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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맛있는 밥| 조은화 | 2018-08-19

by 조은화 posted Aug 24, 2018 Views 21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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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8-24

맛있는 밥

(열왕기상 3:3-14, 에베소서 5:15-20, 요한복음 6:51-58)

 

[나는 누구인가?]

 

야기 하나 들려드리며 시작하겠습니다.

 

한 정신병원에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고 믿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니 무슨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귀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김영하, 옥수수와 나)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요?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진짜 나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증명해 내기위해 이리도 애쓰며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 문제에 봉착합니다. 누군가가 내 존재를 몰라줄 때,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상대를 공격하고, 사실은 나의 두려운 마음을 살펴보기도 전에 많은 에너지를 쓰며 방어 전략을 찾고자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

 

오늘 제1성서 본문인 열왕기상 3장은 솔로몬 그가 누구인가를 증명하고자 애쓴 흔적을 보게 됩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 중 권력 승계를 위해 암투를 벌이다 드디어 승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는 전통적으로 지파대표가 공회에서 추천하는 방식을 거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장남이 승계하는 왕조 제도를 따르지도 않았기에, 비정상적인 왕위승계를 합법화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조는 야훼와 다윗과 그의 가문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라고 하는 새로운 근거를 부여하게 됩니다. 성서는 기브온 산당에서 야훼의 계시를 받음으로서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집트 왕권의 경우, 파라오는 자신의 계시를 받는데, 꿈이 매개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다음에 그는 제사를 지내며 이러한 사실을 고관 및 관리들에게 알리는 것이지요. 솔로몬왕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브온에서 꿈을 꾼 후 예루살렘으로 가서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솔로몬의 꿈에 관한 기사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유사한 것은 토트메스 4세가 성소였던 기제의 스핑크스상에서 꿈을 꾸다가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기사입니다. 이런 비문들에서 인용한 이집트 왕의 문서를 보면, 신은 왕이 나기 전부터 그를 택하여 그에게 특별한 임무를 위임했으며, 또한 신은 그의 어린 시절 동안도 내내 그를 보호해 주었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7) 야훼가 그를 왕으로 삼았다고 선수치듯 이야기하는 솔로몬의 말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파라오들이 신의 특별한 계시를 주장함으로 자신들의 획기적 제도들 공적들을 보도하는 이집트 문학의 한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여 왕위승계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 주어진 열왕기상 36-8절의 주제입니다.

 

자신은 왕이 되었으나, 자신 스스로가 왕으로서의 특별한 정당성을 찾고자 노력한 삶의 한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들도 이렇게 우리의 특별함을 계속 발견하고자 하는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먹히는 삶]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찾게 도와줍니다. 요한복음서는 디오니소스의 제의에서 행하는 날고기를 찢어 먹는 의식인 식인풍속을 차용합니다. 디오니소스는 포도주와 황홀경의 신인데, 숭배자들은 포도주를 마심으로 디오니소스 신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인다고 믿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술잔치의 절정은 소의 생살을 조각조각 뜯어서 그 생살을 먹는 의식인데, 이것을 통해 참여자들은 디오니소스의 힘을 먹는다고 믿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런 제의를 가져와 요한공동체가 믿는 확신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수는 다른 살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내어준다. 여기에는 예수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이 있음을 그래서 예수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행위는 오로지 완전하게 인자를 받아들이고 그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요한공동체야말로 나의 희생과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찬을 의미하는 이 본문은 결국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행하는 성찬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살을 먹고 누구의 피를 마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동안 다른 사람의 사상을 먹고, 다른 사람의 이론을 마시지 않았던가요? 그렇게 바깥에서 다른 이들의 살을 먹기만 하다 보니, 점점 더 눈치보고 갇혀진 속박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자유, 독립, 통합을 이루도록 안내하신 분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배고픈 것은 먹을 양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부족해서, 이 땅의 사람들이 목이 마른 이유는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거룩한 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를 만나고 스승으로 관계해 나간다는 것이고, 내가 나가 되어가는 길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나 되어가는 길이 무엇인가? 오늘 성서는 복음서는 51절에서 이렇게 안내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6:51)

 

