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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복음에 참여하고자 | 김희헌 | 2018-02-04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68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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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2-04

복음에 참여하고자 (사 40:21-31, 고전 9:16-23, 막 1:29-39)

 

2018.02.04. 주현절 다섯째 주일 

 

[우리의 복음은 무사한가?]

 

촛불혁명 이후의 삶은 만족스럽습니까? 우리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누적된 폐습을 떨치고 상식과 양심이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난 한 주간을 달군 사건이 있었습니다. 월요일 저녁 뉴스 프로그램에 현직 여성 검사가 나와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 피해 경험을 증언했습니다. 그 증언은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사실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적폐라 할 수 있는 남성중심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와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는 여성들의 ‘미투 (me too) 현상’이 넓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우리 사회가 더욱 평등하고 정의로운 제도를 정착시키는 데까지 이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분은 8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왜 굳이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밝히게 되었는지 몇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두 번째 이유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해 남성이 ‘최근에 개신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간증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해 남성은 법무부 검찰국장으로 재직하는 도중에 돈봉투 만찬사건의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작년 6월에 면직당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촌동에 있는 모 대형교회에서 세례를 받기 전, 교인들 앞에서 했던 간증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남성이 뱉은 두 가지 말이 제 귀에는 기이하게 들렸습니다. 하나는 ‘정직하게 살아온 자신이 뜻하지 않는 일로 공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주변사람들로부터 ‘억울하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 없이 살아온 죄 많은 자신에게 큰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린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든 생각은 ‘아, 복음이 길을 잃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진실과 진심은 잃고, 이젠 언어적 잔상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성공주의와 결합된 값싼 은혜에 물들었고, 염치를 잃은 신앙은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종교가 되어가면서 우리 사회의 거대한 적폐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닌 우리는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해졌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정신은 어떤가? 우리 교회가 참여하고 있는 복음은 무사한가? 우리 신앙공동체는 다가오는 시대를 견딜만한가? 이런 물음을 안고 성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수의 복음, 마가복음 1장 29-39절]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셨지요. 왜냐하면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들었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면,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병자는 몸이 아픈 사람이요, 귀신 들린 사람은 맘이 아픈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마가복음이 시작되면서 소개된 치유기사는 한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귀신 들려서 맘이 병든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오늘은 몸이 병든 여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입니다. 그녀는 정신은 온전했지만 몸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가서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열이 내리고, 그녀는 손님을 대접할 수 있게 됩니다. 

 

몸이 낫자마자 일어나 시중을 들어야만 하는 여성, 그녀의 고단한 삶의 이야기는 지금이나 그때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묘사된 이 빤한 이야기에는 놀라운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암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어인데, 그것은 ‘일으키다’는 말과 ‘시중을 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아 ‘일으키자’ 여인은 일어나 ‘시중을 들게’ 됩니다. 여기서 ‘일으키다’는 헬라어 에게이로(ἐγείρω)는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고 (막16:6), ‘시중을 들다’는 헬라어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는 섬기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마 10:45)을 설명하는 단어와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마가복음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첫 번째 여성 제자, 또는 봉사의 직분을 가진 첫 번째 집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새벽녘에 외딴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모두들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옆 동네로 갑시다. 거기에서도 전도합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묘한 연민을 남깁니다. 쉼 없이 전개되는 활동의 곤고함이 이 이야기의 배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고상한 자로 군림하면서 현실에서 유리된 거룩한 존재가 되기보다는, 살아있는 생명적 실체가 되어 고통의 현장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복음이 지닌 특징, 예수라는 인물이 가진 특징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특징은 ‘복음을 전하는 예수 자신이 바로 메시지가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의 복음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나 수단이 아닙니다. 복음 그 자체가 추구될만한 존재론적 목적이 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복음이 남을 지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섬기는 자의 이야기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에 참여하여 생명의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복음에 참여한 삶의 특징, 고린도전서 9장 16-23절]

 

