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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위에서 오는 지혜 | 김희헌 | 2018-09-23

by 김희헌 posted Sep 23, 2018 Views 453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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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9-23

위에서 오는 지혜 (31:10-31, 3:13-4:3,7-8a, 9:30-37)

2018.09.23. 창조절 넷째 주일

 

[기장 103회 총회 스케치]

기장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지난 일주일 동안 교회를 비웠습니다. 보고 겸 해서 그 일에 대해서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금년은 예년과는 다르게 총회 전에 사전대회가 별도로 있었습니다. 이 대회에는 기장 교단과 선교협력 관계에 있는 해외의 삼십여 개 교단 관계자들이 초대되었고, 삼일 동안 한반도의 새로운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교단 간 파트너십을 새롭게 하자는 취지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연초부터 이 대회의 기조강연을 맡기로 결정되어서 큰 숙제를 안고 있었는데 이제 그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금년 삼월 탄자니아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한 것도 이 숙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세계교회의 흐름을 파악하고, 우리 교단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사전대회에서는 기장교단의 민중 신학적인 입장과 사회선교의 정신이 강조되었고, 교단 간의 협력과 연대가 밑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나눴습니다.

본대회인 제 103회 총회는 예년과 비교했을 때 몇 가지 개혁적인 안건을 결의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가 속해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65년 전인 1953년에 장로교회가 분열된 이후 진보적인 입장을 표방해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에는 교단에 가입하지 않았던 우리 교회도 신학적 동질성을 느끼며 기장교단에 가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번영신학을 모토로 삼은 성장주의 시대를 길게 거쳐 오는 동안 기장교단 역시 무너져 갔고, 다른 교단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변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이번 총회에서 새로운 돌파구라 할 만한 몇 가지 결정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동성애 반대라는 구호가 개신교회 안에서 광풍처럼 일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성소수자라는 표현을 수용하고 교단이 책임 있는 대처를 하기 위해 연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것은 개신교에서 시도된 첫 번째 발걸음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격론이 있었지만 결국 성 윤리 강령을 채택하고, 성폭력대책위원회를 교단의 상설 기구로 만드는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총회의 마지막 결의사항으로 임보라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한 타 교단의 결정을 비판하고 그의 목회활동을 보호하겠다는 성명서를 총회 이름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사항이라 할 수 있지만, ‘성소수자문제만 나오면 기겁을 하는 현재의 교계 분위기에서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기장 총회에서 있었던 주요 결의사항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교회 정문 앞에 있는 게시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장총회에서 예년과는 다른 새로운 분위기를 느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한반도에서 불고 있는 평화의 바람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있었던 3차 남북정상회담은 종전선언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뜻 깊은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능라도 경기장에서 있었던 문대통령의 연설과 그곳에 모인 평양시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며 우리 민족에게 평화를 향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하늘의 은총이 불어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또 한 가지 기쁜 소식을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교회가 침탈된 지 173일만인 지난 화요일에 강남향린교회의 문제가 타결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감사기도회를 드렸습니다. 창고에 있던 교회 기물 가운데 필요한 것은 새 처소로 옮겼고, 다음 주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새 교회로 이전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난 주간은 그 동안 애쓴 일들에 결실이 맺혀서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추석 명절을 여유 있는 마음으로 맞을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오늘의 성경 말씀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교훈, 잠언 3110-31]

2성서의 오늘 본문은 잠언의 마지막 내용입니다. 31장은 왕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이라고 나옵니다. (1) 그런데 그 표면에 흐르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오늘 본문의 제목을 유능한 아내로 잡았는데, 본문이 열거하고 있는 유능한 아내가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마치 시어머니들의 소망 사항들(wish list)’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헌신적이어야 하며, 기량이 뛰어난 장인이자 손발이 민첩한 주부여야 하고, 성공적인 사업가이자 지혜로운 선생이며, 신중한 기획자이자 지치지 않는 일꾼으로 그려집니다.

