 이를 구체화한 〈교회갱신실천결의〉가 제시한 세 가지 갱신 방향에 따라 꾸준히 자신의 목회와 선교를 수행했다. 그 세 가지 방향은 이런 것이었다. 즉, 한국교회의 예배와 문화는 민족 정서를 담아낼 수 있도록 갱신되어야 하며, 교회는 민주적 공동체로 갱신되어야 하고, 교회는 선교지향적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1) 예배에 민족문화 수용

 

향린교회의 예배는 다른 한국교회의 예배와 상당히 다르다. 한마디로 그 특징을 말하라면 매우 한국적이다. 우선 예배 용어 중의 상당수가 우리말 표현이다. 여는 찬송(개회찬송), 하늘뜻펴기(설교), 세상으로 보냄(파송) 등이 그것이다. 또 예배의 시작과 끝에 탁상종이 아닌 민족 고유 악기인 징을 울리는 것도 색다르다. 회중 송영은 모두 ‘국악 찬송’으로 하며, 회중 찬송 가운데 한 곡은 꼭 ‘국악 찬송’을 부른다. 향린교회에서는 기존의 피아노와 오르간과 함께 ‘국악선교회 예향’이 예배 음악을 반주하고 있다. 

 

1995년 9월 창단된 예향은 기본적으로 교회 내부에서 국악에 관심 있는 교우들을 모집해서 피나는 연습을 통해 연주 능력을 키워 결성한 것이다. 단원들은 창단 후 국립국악원 등에서 악기연주법을 배웠고, 처음에는 특별한 주일에만 연주하다가 1999년부터는 주일예배마다 연주하고 있다. 교회는 예향을 위해 성가대에 버금가는 예산을 지원해 왔는데, 이제는 국악기 연주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실력이 향상됐고, 또 전문 연주자도 단원에 동참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또 오랜 준비 끝에 2000년 초에는 예배 때 사용할 “향린 국악찬송”을 발간했다. 처음에 여기 실린 150여 곡의 국악 찬송들은 이미 발표된 곡 중에서 선별한 것도 있고, 특별히 작곡을 의뢰해 받은 것들도 있었다. 이 국악 찬송가는 그 뒤 두 차례 개정 및 확장을 거쳐 지금도 예배에 사용되고 있다. 

 

향린의 한국적 예배는 상당히 유명해져서 전 세계 신학교 교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향린교회에서 예배드리는가 하면, 예향이 국내외 여러 행사에 초청되어 국악 찬양을 선보이기도 한다. 성가대의 가운과 예향의 단복은 한복을 개량해 만든 것이다.

 

또 향린교회는 교회력에 민족사적 기념일을 반영해 11월 셋째 주일에 지키던 추수감사절을 1994년부터 추석 연휴 끝난 뒤 첫 주일로 지키고 있고, 민족화해주일, 평화통일주일 등 민족의 절기와 과제를 반영하여 주일예배를 드린다. 

 

(2) 교회의 민주화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그동안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던 한국사회는 각 방면에서 민주화가 급속히 진전되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한참 뒤처졌다. 몇몇 대형교회에서 문제시된 담임목사 세습 문제와 교회 재산 사유화 및 유용 문제가 이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평신도교회로 출발한 향린교회는 창립 때부터 교회 민주화에 힘써 왔는데, 시련기를 거치면서 교우들이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몇몇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첫째는 ‘목회위원회의 설치’요, 둘째는 ‘목회자 및 장로 임기제의 실시’가 그것이다.

 

향린교회가 소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다른 장로교회와 마찬가지로 목사와 소수의 장로로 구성된 당회에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이에 향린교회는 1994년 1월 당회와는 별도로 목회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교인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해 목회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 뒤 이 기구는 2003년 조헌정 제3대 담임목사의 부임 및 2005년 정관의 제정과 함께 목회운영위원회로 발전해 교회 운영의 각종 정책과 예결산 등의 권한을 갖고 당회와 병립하면서 향린 목회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한번 임직하면 정년(만 70세)까지 사실상 종신직이던 담임목사와 장로의 시무 연한을 임기제(각 7년과 6년)로 제한하고 그 신임을 물을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교회의 민주화는 제도적 장치만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를 갖고 있다 해도 교인들이 그 제도를 활용하지 못하거나 활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향린교회는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모든 교인에게 문호를 적극 개방하고 있다. 우선 향린교회에 새로 등록한 교인은 의무적으로 새교우 가입식을 거치게 한다. 이 자리에서 향린교회의 목회와 선교에 대해 동의하는 새교우는 선서를 하고 향린교회 정회원이 된다. 이 정회원은 공동의회 회원이 되며, 제직회 산하의 각 부‧위원회의 활동에 참여할 자격을 갖춘다. 향린교회 제직회 산하에는 9개의 부서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제직(장로, 권사, 집사)뿐 아니라 일반 평신도도 참여해 활동하고 있다. 

