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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나를 따라오라 | 김희헌 | 2018-03-18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5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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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3-18

나를 따라오라 (렘 31:31-34, 히 5:5-10, 요 12:20-33)

 

2018.03.18. 사순절 다섯째 주일

 

  

 

지난 주일에는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다녀왔습니다. 그 기간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으며, 미투(me too) 운동이 우리 사회에 문화혁명처럼 정착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5일 대북특사 파견과 이어진 미국 대통령 면담을 통해서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요. 앞으로 계획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은 분단 칠십여 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이것은 우연히 온 ‘기회’라기보다는 오랜 노력을 통해서 거두게 된 평화의 ‘열매’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길었던 분단체제가 한꺼번에 뒤바뀌지는 않겠지만, 남북 간의 반목이 해소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되도록 모두가 힘써야 될 때라고 생각됩니다. 평화의 열매를 맛볼 줄 몰랐던 우리 민족의 심령에 성령께서 꿈과 상상력을 부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한편, 성폭력 피해사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미투운동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해자에 대한 고발에 머물지 않고, 가부장적인 문화에 담긴 폭력적인 관습과 가치관에 대한 전체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익숙한 질서가 바로 우리가 걷어치워야 할 체제였음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이른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역사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다가오는 시대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함께 고민하고 준비해가야 되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사회적인 변화를 믿음의 눈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가, ‘나를 따라오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그 말씀을 분별하며 우리의 길을 열어갈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안고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인 변화에 따른 앞으로의 신앙적 과제를 차분히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열린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대회 내용을 소개하며, 세계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대회, 아루샤 대회의 의미]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열린 이번 선교대회에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분과인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위원회(CWME)’가 주관해온 국제대회로서,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과 정교회까지 교단대표와 관계자들이 천 명 이상 참가했습니다. 대회 주제는 “성령 안에서 활동합시다. 우리는 변혁를 일으키는 제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Moving in the Spirit: Called to Transforming Discipleship). 이 주제에서 방점은 성령, 제자, 변혁, 부름 받음에 있다고 봅니다. 

 

60년 만에 아프리카에서 선교대회를 갖게 된 것에는 그 대륙의 역사와 현실이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를 선교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 있다고 봅니다. 아프리카는 빈곤과 기아와 불평등만이 아니라, 종교 갈등과 부족 간의 폭력 문제, 환경과 기후 문제, 인간의 존엄성과 성정의 문제, 망명과 이주민, 인신매매, 건강과 교육, 전쟁과 장애 문제 등 인류의 고통이 중첩된 아픔과 희망의 공간입니다. 

 

이번에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대회가 열린 것은 그곳이 가진 역사적 상징성 때문입니다. 1967년에 탄자니아 정부가 인간의 존엄성과 인류 공동번영의 가치를 중시하는 ‘아프리카 사회주의’라는 정책을 공표했습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인권을 옹호하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1994년에 르완다 내전에서 발생한 집단학살을 판결하는 사법기구(국제전범재판소)가 아루샤에 설립되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여섯 개 국가로 이뤄진 동아프리카공동체의 본부가 이 도시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교대회를 연 것은 참혹한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과 상상력을 품고 나아가는 그 대륙의 꿈을 세계교회가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 선교대회를 주관한 ‘세계선교와복음전도위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라는 큰 틀 안에서 한 분과를 이루고 있지만, 그 흐름은 70년의 역사를 가진 WCC보다도 오래된 전통을 있습니다. 그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9세기 말에 기독교의 선교확장이 교파경쟁으로 과열되어가자, 세계교회는 공동으로 선교협력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실이 1910년 스코틀랜드에서 열린 에딘버러 대회입니다. 160여개의 선교단체를 대표한 1,400명이 모여 대회를 치른 이후, 지역과 교단을 대표하는 방식으로 새롭게 발족된 단체가 ‘국제선교협의회’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인데, 이 단체가 나중에 WCC에 합류하여 현재의 이름(‘세계선교와복음전도위원회’)을 갖게 됩니다. 

 

본래 WCC는 IMC와는 다른 전통을 가진 또 다른 두 개의 운동이 통합된 조직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1차 세계대전의 참상 속에서 교회가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각성의 결과로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생겨난 ‘삶과 실천’(Life and Work) 운동입니다. 다른 하나는 에딘버러대회 이후 세계교회의 일치를 향한 과제를 안고 1927년에 로잔에서 발족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입니다. 이 두 운동이 합류하여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WCC가 결성되었습니다. 

