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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불편한 포도주를 마시라 | 장동원 조은화 | 2018-04-29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26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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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4-29

불편한 포도주를 마시라

 

요한 8:1-8; 요일 4:16-18; 사도 8:26-38; 시편 22:25-31

 

생활목회자/교회목회자 공동하늘뜻펴기(장동원 교우 / 조은화 목사)

 

[장동원 교우]

 

안녕하십니까. 먼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전 성가대 테너/현 청소년부 교사/차기 5월 청년 신도회 회장 장동원 인사드립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을 6년전 에는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그 편협하고 폭력적인 집단에서,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구요? 예수쟁이 집단이요?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제가 예수쟁이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우선 저에 대해서 궁금해 하실 분이 많으실 것 같아서 신앙고백을 먼저 하겠습니다. 

 

때는 6년 전으로 가겠습니다. 2012년 8월, 한국에서 마냥 3포 세대, 5포 세대를 외치며, 자조하며, 인생을 포기할까 고민하던 그 청년은 도피성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갑니다. 떠난 지 4개월 만에 박근혜가 당선되었습니다. 하... 그 때의 절망감은... 다들 공감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때 이민을 고민했었습니다. 저 또한 한국에 돌아가지 말자고 다짐했었습니다. 우선 호주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영어공부를 위해 현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환대, 평화로운 분위기, 아름다운 찬양 소리에 매료되어서 꾸준히 다녔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역시나 어려운 것이더군요. 타지에서의 외로움과 공허감이 밀려왔지만, 한국인을 멀리해야 성공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호주 친구를 알게 되어서 룸메이트가 되었고, 절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호주 생활 말미에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그 절친의 배신, 그로 인한 강박과 증오와 혐오가 절 지배했습니다. 그 혐오라는 씨앗은 제 몸 안에서 꽃을 피웠고 급기야 저를 갉아먹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서 마태복음서 6장 14절을 보았습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주면, 너희 주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서 5장을 보았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기적인 인간 본성을 가진 우리에게 얼마나 와 닿지 않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원수를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순간, 증오와 혐오는 눈 녹듯 사라졌고, 진정 자유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타적인 마음은 진정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그 때 깨달았습니다. 2014년 3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이타적으로 살겠다는 저의 첫 번째 고백이자 회심이었습니다. 

 