예수님의 삶을 본받은 사람들 가운데,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만납니다. ‘작은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의 의미와 목적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논리를 대비시킵니다. 하나는 당시의 세속 논리요,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한 사람들의 믿음의 논리입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기 전(9:1-15), 바울은 고린도 사회의 일반 관습에 비추어서 자신의 주장을 합니다.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사회적 문법들 즉,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기본권리, 그리고 노동과 보상에 관한 사회적 권리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런 권리를 활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15절), 그것을 참았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12절)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랑이나 보수를 바라며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으로서 하느님이 주신 마땅한 직무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강조합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헬라어 원문을 따라 16-17절을 보면, 바울이 ‘왜냐하면(for)’ 또는 ‘진실로(indeed)’라고 번역되는 단어(γὰρ, gar)를 4번이나 반복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신의 심정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19절에서 자신의 삶의 특징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매여 있지 않는 자유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음에 참여하는 삶의 고유한 면모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 여러 곳에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종’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롬 1:1, 빌 1:1, 갈 1:10) 그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의 종’은 역설적으로 ‘참 자유인’이어야 합니다. ‘참 자유인’이란 자기 욕망을 이루려는 자유인-그것은 ‘자기 욕망의 종’-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하여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자유인으로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삶의 모습을 오늘 본문 20~22절에서 설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동일한 패턴을 4번 반복하여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때로는 ‘유대인’처럼, 때로는 ‘율법의 지배를 받는 사람’처럼, 때로는 그 반대로 ‘율법이 없는 사람’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약한 사람들(the weak) 곁에서 자신이 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랬는가? 그 이유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 23절에 나옵니다. 공동번역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복음의 축복을 나누기’ 위해서라고 표현합니다. 다른 성경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그러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의 뜨거운 마음을 읽게 됩니다. 

 

‘복음에 참여하고자’ 자유인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고, 이 세상의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참 된 종이 되는 삶. 바로 여기에 신앙의 진실이 담겨있고, 그리스도가 내비치는 역사의 틈바구니가 생겨납니다. 

 

그 때는 율법이 깨지는 시간이요, 세상을 지배하는 법이 효력을 잃는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역사 속으로 메시아가 등장하는 시간입니다. 그 메시아의 시간에, 주인과 노예를 분리하는 로마의 법이나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종교의 율법이 힘을 잃고, 그리스도의 친교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 친교의 공동체 에클레시아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종교적 삶의 위험과 딜레마]

 

그런데 바울처럼 살아가는 삶은 논리적으로 추구할 수는 있어도, 현실적으로 이루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고 위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온전히 참여하고자 하는 삶에는 항상 위기가 있습니다. 그 위험은 세속적인 경쟁에서 도태되는 위험이나, 인생에서 발생하는 손해나 결핍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에 참여하려는 소명의식에 철저하여, 그 소명을 소유하고자 하면 할수록 가중되는 위험입니다. 

 

예수의 복음에 깊이 참여하면 할수록 이 위험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커진다는 점에 기독교적 삶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예수의 종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율법과 질서로부터 자유인이 되는 것, 그것은 갈수록 쉬워지는 과제가 아니라 점점 가중되는 멍에입니다. 그 멍에는 단지 메고 갈 수 있는 것일 뿐이지, 어떤 특권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해방의 역사를 꿈꾸었던 진보사상들 역시 그런 딜레마를 안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질서 속에서 예수운동을 전개했던 바울은 독특한 부르심과 소명(calling)을 받은 사람입니다. (고전 7:17-22) 그 ‘부르심/소명’을 가리켜 그리스어로 클레시스(klesis)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클레시스, 즉 소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그 ‘소명으로부터 태동한’ 공동체인 교회, 에클레시아(ek-klēsia)입니다. 