 

(3)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향린교회의 모든 특징을 한마디로 종합해 요약하라면 그것은 단연 ‘선교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열심히 선교하지만, 향린교회는 그 내용이 좀 색다르다. 우선 매년 전체 예산의 30% 이상을 선교비로 할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다만, 향린교회가 가진 역량의 한계상 모든 선교에 치중할 수 없어, 특정 분야에 치중해 왔는데 그 초점을 ‘민중과의 연대’에 두었다. 그 내용은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었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민중교회의 지원과 개척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뜻있는 신학도들 가운데 일부가 신학교 졸업 후 자신의 목회지로 한국사회의 모순이 응축된 민중현장을 택했다. 저들은 노동현장과 빈민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빼앗긴 권익을 찾아주는 일에 매달렸다. 향린교회는 당시 많은 교회가 꺼리던 민중교회 목회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87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27개 교회에 총 204,670,000원을 지원했다. 저들에 대한 지원은 단순한 재정지원에 그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선교부원들이 교회 또는 현장을 방문해 격려했으며, 또 민중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해 설교를 듣는 등 민중 현장과 유리되지 않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리고 1988년 9월 경기도 안산 지역에 민중교회인 배동교회를 개척하고, 후원회를 결성해 각종 지원을 하기도 했다.

 

② 외국인노동자를 위한 의료선교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사회에서는 외국인노동자의 인권 문제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대두했다. 한국 노동자들이 꺼리는 3D 업종의 인력 공백을 아시아의 여러 가난한 나라들에서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외국인노동자들이 메우고 있었는데, 저들은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때문에 임금 체불, 산업재해 등 온갖 고초를 겪고 있었다. 특히 의료보험이 없는 관계로 크고 작은 병으로 고생하는 저들을 돕기 위해 향린교회는 1996년 선교부 산하에 의사, 간호사, 약사,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의료선교위원회를 신설하고, 수년 동안 매주일 저들을 무료로 진료하는 일을 계속했다.

 

③ 농촌교회와의 자매결연과 유기농산물 직거래 운동

우루과이 라운드 이후 한국농촌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했다. 값싼 외국 농산물의 수입이 자유화되면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농촌경제가 삽시간에 무너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농민선교목회자연합회는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자매결연을 통해 농촌살리기 운동을 전개했는데, 1995년 5월 향린교회도 전북 완주의 들녘교회(구 금평교회)와 도농선교협력관계를 맺었다. 이는 〈교회갱신선언〉의 실현이기도 했다. 그 이후 향린교회 생명환경위원회는 들녘교회 교우들이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공급받아 교인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어려운 농촌교회를 돕고 또 저들에게 유기농법을 권유함으로써 생태계를 살리는 선교를 30년 동안 쉼 없이 전개하고 있다. 또한 1년에 한두 차례 교우들이 직접 들녘교회를 방문해 농촌 일손 돕기에 참여함으로써 저들의 유기농사를 돕고 있다. 이 선교협력 관계는 단순히 생산과 판매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교우 간의 교류로도 이어지고 있다. 

 

④ 통일선교와 인권선교

향린교회가 전개하고 있는 선교 가운데 통일선교와 인권선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모순의 근원에는 민족분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향린교회는 사회부 및 선교부 통일선교위원회를 통해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여 통일운동의 방향에 대해 탐구하고, 나아가 통일에 방해가 되는 제반 법률의 철폐와 이들 악법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중점적으로 전개한 사업은 ‘국가보안법 철폐운동’이었고, 2002년 7월 이후에는 ‘여중생 효순‧미선 양 압사사건에 대한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그뿐 아니라 2000년 이후 ‘용산 미군기지의 평택이전 반대’, ‘재능교육 노동자 지원’, ‘한미FTA 반대’, ‘쌍룡자동차 노동자 지원’ 등의 투쟁에 지속적이고도 조직적인 방식으로 결합해 힘을 보탰다. 

 

6. 창립 60주년 기념사업

 

향린교회는 이렇게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민족교회, 민주화된 교회, 선교하는 교회로서 다시 태어나고자 노력했다. 그런 가운데 2013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기념사업을 진행했다. 