2014년 4월 한국 귀국 전 우연히 페이스북으로 민중 신학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백창욱 목사님의 「유배지에서 예수읽기」라는 책이었는데요. 저는 그 책을 구하기 위해 3만원에 가까운 택배비를 지불하였습니다. 태평양 바다를 건넌 그 책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는 평등 사회를 복구하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들을 유배지에서 해방시켰다. 그 이야기가 바로 복음서 말씀이다.” 시간이 지나자 그 충격은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기독교가 기득권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과 소외된 자를 위한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백창욱 목사님을 뵈러 대구 새민족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서 공부를 하며 저의 신학적 가치관이 확립되었습니다. 그 이후 취업을 하였고 울산 새생명 교회를 거쳐, 마침내 향린에 오게 되었습니다. 향린과의 만남은 필연일지도 모르는 이 수많은 우연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신기하고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두 번째 회심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올 3월 초, 3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롯데마트에서 상품기획을 하였습니다. 아주 운이 좋게도 인격적으로, 업무적으로 훌륭한 선배를 만나 재미있게 일을 하였습니다. 어디서부터 어긋났을까요? 팀장, 부문장 등 윗사람들의 부당한 요구는 하루, 하루 도가 지나쳐만 갔습니다. 추악한 부패정권이 무너졌고, 공정거래위원장도 바뀌었는데, 그리고 엊그제 남북이 만나 종전선언을 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자본주의 절대 권력인 대기업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어려움 속에서 그 선배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였죠. “너무 힘들어요. 왜 이렇게 부당한 일을 해야 되죠? 어떻게 하면 되죠?” 그 선배는 제게 말했습니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 나만 믿고 해라. 내가 다 커버해주겠다.” 그러나, 그는 마치 십자가를 짊어지듯이 모든 책임과 부담을 짊어지고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부당한 일 하는 것을 양심상 꺼려하던 저를 다독여 주고 격려해주던 그 선배는 과로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도 컸습니다. 정말이지 그 곳은 마음대로 아플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유인력, 대체인력을 최소한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이었죠. 한 사람이 빠지면 업무가 마비되는 수준이었으므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자본주의의 노예들은 아파도 쉴 수 없었습니다. 그 곳은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곳, 인간을 하나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곳, 자본을 최고의 유일신으로 모시는 곳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며, 남은 생이라도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자고 결심하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신학 공부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진짜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늘 뜻 펴기를 제안 받고 말씀 본문을 살펴보았는데, 요한복음서의 포도나무 비유가 저의 고민을 해결해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5:4-8을 보겠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 포도나무 비유는 예수와 제자의 최후의 만찬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성만찬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신앙인들은 가지들이며 스스로 포도열매를 맺어 그 열매로부터 포도주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열매도 없고, 포도주도 없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으므로 그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포도나무의 열매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과 다가오는 시대의 삶의 선취에 동참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제자들 간의 상호내주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팩트 체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즘 유행어로 팩트 폭격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사실을 여과 없이 무차별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팩트 폭격이 있을 예정이오니, 조금 불편하셔도 자리에서 떠나지 마시고, 하늘뜻펴기가 끝날 때까지 잘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불편함을 극복하는 것이 변화의 출발점이요, 진보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사례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올해 초 청소년부 교사로 처음 갔을 때 상당히 놀랐었습니다. 푸른이들의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이 엄청나게 뛰어났습니다. ‘아 또 한 번 시대가 많이 흘렀구나. 나 또한 옛날 사람 아재구나.’ 라고 반성을 하였습니다. 푸른이들은 이 공동체 내 완전한 평등을 원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사들은 푸른이들을 하나의 주체적인 인격체로 존중하며, 누구누구 님 이라고 존댓말을 합니다. 그들도 저희를 선생님이 아닌 동원님으로 부릅니다. 여기서 약간 불편 하신 분 계시죠? 하지만 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층구조체제의 위계가 걷혔고, 자유함을 느꼈으며, 그 안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동생들에게 반말을 할 때가 있는데요. 자기성찰을 해보았습니다. 말을 편하게 하는 것, 즉 반말을 하는 것은 ‘나이’라는 태생적 기득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친교와 공감’이란 후천적 노력과 경험에 의해서 행해져야만 한다 는 반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 제안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향린 공동체 안에 어떠한 위계질서도 거부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모두 평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상대방의 각기 다른 감수성과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던진 질문과 관심, 지시와 강요는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여성이든, 청년이든, 청소년이든, 자기보다 지위가 낮든, 나이가 어리든, 항상 언행을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꼰대가 되지 않는 길이 아닐까요? 조금 불편하신가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기득권자들 앞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분노하고, 절규하고 외칩니다. 당연히 기득권자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들은 그 불편함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살아왔습니다. 불편함을 느끼는 만큼 우리는 기득권자입니다. ‘여성에게 남성은, 장애인에게 비장애인은, 성소수자에게 비성소수자는, 청년에게 중.장년은, 노동자에게 자본가는.’ 저 또한 누군가에게는 기득권자입니다. 약자들의 외침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때론 불편하다는 것이 ‘내가 이토록 큰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왔고, 누군가에게 큰 고통이었구나’ 하고 많은 반성을 하게 합니다. 

