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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무엇을 듣는가? | 김희헌 | 2018-01-14

by 관리자 posted Jun 25, 2018 Views 16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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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1-14

무엇을 듣는가? (삼상 :1-10, 고전 6;12-20, 요 1:43-51)

 

2018.01.14. 주현절 둘째 주일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명]

 

1987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지요? 우리 교회가 그 영화에 등장해서 관심을 모으고 있고, 지난 주일에는 CBS에서 우리 교회를 취재하고 방송에 소개하기도 했는데요.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 중요한 시점에서 공헌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교회의 명예요, 자랑이라 하겠습니다. 

 

30년 전의 사건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국민주권의 최소요건인 직선제를 쟁취한 그해 6월의 범국민적 항쟁은 한국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기회가 되었습니다. 억눌려 있던 노동운동이 곧이어 분출되었고, 사회의 전 영역에서 낙관적인 기운이 솟구치며 젊은 영혼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교회에도 진취적인 기운이 흘러넘치던 시대였습니다. 청년학생들이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신학적으로는 민중신학이 절정에 달하면서, 진보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보람과 긍지를 느끼던 시기였습니다. 마치 개벽하는 역사에 하늘로부터 해방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경험을 가진 교우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해 봄 두 번이나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장 경험을 했지만, 풀려나면 곧장 거리로 나가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소위 운동의 시대라고 불릴만한 때였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1987년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이정표를 세운 시대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정신습관과 삶의 양식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 역시 남겼습니다. 

 

1987년의 시대적 낙관은 사실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고삐 풀린 금융자본이 세계경제를 재편성하며, 여기저기에 욕망을 풀어 놓고 사회를 핥고 다니게 만들자, 우리 사회는 변절과 낙망의 얼굴을 감추고 오직 생존이 화두가 된 세계가 되어갔습니다. 

 

6월 항쟁으로부터 꼭 10년이 지나 찾아온 IMF 구제금융 시대는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이 낭만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속속들이 유린하는 동안, 가정이 해체되고, 미래는 더욱 불안해지며, 공동체적 유대감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오며, 사람들은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결핍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웰빙과 힐링의 시대가 차례로 지나갔지만, 진지한 사람들은 보다 근원적인 삶의 변화를 갈구하며 길을 나섰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성공주의에 물든 대부분의 교회는 결국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진보적인 교회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한 기독교 영성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전의 민중신학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을 움직이는 깊은 종교영성이 담기지 않은 사회적 증언이란 실상은 무력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습니다. 

 

민중신학 뿐만 아니라 많은 진보적인 사상들이 ‘저항과 투쟁’만이 아니라, ‘신비와 수행’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저항과 신비가 소통하는 공동체, 투쟁과 수행이 함께 하는 삶, 어쩌면 우리 향린공동체가 꿈꾸는 것도 그것일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갈등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갈등은 사실 우리 공동체에 각성과 배움이 필요한 때가 되었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관찰하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어서 전보다 현명해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은 그 시험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미래로 나갈 수 있는 공동체로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시험받고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정화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순수하고 뜻 깊은 삶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시련의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습니다. 시련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고통 속에서 배우면 됩니다. 그 경험을 마치고, 우리가 고통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평화롭게 또 길을 떠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깨달음입니다. 

 

지난 연말에 교우 한 분이 책을 선물해주셨습니다. 제목은 [무탄트 메시지]입니다. 이 책은 미국의 의사가 호주의 원주민과 수개월을 동행하며 얻은 깨달음을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하늘뜻펴기에서는 그 책을 통해서 배운 것을 곁들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성경말씀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 책의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삶을 돌이켜보면, 때로는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존재의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행동이었고, 언젠가는 그것이 뒷걸음질이 아니라 앞으로 내디딘 발걸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말로 모건, [무탄트 메시지], 147)

 

  

 

[깨달음, 몸은 하느님의 성전 /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오늘 함께 생각해볼 첫 번째 성경말씀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는 본래 반로마 도시동맹의 본거지였기 때문에, 기원전 146년에 로마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1세기가 지나서 거대한 규모로 재건되었습니다. 기원전 46년에 율리우스 시저는 로마의 식민도시로 고린도를 재건했는데, 그 후 고린도는 약 60만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사는 메트로폴리스가 되었습니다. 

