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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부활의 경계선 | 김희헌 | 2018-05-06

by 관리자 posted May 12, 2018 Views 26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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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5-06

부활의 경계선 (행 10:44-48, 요일 5:1-6, 요 15:9-17)

 

2018.06.06. 부활절 여섯 째 주일

 

  

 

[경계선 너머를 향한 신앙]

 

금년 부활절 기간에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읽으면서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자주 듣게 됩니다. 오늘은 ‘부활의 경계선’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일 청년여신도회가 교회 입구에 포스터를 한 장 붙였는데, 남북의 두 정상이 손을 잡고 휴전선을 넘는 사진 밑에 이런 문구를 써넣었어요. “우린 선을 넘었어요. 계속 사랑하게 해주세요.”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해볼 주제는 그것과 비슷합니다. 부활의 경계선을 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부활의 대척점에 있는 ‘십자가’에서 출발해보지요. 십자가는 자연적인 ‘죽음’(dying)보다는 사회적인 ‘죽임’(killing)과 연관된 상징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할 때, 개인적인 육체의 소생(resuscitation)보다는 사건으로서의 부활(resurrection)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에게 고인의 육체가 다시 소생할 것이라는 점을 납득시키는 것보다는, 죽었던 역사가 촛불집회와 남북대화를 통해서 되살아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 더 실감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생물학적인 죽음과 소생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지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의 무덤 안에 CCTV를 설치하고, 성금요일 밤부터 부활절 새벽까지 관찰한다면, 과연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이런 논쟁을 톰 라이트와 마커스 보그라는 두 신학자가 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 잘 알려진 신학자 톰 라이트는 그 CCTV에서 죽은 예수의 몸이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역사적 예수 연구자로 알려진 마커스 보그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의미], 202-3)

 

여러분은 누구의 입장을 지지하십니까? 저는 마커스 보그의 입장에 더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한 때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이라는 종말론적 축복이 사체소생 교리를 믿는 마음에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죽음의 경계선 너머로 나아가는 ‘생동하는 신앙’입니다. 

 

그 동안 교회는 부활에 관한 교조적인 가르침만을 반복하면서 신앙인들의 믿음을 농단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믿으면 저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타계주의적인 교리로써 기독교 신앙을 호도하고, 현재의 삶에서는 자아도취의 종교가 되어서 영적인 오만과 태만을 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보다 본질적인 가르침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이란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생물학적 불멸’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는 부활이 죽고 난 다음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겠지만, 실제로는 죽기 전에 경험되어지는 무엇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 있을 부활은 창조주의 몫이라 하겠지만, 죽기 전에 있는 부활의 삶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이 말했듯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해가지고 죽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는 씨알이라야 산다” [저작집], 8:78) 

 

우리 민족은 지금, 65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전협정 체제의 경계선을 넘는 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동일한 역사를 가진 우리 교회는 공동체 안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고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을 위해서는 죽음의 질서와 생명의 질서를 가르는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지 주목하고, 그 경계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이 어떻게 놓일 것인지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경계선 너머 부활의 삶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성령, 모두에게 부어지는 선물 / 사도행전 10:44-48]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의 집에서 생긴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상대방을 찾게 됩니다. 로마 군대의 장교였던 고넬료는 식민지 땅 가난한 어부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모셔 와서, 가족과 이웃들을 초대하여 그의 설교를 듣습니다. 

