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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양식 | 김희헌 | 2018-08-05

by 김희헌 posted Aug 05, 2018 Views 467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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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8-05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양식 (16:2-4,9-15, 4:1-16, 6:24-35)

2018.08.05. 성령강림절 열한 번째 주일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향린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체로 종교적 갈망이 강합니다. 일반적인 교회와 문화가 달라서 그 겉모습이 투박하고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맘에는 구도자적인 진심이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교우관계나 공동체 활동에서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긴장과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각자의 종교적 갈망이 상대방의 신앙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공동체의 감각을 기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영적인 여행은 두 가지 모습을 갖습니다. 하나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둘은 상반되는 모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익히지 못하면 영적인 여정이 왜곡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되는 것도 쉽지 않고, ‘자신을 넘어서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스스로 의도하여 획득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진하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입니다. 진정한 자기를 얻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자기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참 된 자신이 되기 위해서 많은 구도자들이 교회나 절에 다니거나, 자기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중요한 또 다른 문제는 어떻게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해도, 그것이 거짓 자기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참 자기를 울려서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각자가 가진 정신의 기질에 따라서 구도의 방식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불교는 자기 자체를 아예 해체해버리는 방식을 택한다면, 기독교는 참된 자기가 될 수 있는 삶의 표본을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그를 본받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더 솔직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현명하게 선택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가 없다고 본다면 무언가를 꾸며서 위선을 떨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선택이 곧장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자기 자신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다 보니 바람과는 달리 한계에 봉착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좇는다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거나, 자기 모습을 닮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그리스도로 섬기는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런 실패가 반복되기 때문에,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아우르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남에게 의존하는 종교성에 익숙해지기도 합니다.

기독교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많은 구도자들이 그들 자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자유로운 그대로의 모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수고를 하며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성을 가지려고 노력한 끝에 몸과 마음이 지쳐버립니다. 거기에는 자만과 경쟁과 열등의식이 숨어있습니다. (토마스 머튼, 명상의 씨)

우리가 종교생활을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무슨 업적을 남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선 참 된 자기를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서 중요한 것 하나는 이루었다고 하겠습니다. 함께 신앙공동체를 일구어가는 것도 바로 그런 영적인 여행을 서로 돕기 위한 토양을 가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 / 출애굽기 162-4,9-15]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노예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자유민으로서 살아가는 여정의 초창기에 맞은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유와 배고픔의 관계를 다룬 것으로서 전형적인 종교적 구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만이 아니라 신앙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을 줍니다. 그 주제는 자유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추구해야 할 양식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사람들이 맞은 첫 번째 어려움은 목마름과 배고픔이었습니다. 어려움에 봉착한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주님의 손에 죽게 했더라면 좋을 것을, 당신들이 이 광야로 끌고 와서 모든 회중을 굶어 죽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3)

이 원망에는 정돈되지 못한 두 가지 요구 사항이 서로 엇갈려 있습니다. ‘이집트의 고기 가마로 상징되는 종살이 시절에 속한 환상그들의 운명에 관여하는 야훼의 손길에 대한 기대가 서로 비틀리면서 불만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맞고 있는 광야의 굶주림을 원망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이집트의 종살이를 미화하는 반면, 야훼의 돌보심을 죽음과 결부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자유민으로서 감내해야 할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못할지언정, ‘종살이에 속한 죽음의 요소해방에 속한 생명의 요소를 뒤바꿔서 말하거나, 야훼를 모독하면서까지 자신들의 목소리를 구성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광야로 나온 사람들로서 자신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주목해야 했습니다. 자기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들이 찾아야 했던 것은 배불리 먹고 죽는 길이 아니라, 배고픔을 이겨내고 계속 걸을 수 있는 해방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혼재된 욕구로 뒤범벅이 된 그들의 마음은 가야 할 그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먹을 것을 비처럼 내려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은총만이 아니라 분노가 담겨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그들이 지시’(torah)를 따르는지를 시험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려주신 음식의 특징은 맛에 있지 않고 보관방식에 있습니다. 만나는 적게 거두어도 부족하지 않고,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염려하며 남겨둘 경우에는 모두 썩고 말았습니다. (18/20) 바로 그 특징으로 인해, 만나는 광야생활을 하면서 자유민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할 사람들에게는 시험이자 가르침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광야의 삶을 견디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양식의 분량에 대한 감각을 익혀야만 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광야의 시험에서, 사람들은 그 길이 소유(having)의 크기에 있지 않고, ‘존재(being)의 방식에 있다는 사실을 익혀나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십 년의 광야생활 동안 이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날마다 내려주셨습니다. 아침마다 서리처럼 내려서 온 광야를 하얗게 뒤덮은 음식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이냐? (man hu)’ 하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단지 음식의 이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에 관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찾는 대화 / 요한복음 624-35]