 

영어로 Corinthian이 ‘행실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 도시의 음행을 비판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여기서 음행(porneia)이란 단지 성적인 문란함(fornication)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퇴폐(idolatry)를 포함하는 말일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오늘 본문 12절에 인용되어 나오는 말처럼,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삐 풀린 욕망이 지배하는 문화를 살아간 모양입니다. 20만 명의 자유민과 40만 명의 노예로 구성된 그 도시의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형편은 서로 달랐고, 생각도 달랐을 것입니다. 저마다 선택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 분열과 대립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교회는 네 파로 갈라져 다투고 있었습니다. (바울파, 베드로파, 아폴로파, 그리스도파 / 고전 1:12) 

 

제국이 주도하는 힘의 문화에 둘러싸인 교회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교회의 분열’을 해소하고, 더 나아가 그 시대 ‘음행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겠지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논리를 사용합니다. 

 

첫째,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일이든지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12절)

 

둘째, 몸(soma)은 음행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이다. (13절)

 

셋째,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melos)’요, ‘성령의 전’(naos, temple)이기 때문에, 우리는 몸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15, 19-20절)

 

바울은 인간의 몸이 단지 살덩어리가 아니요, 사람의 심장에는 피 이상의 것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성령이 깃든 거룩한 성전’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운동의 혁명성을 삶 속에 녹여내서, 공동체를 새롭게 주조해내는 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종교의 수행적 측면에 대한 강조입니다. 

 

수행이란 자신을 돌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존재의 신비에 자신을 온전히 엶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은 자신의 삶의 실제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음행에 물든 제국의 질서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것에 맞서는 삶을 살아가려는 자의 깨달음과 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비문화에 물든 자본주의라는 종교 역시 인간의 몸을 하느님의 성전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르주아적 삶에 탐닉하는 욕망이 갖다 붙인 구실일 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느님의 성전’은 로마제국의 체제 안에서 번성한 음행의 문화에 대항하는 논리입니다. 그것은 단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필요한 것은 음식과 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몸과 삶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탄트 메시지]의 한 대목을 들려드리지요.

 

병에 걸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우리가 치료해야 할 정말로 중요한 상처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상처 입은 관계, 우리의 신앙에 뚫린 구멍, 깊이 감춰진 두려움, 서서히 무너져가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냉정한 마음, 바로 이것들이 우리가 진정으로 치료해야 할 상처입니다. ([무탄트 메시지], 143)

 

  

 

[들음, 생명의 통로 / 사무엘상 3장 1-10절]

 

오늘 사무엘서 본문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예언의 시대는 어떻게 열리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그 때는 하느님의 말씀(dabar)도 잘 들려오지 않고(rare), 비전(chazon)도 열리지(open) 않는”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성전도 있었고, 율법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고, 비전을 열어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뭔가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부름을 누가 듣느냐’에 주목합니다. 

 

하느님의 부름이 있는 때는 상징적인 시간입니다. 아직 ‘하느님의 등불이 꺼지기 전’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부른 줄로 알고 달려가지만, 엘리는 ‘부르지 않았으니, 잠이나 더 자라’고 말합니다. 이 일이 반복되자, 엘리는 주님이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사무엘에게 어떻게 할지 가르쳐줍니다. “가서 누워 있다가,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마침내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름을 듣고, 엘리의 가르침을 따라 대답합니다. 