 

사도행전 2장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유대인들의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면, 오늘 본문은 고넬료의 집에서 생긴 이방인들의 성령강림 사건을 말합니다. 44절을 보면, “베드로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성령이 ‘모든’(pantas) 사람에게 내렸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는 내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이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고 만 것입니다. 이방인(gentile)이라기보다는 모든 민족(ethnẽ)에게 내렸다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랍니다. 그 하나는 다른 민족에게 성령이 선물(dórea)로서 부어졌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그들이 방언(glóssa)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한 사실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라 할례를 한 그들은 충격을 받고 놀랍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자신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졌고,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놀람’(astonished)의 경험이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놀람을 경험한 그들은 존재의 각성을 체험하고 자신들의 폐쇄성을 극복하게 됩니다. ‘놀랐다’는 말 자체가 재미있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놀라다’는 말은 ‘엑시스테미’(ἐξίστημι)인데, 이 말은 ek라는 접두사(out of)와 histēmi라는 동사(to stand)가 결합한 말입니다. 그 뜻은 ‘고정된 입장에서 벗어나다’(to remove from a fixed position)입니다. ‘놀람’은 존재를 흔들어서 그 존재를 고정시켜온 낡은 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게 ‘놀람’의 경험을 통해서 생명은 자라납니다. 

 

어린이들이 보여주는 생명의 진실은 바로 ‘놀람’에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놀람은 어린이의 특징이요, 놀람을 통해서 어린이는 세계를 배우고 자라납니다. 

 

반대로 ‘놀람’을 경험하지 못하는 정신은 실상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놀람’의 감각을 잃은 이 정신은 겉으로는 마치 모든 진리를 소유한 것처럼 자족하는 모습을 띠지만, 실상은 새로운 사건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능력을 잃은 노쇠한 정신입니다. 역사가 꿈틀거리며 만들어내는 수많은 만남에서 ‘놀람’을 느끼지 못하는 정신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놀람’에 있습니다. 모든 새로운 깨달음은 ‘놀람’에서 기인하고, 생명의 성장도 ‘놀람’에서 촉발됩니다. 권력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고해도, 민중들의 삶에 담긴 신성한 생명력은 그것을 일시에 무너뜨립니다. 놀라움 가운데 이 사실을 목도한 역사만이 거침없는 전진을 하게 됩니다. 

 

남과 북이 증오의 이데올로기에 시달리며 긴 세월을 보냈지만, 그 세월을 견뎌온 삶에 신성하고도 불가사의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점입니다. 자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밖의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것이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의 집에서 ‘놀람’을 경험한 베드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 깨달음이 다음과 같이 표현됩니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사도행전은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민족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이제까지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온 타자의 마음속에도 진리를 향한 선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음에 성령이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라고 하는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이 불편한 동거가 아니라, 한 성령을 받고, 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선물로 부음 받고 함께 부활의 경계선을 통과하고 있음을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기 율법의 경계선 너머로 나가려는 삶의 신성한 충동을 느끼면서, 현실의 답보상태를 깨뜨리는 사도적 용기를 발휘했다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진면모를 보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믿음을 실행하는 사랑 / 요한일서 5장 1-6절]

 

오늘 요한일서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독특한 사유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출처를 둔 믿음, 바로 그 믿음을 세상에 대한 승리’로 보는 기독교의 사유방식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이 말은 자주 지배자의 담론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오늘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그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에 관한 성서의 이해입니다. 

 

4절에서는 ‘이기다’(nikaō)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도대체 무엇인가요? 분명히 그것은 돈과 권력을 향한 경쟁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율법의 질서로부터의 해방’ 또는 ‘죽음의 세계에서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배타적인 교리에 갇혀서 타인을 저주하는 종교는 세상을 이긴 종교라기보다는 세상의 율법에 굴복한 종교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종교, 즉 율법에서 비롯된 억압과 편견을 떨쳐내고, 화해와 해방의 세계로 나아가는 종교를 말합니다. 성서는 그것이 부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의 종교가 기초하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의 종교를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믿음’은 이성이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이성의 활동을 끝까지 추적한 최초의 사람 중에 독일 계몽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있습니다. 그는 이성에 대한 신뢰가 절정에 이른 시대에 이성의 자기모순과 한계를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이 분석과 판단을 종합한 끝에 만들어낸 산물이 결국 ‘이율배반’(antinomy)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진리는 이성의 추론으로는 얻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 [순수이성비판]의 2판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믿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지식을 부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고백은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지혜를 제공합니다. 만일 우리가 해방의 공동체를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이성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기원을 둔 믿음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믿음은 세계를 살아가는 일종의 통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통찰은 논리적인 지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생의 신성함을 꿰뚫어보는 직관에 기초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믿음이 통찰력을 갖고 있다고 하여도, 믿음만으로는 율법의 경계선을 넘는 해방을 우리 삶에 실현시키지 못합니다. 제각기 다른 율법으로 인해 갈라진 이 세계가 마침내 해방과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을 아직 잃지 않았다면,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지만, 그 해방을 실행하도록 힘을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A. 바디우 [사도바울], 176)