요한복음 본문은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생명의 양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고달픈 삶에서 생겨난 즉자적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를 찾아 다녔지만, 예수를 만나 대화를 하는 가운데 자신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찾아다니는 무리들오클로스(ochlos) , 갈릴리 민중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를 찾아 헤매는 가운데, 맨 먼저 간 곳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던 장소였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의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암시해줍니다. 배고픔의 해결입니다. 그들은 배고픈 사람들이었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찾아 헤맨 기적의 장소에 예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와서야 비로소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만나고 난 후의 이야기는 네 번의 대화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대화에서, 이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선생님(rabbi),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 질문은 욕망에 묶여 아직 깨어나지 못한 물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를 찾아온 그들의 동기가 빵을 먹고 배가 불러 만족(chortazo)’했기 때문이지, 시대의 표징’(semeion)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꾸짖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강조한 것은 보는 것입니다. ‘본다’(horao)는 말은 단지 시각의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깨우쳐서 분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배부름에 만족한 상태에서 시대의 징표를 보지 않는 그 사람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27)

이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신의 계보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배부름에 만족하는 사람은 썩어 없어질 양식을 추구할 것이요, 시대의 징표를 보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길을 제시함으로써, 예수님은 그들의 삶의 관심과 경건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바쳐지고 있는지보도록 합니다. 그 순간 갈릴리 민중들은 번뜩 깨우침을 얻습니다.

이들의 두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8) 깨어나 묻는 이 첫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들의 즉자적인 욕망을 따라 묻는 물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들이 원하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분간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나 묻는 민중을 가리켜서 한완상 선생은 대자적 민중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고자 삶을 깨우친 대자적 민중이 묻는 물음이 바로 그 두 번째 물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이 물음을 던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종교의 계보가 달라집니다. 그런 질문이 없는 즉자적 민중은 피동적인 대상으로 살아가면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섬기는 종교 종살이를 할 것이요, 반면에, 바로 그 질문을 던짐으로써 깨어난 민중은 능동적 주체가 되어 일어나, 참된 자기가 되어 살아가도록 부르는 해방의 메시아를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번째 질문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29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pisteuo)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하기에 앞서 믿으라고 합니다. 정치에서 행위는 가치를 구현해가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종교에서 행위는 믿음의 부산물에 가깝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진실로 믿을 때, 거기에서 새로운 행위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어지는 두 대화는 요한복음이 강조하는 주장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이 예수에게 간구한 것은 성경에 나오는 만나와 같은 하늘의 양식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이요,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대화는 종교적 삶의 심오한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모신 삶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질 육의 양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영의 양식에 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생명의 양식을 얻고자 했던 에베소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서 보겠습니다.

 

[장성한 믿음을 얻기까지 / 에베소서 41-16]

바울은 에베소의 교우들에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가면서, 마침내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라고 권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klesis)에 합당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띠로 서로를 묶고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으로 바울이 제시한 것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유와 인종과 성별의 차이와 장벽을 허무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 되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옵니다. 서로가 달라도 사랑은 상대방을 용납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 되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오지만, 거꾸로 사랑이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된다는 미명하에 생겨나는 억압과 구속을 압니다.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사랑이 부패할 때 하나의 정체성에 기초한 사랑이 번성한다고 말합니다. (공통체, 264) 그것은 자신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럴 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요구는 자신과 닮은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일 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배제해야만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기독교적 억압과 증오는 복음이 왜곡되고 사랑이 부패할 때 생겨납니다.

우리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6절에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설명은 소위 범재신론이라고 기독교 사상을 잘 대변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 위에 계시고, 모든 만물을 통해서 계시고, 모든 만물 안에 계십니다.그렇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은혜를 받고,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도,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지어가기 위해 봉사(diakonia)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지어가도록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말할 때에도 사랑으로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그리스도에게 이르러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속임수나 술수에 빠져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치함을 벗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14)

실제로는 유치한 생각에 갇혀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종교적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에 정통한 듯이 꾸미고, 종교적 비밀을 모두 소유한 듯이 거드름을 피우는 곳에는 온갖 잡신들이 아무런 규율도 없이 출입합니다. 자신을 꼭 닮은 신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성숙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6) 이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히 이 세상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대안이 되고자 합니다. 저항은 대립적 태도에 갇힐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대립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사랑으로 새로움을 잉태하는 것에 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이 어두워도, 사랑으로 잉태되는 모든 새로움에는 그리스도의 자취가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 그 혁명적 아름다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자라나게 하는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헤셸은 인간이란 강하고 위험해서, 단순히 조물주의 노리개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251) 인간이라는 우주생명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목적을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찾으려면, 자기 자신을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목적을 자신에게 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남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것은 욕구라기보다는 본성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눈앞에 보이는 비극을 소재로 삼아 절망을 제작하는 신학은 인간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현실의 괴로움을 영적인 소재로 삼기에 익숙한 종교는 잠시 인간을 현혹할 수는 있어도 끝까지 이끌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광활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세상을 꿰뚫는 공정한 사명을 찾고자 하고, 그 사명을 발견할 때에는 그걸 이루기 위해 자신을 바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서 궁극적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 세계 자체가 의미를 요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는 것이요,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양식이 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혁명이 오려면 그걸 꿈꾸는 이상이 혁명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꿈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현실의 무게를 지고 일어서는 우리들의 모든 믿음의 모험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양식을 얻는 노동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신을 닮은 그리스도에 만족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닮은 자신을 가꾸기에 힘쓰십시오.

사랑으로 새로움을 잉태하는 일에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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