 

(1) 섬돌향린교회의 분가

 

부목사였던 임보라 목사를 필두로 60여 명의 교우가 이 분가에 참여해 서울 마포 지역에 터전을 마련했다. 창립 60주년 기념교회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는 창립 40주년 기념교회였던 강남향린교회의 설립에 이은 또 하나의 향린교회의 탄생이었고, 강남향린교회가 창립 10주년에 분가한 들꽃향린교회를 포함하면 모두 4개 교회가 향린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 ‘사회선교센터 길목’의 설립

 

협동조합의 형태로 출범한 ‘사회선교센터 길목’은 교회가 직접 수행하기 쉽지 않은 각종 사회선교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현장 활동가와 그 가족들이 정신적, 관계적 스트레스로 인해 받는 많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심심 프로그램’과 청년들의 인문‧사회과학 서적 읽기를 지원하는 ‘청년 책읽기 사업’, 각종 강좌, 평화기행, 정오음악회 등을 통해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확장해 가고 있다. 

 

(3) 각종 기념출판물의 간행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향린 교우들의 증언을 모은 증언록 《향린 60년, 나는 이렇게 기억한다》, 창립 60주년 기념 교우 센서스 결과 및 분석 《향린, 우리는 누구인가》가 각각 비매품으로 발간됐다. 그런가 하면 향린의 목회를 소개하는 단행본 《자유인의 교회》(한울출판사>, 향린의 평신도 설교를 모은 단행본 《자유인의 하늘뜻펴기》(한울출판사)도 각각 발간됐다. 

 

(4) 〈향린교인 생활실천 다짐〉의 채택

 

그리고 그동안 주요 계기마다 채택되었던 〈교회갱신선언〉, 〈교회갱신과 사회선교 실천을 위한 제안(사회선교실천선언)〉 등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향린교인 생활실천 다짐〉을 60주년을 기해 채택했다. 그 뒤 예배 때마다 교우들이 그 〈다짐〉을 한 항목씩 함께 낭독하며 실천을 약속하고 있다. 

 

7. “새 술은 새 부대에”

 

창립 60주년 이후의 향린은 김희헌 제4대 담임목사(2017년), 한문덕 제5대 담임목사(2024년)의 연이은 부임과 광화문 시대의 개막(2023년)으로 대표된다. 특히 2013년(창립 60주년)부터 향린교회가 위치한 서울 중구 명동지역에 도시환경정비사업(일종의 재개발사업)이 시도되면서 이때로부터 2023년(창립 70주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신축 예배당을 지어 입당하기까지 10년이라는 기간은 향린의 새 시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중 남한-북한, 북한-미국의 잇단 정상회담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전망을 한껏 고조시키기도 했으나 2019년 하노이 북한-미국 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한반도는 한층 더 경색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이 시기에 생태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고조되어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 선교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했다. 즉, 당장 열매를 맺지는 못하더라도 ‘평화’와 ‘생명’이 향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선교의 새로운 가치라는 점에 대해서는 교인의 관점이 대개 일치했다. 

 

그 과정에 명동의 교회 부지가 매각되고 내수동의 새 터전이 마련되었으며, 새 터전에서의 문화재 발굴, 서울YWCA에서의 이른바 ‘광야 생활’ 등의 여러 어려운 조건을 헤치고 신축공사를 마무리해 마침내 2023년 6월 광화문 지역의 새 예배당에서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이는 향린교회 예배당의 위치로 살펴볼 때 제1기 남산 시대(1953~1959년), 제2기 남창동 시대(1959~1967년), 제3기 명동 시대(1968~2021년)에 이은 제4기 광화문 시대의 개막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의 선교를 추진할 전진기지로서 새 예배당이 마련되면서 향린의 발걸음도 한층 분주해졌다. 이 기간 중 명동 재개발사업, 교회 내부 각종 현안에 대한 대처방식 등을 둘러싸고 교우들 간에 이견이 생기고 일부 교우가 교회를 떠나는 등 예상치 못했던 각종 혼선 양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2023년 6월 새 예배당 입주와 2024년 11월 한문덕 담임목사의 취임을 계기로 급속하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특히 2024년 12월 뜻밖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에 뒤이은 탄핵 국면을 맞아 향린교회는 광화문의 새 예배당을 모든 시민단체의 결집체인 ‘비상행동’ 측에 회의 장소로 흔쾌히 제공하고 2025년 3~4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직전 20여 일 동안은 밤샘 시민들을 위한 쉼터로 내어줌으로써 ‘서울 도심지의 진보적 신앙의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향린의 교인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현존을 맞닥뜨리는 놀라운 경험도 할 수 있었다. 