오늘날 이런 아내가 되고 싶은 미혼 여성은 아마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추석을 앞두고 머리가 아파오는 주부들에게는 불편한 구절들이 많습니다. (13) 부지런히 손을 놀려 일하기를 즐거워하며, (14) 먼 곳에서 먹거리를 구하여 오고, (15)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식구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며, (17) 허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억센 팔로 일을 합니다. 그런데 (23) 남편은 마을 원로들과 마을회관을 드나들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하니, 풍경이 마치 한국 명절에서 보게 되는 불공평한 장면들처럼 보입니다.

제가 교회에 취임하던 때에 받은 선물 가운데 <82년생 김지영>이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나에게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 책은 제도적인 성차별이 사라졌다고 하는 한국사회에 보이지 않는 차별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 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씨는 어린 딸을 두고 있는 서른네 살의 여성인데,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빙의를 하는 이상 증세를 보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추석날 시댁에서 일을 하던 김지영 씨가 불현듯 친정 엄마로 빙의하여 엄마의 목소리로 시댁 사람들에게 서운한 심정을 털어놓는 장면입니다. 시부모님은 아연실색을 하였고, 잔치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소설은 김지영 씨가 치료를 받으면서 담당의사에게 털어놓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소설이 주목을 받았던 것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받아온 부당한 일들에 대한 실감나는 목소리를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일반적인 경험에 대한 리포트로서 많은 공감을 얻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소설보다 더 믿기지 않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납니다. 2주 전 예장의 한 교단 총회에서 여성안수에 관한 연구보고서가 통과되었습니다. 그 교단은 현재까지도 여성들에게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채택된 그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안수를 주게 된 것은 영성이 약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요, ‘세속화의 흐름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시대 상식으로부터 안드로메다만큼 동떨어진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이런 인식이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오늘 잠언의 본문을 제대로 해석하는 일이 난감한 게 사실입니다.

물론 이천 년 전에 기록된 문서에 오늘의 젠더 감수성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한 방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 이 잠언의 내용이 여성들에게 주어진 윤리 지침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말해야겠습니다. 본문은 잠언의 주제인 지혜를 의인화하여 묘사된 것인데,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호크마’(ḥāḵ·māh)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의인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시는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절이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시작되는 특징(acrostic)을 갖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결혼생활의 평등함이나 불평등함에 관한 주장이 아닙니다. 이 시의 제목으로 유능한 아내’(capable wife)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원어인 에셋 하일’(ê·šeṯ ḥa·yil)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번역은 강인한 여인’(strong woman)이 좋겠습니다. 이 여인은 마치 모두의 종으로서 고난을 자처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현명하고 용기 있는 행동과 그 삶의 열매가 죄에서 비롯된 인간 삶의 강압적인 관계들을 이겨내고 치유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잠언의 본문은 삶을 구원하는 지혜와 힘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에 나오는 강인한 여성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녀가 종속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결심에 기초하여 살아가기 때문이요, 그녀의 관대함은 강요된 것이라기보다는 궁핍한 사람들을 향한 친절이며, 그 삶의 모습은 주도적이고 창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 시는 여성의 고단한 삶에 관한 현혹적인 미화가 아니라 그 반대로서, 생의 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을 지켜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잠언의 교훈은 본문 30절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이며 아름다움도 지나가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찬을 받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관한 잠언의 이 가르침에는 삶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과 도전이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문학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교훈이 되고, 우리들이 갖고 있는 삶의 물음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질문과 이어져 있습니다.

 

[큰 사람은 누구인가, 마가복음 930-37]

마가복음 본문의 후반부는 무엇이 가장 위대한 것인가’(τίς μείζων)’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답은 잠언에 나오는 지혜로운 여인의 삶과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서 모두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꼴찌가 되어서 모두를 섬기는 종 디이코노스’(diakonos)가 되는 것은 어린이(paidion)와 같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섬기는 종 디아코노스’(diakonos)가 되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의 원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원한 삶의 방식은 제자들이 기대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전반부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제자들에게 긴장을 일으킨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은 제자들이 기대하던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제자들이 침묵합니다. 그것은 당시의 세계가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스승에게 설명해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침묵을 택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 듣다가는 괴로워질 것이 빤하기 때문에 침묵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위대한 삶인가,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우리를 뒤흔드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떤 지혜에 의존하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본문 야고보서는 이점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두 가지 종류의 지혜, 야고보서 3:13-4:3, 7-8a]