 

오늘 본문 2절과 3절을 보면, 믿음과 사랑이 서로 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며, 바로 그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원융회통(圓融會通)의 정신이 나옵니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에 있습니다 (갈 5:6). 

 

  

 

[사랑을 낳는 공간,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 요한복음 15장 9-17절]

 

오늘 요한복음 본문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다시 강조합니다. “네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을 강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대해서 의심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랑만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찬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이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의심합니다. 그런 대립 가운데에서 사랑의 언어는 시끄럽습니다. 공동체는 왜 이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맺는 관계방식에 대해서 영감을 준 사람 가운데, 마틴 부버라고 하는 유대인 종교철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거의 백 년 전에 쓴 [나와 너, Ich und Du]라는 책은 우리들이 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맺는 관계방식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나와 너, I-You>의 관계요,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 I-It>의 관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가 전(全) 인격적인 존재로서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나의 생각이나 필요에 의해서 상대방을 짜 맞추는 관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두 사람이 서로의 능동적인 주체성을 경험하면서 만나는 것이라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상대방을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객체로 여기며 만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신이든지 간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자신만의 고유함을 가진 능동적 존재인 ‘너’(You)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날 때, ‘나와 너’ 사이에서 ‘사건’이 생겨납니다. 사랑의 사건입니다. 

 

요즘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대한항공 조씨 일가족의 갑질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방을 인격적 주체인 ‘너’(You)로 대하지 않고, 자기 재산이나 불려주는 물건 취급을 하면, 관계는 파괴되고,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부버가 전하고자 하는 관계의 진실은 더 깊은 데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방을 진실하게 대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인격적인 주체인 ‘너’로 경험하지 못하고, 단지 나에게 필요한 ‘그것’으로 경험하게 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버는 그 이유를 지식과 진리에 대한 열정에 얽혀 있는 운명적(실존적) 한계에서 찾습니다. 

 

다시 말해서 ‘너’에 대한 나의 지식 자체가 이미 ‘너’를 죽은 ‘그것’으로 뒤바꾼다는 것입니다. 네가 언제 무슨 말을 했다거나, 네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다는 식으로 ‘너’에 대한 경험이 시간과 공간에서 표현될 때, 거기에는 생생한 ‘너’가 사라지고, 박제화 된 ‘그것’만 남게 됩니다.

 

따라서 <나와 너>의 온전한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은 ‘너’에 대한 나의 말을 거둬들이고, ‘너’ 안에 본래 그대로 있는 것,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것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신에 대한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때, 그분은 나의 필요에 맞는 그 무엇(It)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뒤흔드는 ‘영원한 너’(eternal You)로 경험될 것입니다. 이 경험은 ‘신비로운 떨림’ (mysterium tremendum)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애매모호해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명백함 가운데 경험되는 신비입니다. (Martin Buber, I and Thou, 127) 

 

이런 경험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자연과의 교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자매와의 만남에서 ‘신비로운 떨림’을 경험할 때, 그 만남이 ‘영원한 너’인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부버는 그것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요한의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의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가지로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9-10절)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신앙의 과제를 이루게 합니다. 증오와 대립의 경계선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의 계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큰 도전은 사랑입니다. 온전한 사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부활의 경계선을 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 부어지는 하늘의 선물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잠시 침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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