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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고요하고 잠잠하라 | 김희헌 | 2018-06-24

by 김희헌 posted Jun 24, 2018 Views 52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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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6-24

고요하고 잠잠하라 (38:1-11, 고후 6:1-13, 마가 4:35-41)

2018.06.24. 성령강림절 5 / 남북화해주일

 

[죄의 연대성과 인간혁명]

오늘은 남북화해주일입니다. 내일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8주년이 됩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큰 비극이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정복하려는 대결 정신이 사회를 지배하였고, 오늘날까지 치유되지 못한 상흔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토록 큰 고통을 당했으면서도 왜 전쟁이 벌어졌는지, 또 아픔을 겪은 남과 북이 왜 그토록 긴 시간을 반목과 대결로 살아왔는지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전쟁의 촉발이 남침이었는지 북침이었는지 단순화하기도 어렵고, 전쟁의 성격이 인민해방의 내전이었는지 제국주의가 뿌린 씨앗으로 인해 벌어진 국제전이었는지 단정하기도 힘듭니다.

전쟁의 결과로 생겨난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떻습니까? ‘순국선열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상징적 힘을 갖게 되자 이전 시기에 반드시 판가름했어야 할 친일과 항일의 구분과 심판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후 애국과 매국에 대한 논란은 복잡해지다 못해 아예 길을 잃은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식민통치의 범죄를 저지른 일본은 패망 이후의 어려움을 뚫을 활로를 한국전쟁을 통해서 얻게 되면서 다시 시혜를 베푸는 나라처럼 굴게 되었고, 해방 조선을 마치 패전국처럼 다루며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군사주권만이 아니라 정치주권까지도 좌우하는 무소불위의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뒤틀린 역사가 만들어낸 복잡한 사회적 관계에서, 우리 민족에게 정치는 늘 중요했지만 정치만으로는 답을 얻기 어려웠습니다. 얽히고설킨 대립과 반목의 긴 역사에서 어쩌면 모두가 가해자였고 모두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치적 이성만으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남과 북이 모두 같이 살아왔던 한민족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앞으로 같이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 역시 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토록 긴 우여곡절의 세월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을 얻었을까요?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 선생은 인간혁명이라는 글을 씁니다. 무엇이 혁명인지를 묻는 것이지요. 죄악과 불의가 쌓였을 때에 사회를 바꾸기 위한 혁명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죄인 몇을 처형하고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는 죄악을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은 정치혁명만으로는 안 되고, ‘인간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인간혁명을 담당하는 것을 종교로 보았고, 종교는 혁명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고치면 혁명이고 인간을 고치면 종교인데, 혁명이 바깥이라면 종교는 안이라고 말합니다. 둘이 같이 가는 것이지요. 함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혁명은 죄와 싸우는 것이다. 흔히 사회악과 싸운다는 말을 하지만, 혁명은 사회악과 싸우는 정도만이 아니다. 사회악과는 물론 싸워야 하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보리밭에 깜부기를 뽑는 일이다...... 죄를 잡으려면 죄의 법을 알아야 한다. 죄는 단일범이 아니다. 모든 죄는 다 공범이다. 죄는 내 죄 네 죄가 아니다. 우리 죄, 인간의 죄, 전체의 죄. 죄는 종족적인 죄요, 역사적인 죄다. 아담이 지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함석헌 저작집 2:, 100)

우리는 모두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의 삶의 의미와 계획도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며 형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그 해결책을 매끈하게 얻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복잡한 삶의 관계는 한 개의 열쇄로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제를 단박에 결단하여 해결하는 길을 인간혁명의 과정을 통해서 얻기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그런 심정을 대표하는 성경속의 인물이 욥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실 때조차 / 욥기 38:1-11]

욥기는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고통 속에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을 대화형식으로 보여줍니다. 욥의 고난은 사탄과 하나님의 내기 시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우화적인 표현은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궁여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당하는 욥을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하다가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지요. 친구들은 각자의 주장을 늘어놓았지만 욥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욥이 세 친구의 주장을 하나씩 반박하자, 친구들은 욥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합니다. 욥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잃고, 하나님의 해명을 직접 듣고자 했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과의 논쟁이 끝난 후에, 엘리후라는 젊은 신학자가 등장하여 욥이 고통당하는 이유를 매끈하게 설명(32-37)합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치밀한 신학적 설명은 도리어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것은 말찬치에 가깝지, 의인이 고난당하는 현실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엘리후에게 대꾸조차 하지 않습니다.