 

세상은 교회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미투 운동’이란 나비의 날갯짓은 ‘페미니즘’이란 혁명의 바람을 불러왔습니다. 이 나비효과! 그 동안 소외 받고 있던 여성들의 적극적 목소리가 하나의 혁명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생물학적, 사회학적으로 규정된 남성으로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어떤 여성에게는 폭력적이었을 수도 있구나.’ 하고 많은 반성을 하였습니다. 태생적 기득권, 내려놓기 힘들지만 마음껏 불편하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새로운 발전을 위해서 나아가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읽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득권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전심으로 회개할 때 말이죠. 가해자의 영성을 완전히 버렸을 때 피해자의 영성을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포도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불편해지는 것은 마냥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수반합니다. 저도 있는 것을 내려놓고자 할 때 마다 두렵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성서를 읽고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뜻은 우리가 함께 포도나무 가지처럼 연대하여 멋진 포도나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불편함과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와 함께 매 순간 매 순간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불편함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로움은 거짓 평화일 수 있습니다. 이는 자기 십자가를 거부하고 부활신앙에 참여하지 않는 방관자로, 피 억압층인 이들과 유리되어 상대적 기득권을 향유하며 거짓평화에 도취될 수 있습니다. 불편한 포도주를 거부한 대제사장과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불편함을 이겨낸 제자들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합니다. 불편함으로 인해 절망하고 좌절하며, 번 아웃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 안에서 여유 있고 행복하며 생기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제자 사이의 연합입니다. 즉, 이 불편함과 행복의 공존 이것은 그리스도교 부활신앙의 역설입니다. 고난 받는 민중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 즉, 불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관한 신앙고백과 유리될 수 없습니다. 오직 야훼 아래서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였던 제 1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처럼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동력을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편한 포도주의 역설입니다. 향린 교우 여러분 이제 저와 함께 공동체를 위해 나이, 사회적 위치, 직분을 내려놓고 불편한 포도주를 마시겠습니까? 포도나무에 달려있다는 것은 그래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포도주를 마시며 하나님 나라를 함께 건설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이는 저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조은화 목사]

 

방금 전 하늘뜻을 펼쳐주신 장동원 교우의 내용처럼 우리가 불편하지만 진정 예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요한공동체는 초기 회당 내에서 활동하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주후 80년 쯤 유대전쟁으로 무너진 유대교는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자리를 정비하고자 고강도 유대주의 운동을 벌입니다. 바로 이때 요한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던 회당 내의 예수를 따르던 집단이 추방당했습니다. 회당으로부터 떨어진 공동체는 삶의 기반을 잃어버리고 정착할 곳이 없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은 요한공동체가 새로운 공동체로 움트게 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했습니다.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한 다른 예수공동체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신학의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요한공동체가 경계했던 것은 유대교를 모방하여 발전하려는 주류 사도계 교회들의 예전화 제도화 하려는 추세였습니다. 특히 당시 주류 그리스도교 운동은 로마제국적 영웅주의나 유대 메시아주의를 닮아가려고 했는데, 요한공동체는 이것들을 비판하면서, 권력을 갖고자 하는 본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고자, ‘자발적 소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하기에 요한공동체는 불의한 사회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억압당하는 백성을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세상의 기득권자들에게는 무척 불편한 것이었기에, 요한공동체를 억압하고 해체하려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떠난 뒤 제자들이 세상의 증오대상이 되어 박해당하고 추방당하기까지 했던 그들의 경험을 반영합니다. 기존체제로부터 추방된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면서 찾게 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함께하기”였습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공동체가 서로의 양식이 되어 함께 가는 것, 이것이 오늘의 포도나무가지 이야기 안에 스며있습니다. 

 

주어진 요한복음서 구절 중 2절에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는 어찌보면 “잘리고 싶지 않으면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라버리시고’의 의미로 해석한 airo 동사를 ‘들어 올려 돌보아 주신다’의 의미를 살려 해석할 경우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만 열매 맺지 못한 가지는 인정사정 없이 잘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들어올려 주신다. 그리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은 가지는 농부가 가지치기를 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한다. 그런데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농부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분과 수분을 나무에서 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포도나무 가지 비유는 공동체가 괴롭고 힘들다 하더라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와 연결선상에서 “내안에 머물라.”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인데, 모두를 사랑할 줄 아는 힘, 특히 우리의 약한 이웃을 사랑하는 힘을 이야기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막연하고 추상적이거나 좋은게 좋은거라며 그냥 덮어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함께할 수 있는 용기]