 

WCC가 명실 공히 세계교회를 대변할 수 있게 된 계기는 1961년 뉴델리에서 개최된 3차 총회에 ‘국제선교협의회’(IMC)가 합류하고 나서부터입니다. ‘국제선교협의회’가 WCC 안에서 ‘세계선교와 복음전도위원회(CWME)’라는 이름으로 정착함으로써, WCC는 ‘교회연합’와 “선교협력”이라는 에큐메니칼 교회운동의 포괄적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CWME는 WCC 양대 총회 사이에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면서 세계교회의 선교협력 운동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번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열린 대회는 1910년에 열린 에딘버러 대회부터 계산하면 제14차 대회가 됩니다.

 

이번 아루샤 선교대회는 지난 2013년 부산총회를 맞아 채택된 선교문서(“함께 생명을 향하여: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의 선교와 복음전도”)의 정신을 구체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가 가진 가장 대담한 정신은 선교의 방향을 거꾸로 뒤집은 것에 있습니다. “이제까지 기독교 선교가 강자들이 주도하고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진행되는 선교였다면, 앞으로의 선교는 거꾸로 진행되어야만 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Resource Book, 32). 

 

말씀드린 대로, 이번 선교대회의 핵심주제는 ‘변혁적인 제자도’입니다. 저는 이번 대회 기간 동안,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 나오는 ‘나를 섬기려거든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입니다. 

 

선교대회 기간 동안 앞으로 세계교회의 선교방향을 어떻게 잡을 것인지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주제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날의 ‘복음전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과거에 서구의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제국주의적인 방식을 가졌다면, 그 해악을 극복한 ‘예언적인 복음전도’(prophetic evangelism)를 어떻게 전개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적인’ 복음전도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먼저 해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선교역량을 어떻게 구성(formation)할 것인가 문제입니다.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 전파된 번영신학이 스스로 자족하며 소비하는 신앙을 남겼다면, 변혁적인 선교를 가능케 할 동력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느냐는 것이 고민의 지점입니다. 

 

셋째는 주변부로 밀려난 빈자와 약자들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이 ‘주체’가 되는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를 어떻게 가능케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를 닮아야 가능한 것이요, 교회의 활동이 그리스도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묶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신앙인들이 계속해서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오늘은 이 주제를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 주어진 성경본문의 교훈을 따라 생각해보겠습니다. 

 

  

 

[전환기에 필요한 새로운 언약 / 예레미야 31장 31-34절]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은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매개로 맺어진 히브리들의 옛 언약은 예레미야의 시대에 와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정신이 가나안의 풍요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왕조의 권력을 지탱하는 성전종교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새로운 바벨론 제국의 침입 앞에서 민족의 파멸이 눈앞에 닥친 역사적 전환기에 예레미야는 히브리들의 옛 꿈은 이미 깨졌고,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역시 파괴되었음을 느낍니다. 한 때 조상들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하나님의 언약, 그것이 이제는 무용지물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격변기에, 생동하는 양심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로운 언약이 세워질 수 있는지 예레미야는 고민합니다. 

 

33절에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나는 나의 율법(torah)을 그들의 가슴 속(midst)에 넣어 주며,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재인식입니다. 옛 체제와 질서를 지탱시키는 율법에 대한 충실이 아니라, 다가오는 새 시대를 맞고 견딜 수 있는 살아있는 영혼에 새겨질 말씀에 관한 증언입니다. 사람을 다시 노예로 만드는 언약이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를 새로운 주체로서 맞을 수 있도록 이끄는 생동하는 언약에 관한 증언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바빌론처럼, 권력과 풍요를 좇는 오늘의 제국은 새로운 아바타를 구성하여 자신들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은 변질된 율법에 기초한 거짓된 언약입니다. 자본과 시장의 탐욕,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충동, 근본주의적 분노와 무지에 뒤섞인 종교적 약속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칠십여 년의 분단체제 속에서 복음의 변질을 경험해왔습니다. 주변 제국의 힘의 논리에 굴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허락하는 자유정신을 잃어왔다면, 이제는 자유인의 양심에 기록될 새로운 언약에 관한 예레미야의 증언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향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것이요, 해방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자, 우리 시대에 예수의 참된 제자로서 사는 길을 진지하게 묻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들려준 제자의 길 / 요한복음 12장 20-33절]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고민 어린 말씀을 합니다. (27-28절)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의 언어’를 들려줍니다. 그가 여기서 들려주는 언어는 ‘입술의 현혹’이 아니라 ‘마음의 갈망’입니다. 그의 언어는 고난을 앞두고도 한결같은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빚어진 것이요, 하나님을 향해 온전히 열린 영혼이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썩어가는 한 알의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영생에 이르는 참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 이 말씀이 입술의 언어가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서 들려질 때,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호소가 되며, 얼마나 위대한 약속이 되는지를 우리는 압니다. 그것이 예수운동을 움직여온 담백한 진실입니다. 