엘리후의 강연이 끝나고, 오늘 본문에서 욥이 그토록 원했던 하나님(Yahweh)이 등장합니다. 38장부터 41장까지 넉 장에 걸쳐서 하나님은 욥에게 말합니다. 욥에게 하나님의 말은 어떻게 들렸을까요?

욥기의 편집자는 책의 구성을 그럴 듯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욥이 회개를 하고 다시 축복을 받았다며 이야기를 수습하고 마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은 구성입니다. 애초부터 욥의 고난은 욥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축복을 다시 받는다는 발상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욥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욥이 당하는 고통에 의미와 해명을 주는 말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욥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이 폭풍(ca'ar)은 욥의 심정을 상징하는 현상처럼 보입니다. 욥은 도그마에 의존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속설에 맞서서, 고통의 문제를 해명해 줄 신의 진실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매우 모호합니다. 2절을 보면,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하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욥을 직접 꾸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정직한 욥을 매도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무죄한 자의 고통을 항변하는 욥의 목소리는 마치 헛된 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는 주장이 될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시작된 이유 중에는 사탄과 내기를 한 신의 책임이 있는데, 이제 시간이 지났다고 항변하는 욥을 거꾸로 비난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신의 갑질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2절의 질문이 누구를 겨냥한 것이냐하는 점이 밝혀져야 합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문대로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무지한 말로 나의 뜻을 어둡게 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것은 욥에 대한 말일 수도 있고, 욥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주장이 아니라, 질문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했느냐?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무엇이 땅을 잡고 있는지,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는지 아느냐?

이 질문은 모두 신의 창조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 질문을 통해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절대적인 간격이 강조됩니다. 문제는 이런 질문들 역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욥의 갈망을 푸는 직접적인 답변이 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말을 했으면 뭔가 속 시원한 해명이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사탄하고 내기를 하느라 네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참 미안하게 되었다거나, 나도 복잡한 인간사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네가 알아서 참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궁금증이라도 풀릴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답이 명확하지 않은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욥기의 무능처럼 보이기보다는 이 책의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삶의 복잡성과 생의 신비에서 정답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설명하겠다고 하면서, ‘신의 뜻을 들먹이며 경건한 주장들을 했습니다. 욥기는 거기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욥은 누가 해주는 말을 듣고서는 답을 얻지 못하며, 자기 눈으로 신을 보고자기 심장에 신의 교훈이 새겨질 때까지 나아가려는 (42:5) 인간의 갈망과 운명을 대변합니다. 수행 없는 종교, 성찰 없는 이성거룩한 언어를 손쉽게 남발하면서 마치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기라도 하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조차인간은 더 큰 물음을 갖게 될 것이라는 냉정한 사실을 말해줍니다.

삶에서 고통당할 때, 우리는 신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만, 고난의 장막을 찢을 수 있는 묘안은 쉽게 생기지 않으며, 우리는 대부분 찢긴 상처에 고통당하며 그 아픔의 의미를 들여다봐야만 하는 현실을 살아갑니다. 욥과 같이 폭풍이 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을 안고 마가복음서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바다의 평온 vs. 제자들의 공포 / 마가 4:35-41]

오늘 복음서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다에서 풍랑을 잠잠케 한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런 기적 이야기를 앞으로 석 주간 읽게 될 것입니다.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잘못된 종교적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중 하나는 신화적인 믿음에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을 다스리는 기적을 베풀 능력 정도는 있어야지 신으로서 추앙받을 자격이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신화적인 요소에 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날수록 무엇이 진정한 기적인지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허무한 종교논리에 걸려 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진리를 문자에서 찾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 믿겨지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믿겨지지도 않는 것을 대충 믿는 그런 대갈통이 어떻게 하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그렇게 믿어준다고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는 그 상징적인 의미체계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에 관심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골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차례 반복되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성서에는 번역이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지만, ‘커다랗다’(great)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메가스(μέγας)입니다.

먼저 커다란 바람’(lailaps megalē, 37)이 불어서 배가 침몰할 것 같은 위기가 생기지요. 그 때 예수님이 일어나서 고요하고 잠잠하라!” 하고 말하십니다. 그러자 두 가지 결과가 생겨납니다. 바람은 그치고 커다란 평온’(galēnē megalē, 39)을 찾은 반면, 제자들은 커다란 공포’(phobon megan, 41)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대비를 통해서 마가복음이 전하려고 하는 뜻은 무엇일가요?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지요.