야고보서는 108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54개의 명령문을 사용합니다. 이 강력한 권면을 하고 있는 야고보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향해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제시하는 근본적인 요청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1:5)는 것이어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 지혜문학과 비슷하다는 점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세 개의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인가? (3:13) 우리 가운데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4:1)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란 무엇인가? (4:8)

첫 번째 질문, ‘누가 지혜롭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인가하고 묻고서, 야고보는 서로 상충되는 두 개의 지혜 전통을 제시합니다. ‘땅에 속한 지혜위에서 오는 지혜를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오는 지혜를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의 설명을 따르면, ‘땅에 속한 지혜는 시기(jealousy)와 이기적 욕망(self-interest)이 만들어낸 지혜로서, 혼란과 악행을 낳습니다. 야고보는 땅에 속한 지혜를 육체에 속한 것이요, 악마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위에서’(anōthen) 오는 지혜는 하늘’(heaven)로부터 오는 것이요, 생명의 근원(origin)에서 비롯된 지혜입니다. 야고보는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친절하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며,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17) 그것은 정의의 열매를 거두는 지혜인데, 그 씨앗은 평화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평화의 씨를 뿌려서 정의를 열매로 거두는 지혜입니다.

야고보가 물었던 두 번째 질문은 우리 가운데 싸움과 분쟁이 일어나는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싸움과 분쟁이 생기는 까닭은 위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또 구한다 하면서도 쾌락을 누리는데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체득된 지혜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 무지할 때가 많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지식은 자본주의의 상업적 욕망이 육체에 기록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기 쉽습니다. 그러한 지식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를 채우는데 민첩한 지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지식이 우리 세계를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하는 지를 보았습니다. 용산 남일당과 쌍용자동차와 제주 강정과 진도 앞바다 등 도처에 고통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이 세계를 사는 어느 누구도 그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지 않고, 구한다 하면서도 쾌락을 누리기 위해 잘못 구하기 삶의 구조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에게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지어주실 것입니다.

 

[위에서 오는 지혜가 이끄는 삶]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삶은 신앙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길은 여러 가지 일 것입니다. 향린교회가 65년 전에 창립될 때, 같은 해에 새롭게 출발한 기장 교단은 자유와 모험을 중시하는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창조적 변화 속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그 정신을 하나님만 믿고 모험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교리적 속박보다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고, 성공과 번영을 찬양하기보다는 수난의 친교에 참여하고, 교권적 심판과 강압보다는 친교와 연대를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신체제가 성립된 후 모든 종교가 박정희 정권에 아부를 떨고 있을 때, 김재준 목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기독교는 모험적으로 용감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교회, 아니 지금부터의 진짜 한국교회는 출애굽의 교회, 광야의 교회, 요단강을 건너야 할 교회이, 건넌 다음에도 유토피아는 오지 않을 교회. 수난의 교회! 이 수난의 교회만이 참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데에 한국교회의 영광이 있다. (장공전집 10:425, “한국에서 기독교의 위치와 사명, 19739)

이렇게 수난의 교회가 되고자 노력했던 긴 여정에 우리 향린교회도 참여했고, 이제 새로운 시대와 함께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겠지만,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어가는 새 세계에 참여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험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교육부서를 담당하는 목회자들과 향린의 교회교육에 대해서 평가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하는 세미나를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빈번한 물음이 있는데, 그것은 향린의 정신, 향린성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교우들 모두가 함께 찾아갔으면 합니다.

이 물음 앞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향린의 정신을 정리하여 제 의견을 말했습니다. 향린교회가 사회적 영성을 중시하고 사회선교에 힘쓰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에 육박하고자 하는 믿음이 이 공동체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요, 그 본질은 종교적인 편견과 위선을 떨쳐내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신앙의 모험을 하는 정신이 아니겠는가 하고 정리했습니다.

저는 이 믿음의 전통을 함께 지켜가며,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명을 함께 감당해가기를 바랍니다. 창조절의 새로운 은총이 위에서부터 부어져서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평화롭고 친절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며,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파송사]

위에서 오는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평화롭고 친절하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며,

자비롭고 선한 열매가 맺힌 풍성한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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