 

자족적인 소비종교에 녹아버리지 않고 예수의 제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equipped) 사람이 그립습니다. 그에게는 제자로서 부름 받았다는 감각, 보냄을 받았다는 감각, 성령께서 힘주심을 느끼는 감각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Christ-centered)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영적 분별력일 것입니다. 

 

이번 선교대회의 둘째 날 아침 성경공부에서 배운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연결성’(Christ-connectedness)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모두를 연결시켜 준다는 사실(Christ-connectedness)을 느끼는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느끼는 ‘공동체의 감각’이 변혁적인 선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요 17:21)

 

  

 

[Christ-connectedness in deep listening / 히브리서 5장 5-10절]

 

오늘 히브리서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걸은 길입니다.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세계교회가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주체가 되는 선교(mission from the margins)를 전개하려고 하는 까닭은 거기에 예수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발견’이나 ‘자기계발’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채우려는 욕망입니다. 그리스도의 길은 반대로 자신을 비우는 길(kenotic engagement)입니다. 이 자기 비움은 제 살을 깎는 고행이 아니라 세계를 깊이 듣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적대감을 경험하면 파멸되고 맙니다. 반대로 구원의 길은 이웃과 세계를 깊이 들음으로써 열립니다. 

 

이번 선교대회 자료집을 읽다가 발견한 시를 한 편 읽어 드리겠습니다. 제목은 ‘invisibility’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보이지 않는 여인이랍니다.

당신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지요.

만일 당신이 일찍 나온다면 나를 볼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지요.

나도 내 자신이 거울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낀답니다.

나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항상 노력하고 있답니다.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나는 춥고 눈이 많은 이 도시를 찾아 왔어요.

내가 살던 나라에서는 내가 지워져버리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을 먹이기도, 어머니를 돌보기도 힘들었어요.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여기 왔어요. 

내가 존엄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돈이면 돼요.

  

 

이제 돈을 조금 모았지만, 여전히 청소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일깨워주셔야만 한답니다. 

내가 거울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사라지지 않으셨어요.

 

 

나를 보세요!

특권을 가진 자매와 형제들이여, 나를 바라봐요.

그러면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Rachele E. Vernon, Caribbean/UK, Resource Book, 55)

 

  

 

[변화를 일으키는 제자로 부름 받음]

 

이번 선교대회의 마지막 순서는 대회 기간 동안 논의해 온 내용을 한데 모아 성명서를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성명서의 제목은 ‘변화를 일으키는 제자를 요청하는 아루샤의 부름’(Arusha Call for Transforming Discipleship)입니다. 그 마지막에 나오는 12가지의 부름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 읽는 ‘향린교인 생활실천 다짐’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다짐과 실천이 세계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름과 이어져 있음을 깨닫고, 우리 모두 힘을 내어 이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세례를 통해 변혁적인 제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과 배제, 고독과 무가치함에 직면한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서로의 삶을 연결시켜 주신다는 사실을 증언할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장 경제가 만들어 낸 신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우상들에게 희생당하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서, 우리가 전할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충만함, 죄에 대한 참회와 용서, 영원한 삶의 약속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는 길에 기쁘게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정의와 존엄을 찾도록 힘주십니다. 

 

우리는 헛된 메시지가 난무하는 이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돌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소비주의가 빚어낸 무자비한 환경파괴를 직시하며, 기후변화의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나라들과 연대할 것입니다. 

 

우리는 공정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제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배제함으로써 지탱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일치를 추구하며 연대하는 삶의 여행을 벌여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변혁적인 사랑에 대한 충실한 증언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종교적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세력과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이웃 종교인들과 대화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으로서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권력과 부귀를 가진 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길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장벽을 허물고 정의를 세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자기 땅에서 추방된 사람들, 이주민들과 난민들과 함께 하며, 새롭게 국경을 만들어 사람들을 서로 분리하고 죽이는 세태와 맞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선민주의와 특권의식, 개인적/구조적 권력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빛 속에서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소망으로 가득한 가능성들을 제공해 줍니다. 

 

  

 

(선교대회의 장면을 사진으로 엮어보았습니다. 설명하면 길어질 것 같아서 6분짜리 영상으로 모았습니다. 배경음악은 대회기간 기도회에서 불린 노래를 녹음한 것입니다.)

 

  

 

  

 

[파송사]

 

(오늘 파송사로 ‘아루샤 성명서’ 끝에 있는 기도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선물을 갖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해, 억압받는 자유케 하기 위해, 병든 자를 고치기 위해, 자신에게 갇힌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령이시여, 이 세계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고, 우리들의 심령에 당신의 영을 부어주심을 기뻐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아가며, 성령 안에서 걷게 하소서.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주시고, 예수를 따라 우리 시대에 정의와 평화를 위한 순례자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이 세계를 보살피시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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