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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때가 찼다 | 김희헌 | 2018-02-18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9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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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2-18

때가 찼다 (창 9:8-17, 벧전 3:18-22, 막 1:9-15)

 

2018.02.18. 사순절 첫째 주일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죄를 씻는 신앙의 절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절로는 겨울의 끝자락을 지나 봄을 향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얼음이 물로 변한다는 우수(雨水)입니다. 만물의 소생을 앞둔 이 시기에 우리의 삶 또한 새로워지기를 바라며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카이로스의 부름 / 마가복음 1장 9-15절]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은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바로 그 뒤를 이어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과정을 서술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후, 자신의 공생애를 짧은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낡은 시대에 속했던 몸을 세례로 씻고, 낡은 질서의 유혹을 이겨낼 정신을 세우는 광야 시험을 마친 후에 예수님은 선언합니다. 때가 찼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운동이 시작됩니다. 

 

‘때가 찼다’는 말씀은 사실상 역사의 시간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지만, 새 세계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예언자적 상상력이 빚어낸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낡은 질서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세계 인식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온 하나님나라를 믿고, 그 나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돌이켜 회개하는 삶을 시작할 때 예수운동이 피어납니다. 

 

‘때가 찼다’는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낡은 시대가 종료됨을 알리는 선언이자, 새로운 시대를 향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보지요. ‘때가 찼다’는 말은 그리스어로 ‘플레로타이 호 카이로스’ (Πεπλήρωται ὁ καιρὸς), ‘카이로스가 충만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어로 말하지 않고 아람어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던 마가의 공동체가 이해한 방식입니다. 

 

아시다시피 ‘시간’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요,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 (kairos)입니다. 크로노스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과하며 연대기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크로노스가 흐를수록 만물은 낡아집니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굳이 애써서 찾지 않아도 발견됩니다. 자연의 변화와 역사의 진행이 바로 크로노스의 흐름입니다. 

 

이와는 달리,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의 틈바구니에 새겨져있는 시간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크로노스의 질서를 뒤엎는 혁명과 창조의 시간입니다. 왜 세상은 어제가 오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또한 거기에 ‘새로움’(novelty)이 탄생하는 것일까요?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이로스가 무르익으면 새로움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정신에 의해서만 발견됩니다. 이 카이로스를 발견한 정신은 ‘전진하는 힘’을 획득하게 됩니다. 

 

크로노스는 양적인 무게로서 ‘시간의 숙명’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카이로스는 질적인 새로움입니다. 카이로스는 시간을 그 ‘숙명’으로부터 구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카이로스를 가리켜 ‘시간의 덕성(virtue)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현대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더욱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카이로스를 가리켜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스스로 비우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A. 네그리, [혁명의 시간], 54)

 

그렇다면 마가복음이 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을 ‘카이로스의 충만함’으로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크로노스의 절망에 맞선 카이로스의 희망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대는 유대의 대로마 전쟁 직후로 추정됩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된 절망의 시대입니다. 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힘이 지속될 크로노스의 시간에서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두운 식민의 시대 속에서도 무언가 전진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이 당시의 고민이었을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입을 빌어 ‘카이로스의 충만’을 말합니다.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이 선언됩니다. 식민통치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제국에 부역하는 부역 삶을 선택했던 영악한 지배자들과는 달리, 아무리 광야와 같은 식민지 현실이라 할지라도 부귀와 영광 대신 ‘생명의 전진’을 맛보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 살겠다는 예수의 선언을 전해줍니다. 

 

안병무는 이 예수의 선언이 지닌 무게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14절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표현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말과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말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안병무, [갈릴래아의 예수], 66)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의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는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 동기를 요한의 투옥에서 찾았습니다. 장준하의 뒤를 이은 문익환처럼, 예수님은 요한의 뒤를 이어 활동하게 됩니다. 마가는 나중에 (막 6:14-29) 세례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서 처형당한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예수님의 운명도 결국 그것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활동이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마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지 식민의 시간인 ‘크로노스의 어두움’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낀 어떤 용기 있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크로노스라는 세월의 무게는 ‘용기나 책임감’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어떤 ‘은총과 비전’에 대한 감각이 필요합니다.

 

마가가 전한 예수님의 선언은 ‘부름이자 초대’에 가깝습니다. 식민지라는 무거운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도 짓눌리지 않는 생명이 있다는 인식, 배신과 좌절이 이어진 역사의 부패 속에서도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바로 이런 인식과 믿음에 기초하여 하늘의 부름과 초대가 이뤄집니다. 

 

하늘의 부름을 듣고 그 초대에 응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카이로스의 시간을 따라서 살겠다고 돌이켜 회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몸을 입고 이 역사 속으로 화육합니다. 바로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증거되고, 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구성되어가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그 희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비극과 종교의 타락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크로노스의 현실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바쳐지는 정성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가는 인생에는 ‘뜻을 잃은 생명의 비극’이 있습니다. 낡은 크로노스의 질서에 봉사하기 위해 카이로스의 부름을 미끼로 삼는 종교는 뜻을 잃고 타락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에 충실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카이로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사슬처럼 질기게 묶여진 크로노스적 질서, 그 틈바구니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카이로스의 외침을 듣고 있는가! 복음에 민감한 영혼은 예수님의 첫 번째 선언을 듣습니다. 때가 찼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베드로전서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에 대한 고백적 해석을 제공합니다. 바울서신과는 달리 베드로전서는 수신인이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일반서신으로 불리는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1장 1절을 보면 이 편지의 수신인을 가리켜,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부연설명하자면 ‘디아스포라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사람들’(exiles of diaspora)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잃고 떠도는 절망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전해진 것입니다. 