 

이것은 새 시대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스승과 제자는 함께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아갑니다. 엘리는 경험이 풍부한 멘토로서, 제자가 맞고 있는 신비로운 사건을 해석해줍니다. 그는 비록 옛 시대에 속하여 새 시대를 여는 하늘의 부름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별력을 잃지 않고 정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제자를 인도하는 과정에서 부드러움과 자존감을 잃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하늘의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스승의 파국을 알려야만 하는 순간에 이를 때에도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냉정한 새 시대의 징표’만이 아니라, ‘섬세한 관계의 감각’이 나옵니다. 그것은 세 가지의 관계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과 엘리의 관계가 있습니다. 엘리는 하늘의 소리를 해석하는 지혜를 가졌어도, 그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그는 율법과 제도의 주인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시대는 과거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엘리와 사무엘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에는 돌봄과 존중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긋나 있습니다. 한 명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다른 한 명은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계에는 인간적인 신뢰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진리의 부족분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과 사무엘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부름과 응답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통해서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하늘의 소리를 들은 사무엘이라는 인간의 등장! 바로 그것으로써 율법의 시대는 끝나고 예언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하늘의 부름을 듣고 새 시대로 나아가는 삶, 그것이 성서의 인생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다른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의 중요성을 배우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익숙한 생각과 습관을 뱀이 허물을 벗듯이 미련 없이 벗어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낡은 허물을 벗어도 뱀은 작아지지도 커지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필요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는 시작됩니다. ([무탄트 메시지], 148)

 

하느님의 부름을 들은 사무엘은 역사를 새롭게 열어갈 것입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맨발로 여행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의 초대도 그러합니다. 

 

  

 

[초대, 막힘없는 대화 / 요한복음 1장 43-51절]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는 예수님이 제자를 초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앞에서 베드로를 제자로 선택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초대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제자 나다나엘은 바돌로매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발전해가는 과정입니다. 

 

친구 빌립을 통해 처음 예수에 관한 소식을 전해들은 나다나엘의 태도는 당시의 통념을 따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agathos)이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몇 백 명 되지 않는 작은 마을 나사렛, 생존을 위해서는 갈릴리의 수도 세포리스에 의존해야만 하는 그곳에서는 신통한 것이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막힘없는 대화가 진행되어가면서 나다나엘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 대화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이렇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관계가 왜곡되거나 병들어 있지 않다면 누구나 감정의 교감을 통해 서로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대화를 위해서는 입술의 언어보다도 가슴의 교감이 더 필요합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말보다 그것을 알아먹을 수 있는 말귀입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은 서로 마음을 열고 신속하게 서로를 알아갑니다.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선생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너는 열린 하늘을 보게 될 것이요, 천사가 사람의 아들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이 대화가 끝나고, 나다나엘의 고향(요21:2)인 가나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사건이 벌어집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여 잔치가 되살아나는 신나는 사건 말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는 사건에 이르는 것은 실상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루고자 하는 참된 마음입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용기와 평화와 지혜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바꿀 수 없는 것을 용납하는 평화, 그것을 분별하는 지혜, 이 세 가지 것만 있다면, 우리들의 인생은 훨씬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초대에 언제나 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에 관한 목록이 있다면, 거기에는 ‘타인으로부터의 초대를 듣는 것’도 담겨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자신을 초대하고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은 생명세계의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힘을 갖춘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문화는 생명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배워가는 목적을 잃고 말았습니다. 들으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듣고 있나요? 

 

새 시대를 여는 푸른 이의 외침인가요? 그렇다면 이제 곧 미지의 세계를 맨 발로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선의로 촉발된 형제의 절규인가요? 그렇다면 머지않아 평화를 맛보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이 토해내는 신음뿐인가요? 그렇다면 땀으로 얼룩진 삽을 눈물의 강에서 씻고 쉬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그대는 이미 선물이 되어 누군가를 부르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부름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격려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고, 남들이 기댈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듣는 사람들의 삶에, 성령이 깃든 거룩한 성전이 지어져 갈 것입니다. 

 

침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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