 

오늘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가고 있는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현존하는 하나님을 말씀하시며 악이 득세하고 선이 패배하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습니다. “신의 부정은 전능한 신을 전제한 데서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전능한 신은 적어도 역사의 현장에는 있지 않다. 그런뜻에서 현대는 무신론의 시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서는 전능의 신을 역설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무능을 강조한다. 아니, 신 자신이 그의 전능을 거부한다. 이스라엘의 야훼는 그의 선민과의 계약과 약속을 서슴없이 파기한다. 분노하고 보복하고 배신한다. 사람의 창조마저 후회한다. 한마디로 부조리의 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은 역사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사랑하고 화내고 행동하는 더불어의 신임을 반증한다. 이는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사람과 더불어 수난할 줄 모르는 신을,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들지 않는다. 여기에서 비로소 신은 ‘현존하는 하나님’으로 표상된다. 그것은 신의 자기 전능의 포기이다. 그래서 자기를 버리는 전능이라는 역설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함께하는 현존의 신에 대한 확신이다. 여기에 사람이 수난할 수 있는 용기와 보람의 근거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홍창의 장로님께서 2013년 90세를 맞이하면서 내신 기념책, 「마음의 고향」에 나와 있는 한 구절을 담아봅니다. “문제는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도전하고 있는 무신론자들의 부르짖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신이 자신 속에서 죽어있다는 데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분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 안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의 권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약함과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낸다. 한 인간이 숨어 계시는 하나님과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내가 이제 주님을 떠나서 어디로 가오리까?’ 라고 고백을 하게 된다. 그 고백이 바로 신앙이다.”

 

교회공동체는 제도가 아니라,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께서는 함께하는 이들을 위해 당신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행동에 기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머문다는 것은 이것 아닐까요? 내가 수난할 수 있는 용기! 약자 이들의 편이 되어 권력과 기득권에 저항할 수 있는 힘, 그러면서 돌보고 만나고 내려놓는 힘입니다.

 

[평화의 길, 통일의 길]

 

지난 금요일 3차 정상회담으로 가슴 뛰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분사분계선 넘기 힘든 높이도 아닌데 그곳을 넘어오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나하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이 손잡고 남북을 넘나드는 장면은 이게 꿈인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가진 이작은 나라가 세계를 평화의 길로 이끌 수 있을 것 이라는 믿음이 다시금 생기는 시점이었습니다. 정상회담에서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는 한 마디가 생겼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이 저 멀리 평양에서부터 냉면을 가져왔다고 말했다가 다시, 김여정 제1부부장을 향해 말한 “멀다고 말하면 안되갔구나!!”입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리 있는 이중성을 가진 말로,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한마디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의 자리를 조금씩 내려놓고, 결단한 이번 회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이 우리 자리에서 함께 머문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새겨봅니다. 생명을 내놓기까지 억압의 구조 속에서 약한 이들과의 끈을 놓지 않고 평화를 이루기간 주님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편한 길이 아니었음을 기억합니다. 함께 붙어있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서로의 가장 약함을 볼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겠습니다. 결국 공동체와 함께 하는 사랑이란 우리 각자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약한 이들과 긴밀히 연대하는 것임을 마음에 담아 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보냄의 말씀] 

 

그리스도는 이 지상에서는 그대 말고는 아무도 없도다.

그대의 손 외에는 어떤 손도 그대의 발 외에는 어떤 발도

가지고 있지 않도다.

그대의 눈은 이 세계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내다봐야 할 눈이로다.

그대의 발은 선을 행하러 다녀야 할 발이로다.

그대의 손은 지금 축복해야 할 손이로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 명상)

평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오늘 우리의 가진 자리를 내려놓고 약한 이들과 함께 서는 힘! 

그것은 세상을 움직일 것입니다. 나와 당신이 만나 이루는 사랑의 길을 오늘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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