 

18절은 중요한 기독교 교리 하나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 지성에게는 거의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성서의 가르침이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왜곡되어 마치 문자 그대로의 진리처럼 믿기를 강요받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교조주의에 묶여버림으로써 그 가르침이 카이로스의 설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가 전하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에(hapax) 고통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의인(dikaios)이신 분이 불의한 사람(adikos)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가 육(sarx)으로는 죽임 당했지만 영(pneuma)으로는 살림을 받았습니다.” (벧전 3:18)

 

‘그리스도가 죄를 사하시려고 죽으셨다’는 이 가르침은 종종 편의주의적인 신앙의 교리적 알리바이처럼 작동했기 때문에 진지한 신앙인들에게는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엄밀한 연구를 전개한 사람들은 ‘교리적 전통’이 아직 형성되기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 주목했기 때문에, 18절에 나오는 이 기독교적 고백에는 종교적 진정성이 없는 것처럼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자라난 정신의 풍요로움을 일부러 깎아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 고백적 진술은 제사장의 활동에 대한 종교적 상상력에 기초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제사장적 상상력은 두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 먼저 우주 만물의 모든 생명이 서로 의존한 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운명이 함께 얽혀 있다는 생명의 존재방식에 대한 직관적 이해입니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적 감각입니다. 

 

바로 이렇게 ‘생명현실에 대한 직관’과 ‘사랑의 감각’을 전제했을 때, 그리스도 공동체가 고백한 신앙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욕망의 육체를 씻는 마술적 효과를 맛보기 위해서 제각각 모여든 군중들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카이로스적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신앙공동체의 현실입니다. 

 

본문은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크로노스의 질서가 제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카이로스적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선한 양심을 발동하는 정신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영원한 희망이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은 카이로스의 부르심을 향해 더 전진한다는 말입니다. 카이로스의 부르심을 향해 더 전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는 정신은 절망적 현실에서도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때가 찼다! 

 

  

 

[포로기의 절망 속에서 얻은 깨달음 / 창세기 9장 8-17절]

 

오늘 창세기의 본문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 결론부입니다. 홍수가 그치고 나서 노아와 그 가족들의 제사를 받은 하나님(elohim)은 새로운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죽음의 바다가 온 세상을 뒤덮는 끔찍함을 경험했던 사람들, 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파멸의 경고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 새로운 신의 언약은 각별한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마치 서로 원수나 되는 것처럼, 상대방을 향한 공격의 언어를 아직 다 거둬들이지 못한 남북관계의 불안함 속에서도,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우리는 하나다!’ 하고 외치는 남과 북의 응원단의 목소리는 카이로스로 열릴 새 시대를 향한 민족의 상상력을 발동시켰지요. 그것처럼, 오늘 본문에서 ‘다시는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거듭해서 외치고 있는 신의 목소리에는 포로기라는 고통스런 경험에서 우러난 성찰과 각성이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 7~9장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설화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자세히 읽을수록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홍수이야기의 전반적인 구도는 꽤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은 마치 ‘인류의 죄악에 대한 신의 보복과 심판에 관한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까마득한 옛 시간에 있었던 크로노스적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포로기에 경험한 카이로스적 깨달음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그 메시지가 사뭇 달라질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포로들은 그 인류문명의 발상지에서 생겨난 수많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홍수설화에서부터 바빌로니아의 창조설화에 이르기까지, 거대문명을 건설한 위대한 신들의 이야기가 대제국의 위용에 걸맞게 넘쳐났을 것입니다. 

 

그 유배지에서 포로로 살던 사람들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자신들이 섬겨온 신에 대한 배신의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며 그토록 정성스럽게 섬겨왔는데, 자신들을 포로로 팔아넘기다니... 어쩌면 야훼 신의 무책임함에 대해서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신에 대한 그런 관념이 뚜렷해질수록 자신들의 절망적 처지에 대한 고뇌 역시 깊어갔을 것입니다. 

 

이런 절망적 크로노스의 시간 틈바구니로 카이로스의 빛이 서서히 비쳐왔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절망의 뿌리는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신’의 문제가 아니라 ‘힘 있는 신을 숭상한 자신들’의 문제에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힘 있는 신을 숭상하는 종교성의 밑바닥에는 ‘적에게는 보복을 안기는 신’에 대한 관념이 있고, 그것과 더불어 자신들도 그 신의 적이 되면 언제든지 보복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구성된 폭력의 이데올로기에 가깝습니다. 

 

성서의 신앙 전통에서 포로기의 경험이 제공하는 가치는 바로 이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기나긴 예언전통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 극복하지 못한 ‘폭력적인 종교성’으로부터의 환멸이자, ‘힘의 신에 대한 환멸’을 의미합니다. 포로기에 경험한 이 깨달음을 통해서, 성서의 신앙공동체는 때, ‘보복과 굴종’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은총과 언약’ 관계 속에서 믿음을 이해하는 사상의 도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일어난 포로기의 어느 순간, 카이로스가 무르익었을 때, 하늘의 음성이 울립니다.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 (사 40:2)

 

 

오늘 우리는 세 개의 성경본문을 하나의 관점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것은 숙명적 무게를 안고 지속되는 이 세속의 틈바구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순간에 주목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으로 초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에 대한 사순절의 묵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찼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카이로스의 빛나는 때를 보고 있느냐? 바로 이 물음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의 주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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