이 세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신비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먹히고자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늘에서 이 세상에 온 것은 다 밥이 되어 결국은 먹힘이 되고자 온 것입니다. 그러니 그 밥을 우리가 먹고 생명의 힘을 받아 우리의 또 다른 이들에게 밥이 되어 살아가라. 사람을 살리는 맛난 밥!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먹으려고만 하는데서 생깁니다. 서로가 먹으려고 아우성치는 곳이 바로 지옥이겠지요. 그저 남의 살만 뜯어먹는 삶이다보니, 상대가 보이지 않고, 내가 하늘의 부름 받은 귀한 밥의 존재임을 잊어버립니다. 한술 더 떠서 밥을 주지는 못할망정 다른 이와 나누는 밥조차 빼앗으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14일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 주간 뜨겁게 달군 가운데 어제는 안희정 무죄판결 반대를 위한 집회가 있었습니다. 이 판결은 결국 현행법의 한계를 떠나 가해자 측 입장을 옹호하는 권력에 손을 들어준 결과였습니다. 혐의는 있는데 입증자료가 없어서 무죄라며 권혁의 힘 아래 행한 성폭행을 단순한 불륜으로 덮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억압적 구조의 사회에서 그간 성폭력이 무죄가 되는 경우를 많았기에 이번 사건도 그렇게 처리되는 것인가하는 우려가 됩니다. 여성에게 안전할 수 있는 평등한 법이 만들어져야겠지만, 현재의 이런 수준으로 과연 평등한 판결이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결과 이후 권력형 성폭행이 줄줄이 무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런 판국에 한 술 더 떠서 김기덕 감독 같은 이들이 자신의 범죄를 속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폭행한 여성들을 향해 명예회손을 걸겠다는 기사를 접합니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남의 살과 피를 빼앗아 먹는 악한 dlefm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악한 일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밥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요?

 

[맛난 밥으로 살기]

 

에베소는 식민지 역사에도 불구하고 상업이 성행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내외로 위협을 받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거기에 공동체 내부는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유대계 그리스도인 사이에 긴장관계로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존재하는 가운데, 에베소 공동체는 안과 밖으로 상호간의 화해와 평화로써 통일된 교회의 모습을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진 에베소 본문은 삶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이야기합니다앞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라는 촉구 다음에 전개되는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교 실존의 위협을 의식하게 하였으며 어둠의 침입에 대해 힘을 다해 저항하라고 공동체에게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항하는 가운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혜롭게 살아가기도 하고 어리석게 살아가기도 하는데 이제 제대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 올바른 목표를 위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실행에 있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아둔한 상태는 나만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어리석은 자로 만듭니다. 그의 수준으로 타인을 깎아 내려서 내 수준만큼 무참히 무너뜨리려 합니다. 내 수준을 높이며 살기보다 남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낮은 평균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늘 괴롭습니다. 공동체는 싸움 속에 처해 있기에 상황마다 변화하는 곳 속에서 새로운 결단이 요청됩니다. 그러니 건강히 나아가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어떻게 주의 뜻을 파악하고 지혜롭게 처신할 것인가를 고민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동식 선생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인간이 추구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에 동참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인간의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실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곳이 곧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생명은 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갖게 된다. 생명의 차원이 높아지는 것이다. 즉 생명의 차원이 높아질수록 생명의 내용은 풍요로워진다. 일차원적인 육신의 생명에만 집착하는 사람에 비해, 이차원적인 정신적 생명을 지닌 사람은 두 차원의 생명세계를 함께 산다. 다시 삼차원의 영적 생명을 지닌 사람은 통전적 우주의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풍요로운 생명이다. 예수가 오신 이유도 바로 풍요로운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생명이란 곧 생활로. 가치를 창조해나가며 사는 삶, 우리가 나아가야할 삶이다.”(풍류도와 요한복음, 85p)

 

저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일, 소위 버킷리스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두 가지를 이루고자 노력 중인데, 그 중에 한 가지는 이미 실천 중에 있습니다. 두 가지는, 스스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배우는 것, 그리고 어설프더라도 소소하게 거리에서 연주해보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어려웠는데 요즘 그 기회가 생겨서 악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기타와 장구의 매력에 빠졌는데 참 묘한 지점은 같은 자리 같은 박자를 연주하는데 가르쳐 주는 선생님과 저의 소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연습과 시간, 그렇게 쌓인 실력차이가 있는 것이지요. 제소리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분명 스승과 초보를 가리는 차이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생명의 맛이 꽉찬 밥으로 이곳에 보내셨습니다. 우리의 존재대로 진짜 삶을 살아가려면 매순간을 실행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 삶이 주님으로 받은 깊은 삶의 울림이 있어야 그것이 제소리를 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밥이 되어 먹힘이 되는 삶임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맛난 진지를 차릴 시간입니다. 이왕 먹힘이 되는 귀한 삶 마지못해 맛없는 밥 주지 말고, 맛있게 잘 지어서 많은 이들이 제대로 행복히 먹을 수 있는 밥, 생명을 살리는 밥이 되길 바라며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그대의 존재는 신이 준 선물이다.

모방하지 말라.

그대 자신이 되라

신은 그대를 더없이 사랑했다.

그래서 그대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특별함은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대는 이미 특별하다.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깨달아라.”(오쇼 라즈니쉬)

그러니 신의 사람들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며 맛난 밥으로 그들과 함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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