저녁이 되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시간계산으로 저녁이 되었다는 말은 새날이 시작되었다는 의미, 바다 저쪽으로 가는 것은 새로운 사역의 시작을 뜻합니다.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으니 새로운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바다를 지나갈 때 커다란 바람이 일어나서 풍랑이 거세져서 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말합니다. “선생님(didaskalos),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향해서 고요하고 잠잠하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꾸짖다’(epitimao)잠잠하라’(pephimōso)는 단어는 귀신을 쫓아낼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마가 1:25)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에 커다란 평온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아직도 믿음(pistis)이 없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믿음을 갖기는커녕,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 마지막 말을 들려주며 마가복음이 강조하려고 하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고 놀랐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책망대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그런 책망을 하셨나요? 거대한 바람과 풍랑으로 그들이 탄 배, 다시 말해서 그들의 공동체가 침몰할 위기에 놓였는데도, 제자들은 원망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이 말은 불평불만과 책임전가로 이뤄진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고, 그것은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할 수 있는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잔잔해진 바다만 보고 넋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고요하고 잠잠하라는 예수의 꾸짖음을 자신들에게 적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망한 것에 관심을 갖고 정작 핵심을 빗겨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두려움에 빠져서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때를 사는 하나님의 일꾼 / 고후 6:1-13]

고린도후서 6장 오늘의 본문은 신앙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직접적인 권고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1b) 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기생각에 빠져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거친 풍파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은 세계 속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둔감함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절규하듯이 말합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입니다! (idou, nyn euprosdektos kairos)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idou nyn hemera soterias)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3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표현, 떼오스 디아코노스(θεός διάκονος)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디아코노스, 일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22:27, 10:43-45)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의 삶이 어떠한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먼저 4~5절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실에 관한 열 가지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많이 참고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폭동과 수고하며 잠을 자지 못하고 굶주림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고통의 시간을 은혜의 때구원의 날로 보낼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꾼에게는 고유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6~8절에 10가지가 나옵니다.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과 양 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한 결 같이 살아갑니다.

따라서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은 독특한 경험합니다. 그것이 세속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살아가는 역동적인 실존의 구조9~10절에 7가지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살아 있으며,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꾼의 삶에 있는 역동성이라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한 가지 권고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넓히십시오!

 

[인간혁명]

복숭아 철이 곧 오겠지요. 함석헌 선생은 인간혁명에서 인간의 구조를 복숭아로 비유합니다. 복숭아가 껍질과 살과 씨로 이루어졌듯이, 인간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복숭아 껍질은 눈길을 끌만큼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지요. 껍질은 살과 씨를 지키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껍질은 아낌없이 버립니다살은 맛이 있고 영양이 풍부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런데 살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줍니다. 그것은 씨가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씨는 딱딱하고 맛이 없습니다. 귀하기 때문에 맛이 없는 것입니다. 맛이 있으면 다 먹어치우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숭아의 목적은 씨에 있습니다. 복숭아의 생명은 씨를 통해서 전해지고, 씨만 있으면 복숭아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산과 용모와 지식과 능력은 껍질에 해당합니다. 이것들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지만, 인간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인간의 속살에 해당하는 것은 인정입니다.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인간의 맘, 인정이 인간의 맛입니다. 인정이 있는 사람은 남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줍니다. 그런 인생은 즐겁고 풍성합니다. 하지만 인정도 인생의 목적은 아닙니다.

인간이 인정을 나누며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런 삶을 통해서 맘속에 자신의 속 알맹이를 키워보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목적은 뜻과 얼을 더 높이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을 기어 다니다가 머리를 하늘로 세우며 진화해온 인간의 역사겠지요.

우리가 그것을 뚜렷하게 깨달을 때, 바울이 오늘 본문 9-10절에서 말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실패와 좌절을 겪는다 할지라도 죄악과 불의에 파괴되지 않는 삶을 살며, 하늘에 잇대어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혁명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자매형제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려면 자기 사랑에 취해 벌이는 옛 잔치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새 사명을 위해 맘을 넓혀야 합니다. ‘고요하고 잠잠하라!’는 예수의 명령이 맘에 울려야 합니다풍랑이 거세어 배가 뒤집어질 것 같은 바다 한복판에서도 안식을 누리려면, 죄악의 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맘이 넓어져야 합니다.

향린 공동체가 그런 인간혁명을 벌여나갈 수 있는 근거지로 자라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거대한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잠잠하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읍시다.

하나님의 은총을 헛되게 여기는 풍조를 따르지 말고,

지금이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간혁명을 벌여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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