 

바울과 비슷한 꿈을 꾼 근대의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계급의 차별이 없는 세계를 꿈꾼 칼 마르크스입니다. 그는 그리스어 클레시스(klēsis)에서 파생한 라틴어 단어 클라시스(classis) 즉, 계급(class)이라는 개념을 강조하며 사회적 신분(Stand)의 차별이 극복된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이라는 개념(클라시스)을 통해서 자본주의 세계를 구원할 어떤 메시아적 소명(클레시스)을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소명(클레시스)을 가진 공동체인 ‘에클레시아’가 중요했다면, 마르크스는 해방의 소명을 가진 계급(클라시스)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자본주의 세계를 구원할 집단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소명을 받은 자가 메시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롬 8:11),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계급마저 폐지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과 딜레마가 있었습니다. 아감벤이라는 철학자는 마르크스주의 운동 최대의 오독과 병폐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어느 특정한 사회계급인 노동자 계급과 동일시된 것”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소명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와 ‘역사적 상태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혼동한 것인데, 이런 혼동으로 인해 ‘혁명의 소명이 망각’되었다고 비판합니다. (G. Agamben, [로마서 강의 : 남겨진 시간], 60)

 

이런 역사의 딜레마는 지속됩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교회가 타락하는 이유도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를 위한 소명을 실행하기보다, 자신들이 마치 정의와 평화를 실행할 소명을 ‘소유’한 집단인 것처럼 행세할 때 종교적 타락은 시작됩니다. 

 

복음이 주는 소명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긍휼로서 활용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소명을 활용하기보다는 소유하는 특권을 누리려고 했던 집단들은 모두 파멸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포로기에 들려온 반복된 물음, 이사야 40장 21-31절]

 

오늘 본문 이사야 40장은 파멸에 이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활동한 제2이사야는 절망하는 포로민들에게 묻습니다. 21절과 28절에서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뭘 모르고, 무엇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21절의 첫 번째 물음 뒤에, 예언자 이사야는 자신의 창조신학을 펼치면서, 창조주 하느님의 힘과 인간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대비시킵니다. 히브리 성서의 전통에서 제2이사야가 등장한 기원전 6세기 이전에는 ‘창조신학’이라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신학은 포로기라는 특별한 시기에, 그것이 필요한 특별한 사람들 즉, 파멸에 이른 삶을 사는 포로민들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청중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성공적 주체들이 아닙니다. 절망과 혼란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27절에 나오는 말처럼 탄식했을 것입니다. “야훼께서는 나의 고생길 같은 것은 관심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내 권리 따위는 알은 체도 않으신다.”

 

그래서 이사야는 28절에서 또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모르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이 물음은 답을 제시하려는 물음이라기보다는, 존재의 각성을 촉구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을 받은 사람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소명을 가진 존재였는지를 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적 현실이 너무도 생생하여 삶의 소명을 잃은 것입니다. 

 

예언자가 그들에게 준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이었습니다. 

 

“야훼를 믿고 바라는 (qavah, wait for) 사람이 되어야 한다” (31절)

 

  

 

[새로운 세계는 어떻게 오는가]

 

이사야가 살던 시간은 먼 옛날입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탄생한 포로기는 상징적인 시간으로서, 오늘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포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입술에서는 포로민의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대체로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유가 왜곡되었거나 망각되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예수의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명이 왜곡되면, 기독교 종교를 세상의 골칫거리로 만들게 됩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소명을 망각하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왜 믿고 있는지에 대하여 집중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실제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외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열리는 것일까요? 

 

요즘 저의 고민은 바로 이 질문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대인데, 그것을 어떻게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까? 간절히 바라면 되나요? 그 가능성을 믿으면 되는 것인가요? 

 

철학자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이전의 시대를 끝마치는 것에 달려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가능성은 이전의 시대를 끝마치는 현실에서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가능성이 현실성을 낳는다고 추론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생명적 현실성만이 새로운 가능성을 낳을 뿐입니다. 가능성과 현실성 중에서 선행하는 것은 현실성입니다. (아감벤, [남겨진 시간], 7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꿈을 꾸기에 앞서 어떻게 복음의 진실을 지금 우리 가운데 현실화시킬 것인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이 지배했던 이전 시대를 끝마칠 때, 하느님의 자비가 물결치는 믿음의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하고자 하는 믿음의 소명이 우리의 현실을 이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정의와 평화로 지어질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를 우리가 비로소 온전한 맘으로 꿈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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