 

8. 창립 70주년 기념사업과 미래선교위원회 횔동

 

창립 70주년(2023년)은 예배 모임조차 어렵던 코로나 대유행(2020~2022년)과 명동 예배당을 떠나 서울YWCA 강당을 빌려 예배 드리던 이른바 ‘광야 시기’(2021~2023년)를 거치며 주일예배 출석 교인이 100명 수준이던 시기에 맞았다. 그 무렵 새 교인의 유입은 더디고 교인의 고령화가 상당히 진행되는 등 전반적으로 교회 역량이 상당히 쪼그라든 상황이기도 했다. 창립 70주년 기념사업은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뎌 온 교우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새롭게 열어가야 할 광화문 시대를 준비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1) 기념표어 제정 등

 

먼저, 교인 공모와 투표를 통해 선정된 창립 70주년 기념표어 “작은 믿음 다시 모아 새로 심는 향린 70”으로 70년의 역사를 지닌 향린교회가 이제 새롭게 시작하자며 마음을 모았다. 또 어린 이부터 장년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우들이 다양한 팀을 구성해 출연한 ‘전교인 문화한마당’과 창립 70주년 축하 연극공연 ‘꽃들에게 희망을’을 통해 교인들이 서로 기쁨과 위로를 나눴고, 설문조사 ‘향린 창립 70주년 마음읽기 - 현실에 발을 딛고 내일을 보다’에서는 우리 교회와 교인들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바람직한 교회상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2) 세대잇기

 

이제 70~80대에 들어선 선배들의 신앙과 지혜를 후배들에게 전달하고, 세대 사이의 공감대를 넓히자는 취지로 이뤄진 ‘세대잇기’ 사업은 광화문 예배당에 새로 조성된 스튜디오에서 “청년신도가 묻고, 장년신도 답하”는 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됐다. 2025년까지 총 8회 영상으로 제작되어 교인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다.

 

(3) 국악찬송가 제3차 발간

 

향린교회 예배에서 사용하는 《국악찬송가》는 2003년 처음 제작되어 2008년 2차 발간되었고, 교회 외부에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좀 더 국악에 충실하고, 변화한 시대를 반영하는 찬송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국악찬송가 제3차 발간사업’이 추진되었다. 교인들에게 가사를 공모하고, 교회 안팎의 작곡자들에게 작곡을 의뢰하여 제작한 새로운 찬송 40여 곡과 기존 국악찬송에서 선정한 곡을 포함해 2024년 11월 새 국악찬송가를 발간했다.

 

(4) 〈향린공동체 생태정의 공동선언문〉의 채택

 

2024년 12월 향린공동체에 속한 네 교회는 공동 작성한 〈향린공동체 생태정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이에 대한 실천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점검할 것을 결의했다. 이는 〈교회갱신선언〉(창립 40주년), 〈향린교회 희년 통일선언서〉(창립 50주년), 〈사회선교실천선언〉(창립 60주년)의 맥을 잇는 것으로 인간과 인간 너머의 존재를 포함해 기후 약자에 더욱 가혹한 기후 위기에 맞서 생태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다짐을 담았다.

 

(5) 미래선교위원회 활동

 

향린교회는 명동에서 광화문으로 이사하면서 발생한 여유 자금으로 향린교회의 미래를 준비한다는 취지로 ‘미래선교위원회’를 구성했고(2020년), 생태문화시민을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 ‘생태문화학교’, 교회와 지역사회의 국악 배움터가 된 ‘향린국악학교’, 성서와 고고학, 성평등, 노동 등 주요 신학과 신앙의 문제를 다루는 유튜브 채널 ‘캡사이신학’, 정의·평화·생명의 내용을 담은 ‘성가 합창곡집’ 제작, 진보적 기독·시민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나눔사업 등을 진행했다.

 

9. 새로운 행진

 

향린교회는 ‘끊임없이 갱신하는 교회’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오늘 한국 땅에 향린교회를 왜 세우셨을지를 묻고, 하나님의 ‘바른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해 가고 있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비록 부족하지만 이 사회와 이 역사의 중요한 고비길마다 향린교회를 들어 당신의 도구로 써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오늘도 새로운 행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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