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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뜻펴기

만물의 안식 | 김희헌 | 2018-06-03

by 김희헌 posted Jun 03, 2018 Views 310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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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8-06-03

만물의 안식 (5:12-15, 고후 4:5-12, 2:23-3:6)

2018.06.03. 성령강림절 2 / 환경주일

 

[환경주일에 생각하는 생태영성]

오늘은 환경주일입니다. 교회를 들어오다 보면 정문 오른편 기둥에 녹색교회라는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NCCK 생명윤리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2009년에 우리 교회를 녹색교회로 지정하여 붙여준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생명환경위원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는데, 농촌을 살리고 자연을 사랑하며 일하는 그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금년 환경주일에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는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플라스틱의 문제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분해가 되는데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에, 잘게 부서져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해악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되는 물질입니다. 특히 해양으로 방출되는 플라스틱의 문제는 심각하지요. 해마다 1천만 톤 가량의 플라스틱이 해양으로 누출되어 해양생태계를 교란하고, 결국 자연의 역습이 되어 인간에게 그 후과가 돌아옵니다.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하여 먹고 사망하는 고래가 전체 사망률의 56%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들의 생활방식이 지구생명체에게 죄악이라는 말이 과장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점차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비문명에 길들여진 생각과 삶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문 앞에 달린 녹색교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생태적인 영성에 기초한 활동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생태적인 삶이란 관계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환경과 자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아는 생각입니다. 이 깨달음에는 근대가 추구해온 문명이 개발주의와 소비주의로 실패했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이 담겨 있습니다.

근대를 살아온 사람은 자신들이 마치 환경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에는 폭력적 이기심이 담겨있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근대에 길러진 주체적인 인간은 관계성의 비전을 상실하고, 유아론적 나르시시즘에 빠져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을 진리 실현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상대방을 파괴하는 일에 소비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근대적 유형의 인간이 추구했던 해방이란 것도 결국 적으로 간주된 타자를 정복하여 얻은 전리품이었고, 그것은 공동체의 유기적 관계가 파괴된 후에 남은 부산물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으로서는 무언가를 얻을지 모르지만, 전체로 보면 파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에 눈 뜬 것이 생태적 감수성이요, 생태영성입니다.

이런 감수성과 영성에 기초한 생태운동은 이전 시기의 사회변혁운동이나 종교적 삶의 방식에 큰 도전이 됩니다. 생태영성을 가진 신앙인은 공동체적 관계성을 통해서 해방을 함께 나누는 삶을 꿈꿉니다.

생태영성이 기독교 신앙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면서 얻게 된 소득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이 자폐구조에 빠졌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전의 기독교회는 세상이 어둡고 악한 이유를 기독교적 이상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데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생태신학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 이상의 구현방식 자체가 역사적으로 죄악의 실제 원인이 되었다는 냉정한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승리주의적인 근대이성의 구미에 맞게 변모되어 오면서 사람들에게 깊이 있는 종교적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교회는 담대한 모험을 선택하기보다는, 성공주의와 소비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우상을 복음의 이름으로 불러내어 연명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른 삶을 꿈꾸며, 다른 문화를 체득해내야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안식일과 관련된 주제입니다. ‘만물의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성경말씀을 생태적 눈으로 읽어보고자 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의미, 5:12-15]

신명기서 본문은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 계명,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위한 유대교의 안식일 규정은 엄격합니다. 글자로 기록된 율법(토라)인 오경(五經)에는 안식일법의 세부사항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구전(口傳) 율법을 채록한 책인 미쉬나에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위를 39개의 범주로 나눈 자세한 규정(Melachot)이 있습니다. 이 책을 만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영성을 율법에 대한 충실성’(fidelity)에서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의 경쟁을 통해서 정립된 기독교의 영성은 이와는 다릅니다. 율법조항 자체에 대한 충실성보다는, 그 율법이 작동되는 사회적 맥락과 상황에 주목합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안식일법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충실성보다는 감수성에 방점을 두었다고나 할까요. 종교영성의 거처를 기성 율법에 대한 충실에서 찾기보다는, 다가오는 나라에 대한 민감한 느낌에서 찾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신명기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 규정,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성서의 명령도 바리새인처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따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은 일차적으로 쉬라는 말입니다. 12절에서 거룩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다쉬(קָדַשׁ)는 성별(聖別)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엄숙한 마음으로 일상의 흐름을 끊고 안식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그 쉼이 거룩한 이유는 자본의 지배와 통제로 허용된 휴식이 아니라 평등한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루어진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안식일 규정에서, 쉬는 사람은 주인만이 아니라, 자녀들, 종과 짐승, 식객들까지 포함됩니다. (14) 다시 말해서, 이 쉼에는 평등과 해방의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등한 안식을 해야 하는 이유가 본문 15절에 나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규정의 실제 의미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놓치고 있던 보다 중요한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법은 단지 행위금지의 율법 규정이 아니라, 해방의 때를 기억하면서 평등세계를 연습하라는 보다 적극적인 믿음 규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며, 인간의 기억도 변합니다. 종살이를 실제로 하던 때는 분명히 아픔과 고통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된 상황에서 다시 소급된 아픔의 기억은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억되는 것은 구원의 때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15절은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너희를 거기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히브리인들의 피동적인 구원경험에 대한 서술이 아닙니다. 이 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은총의 실상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세계의 겉모습은 절망적일 때가 많습니다. 종교는 특히 세상에 대한 절망감과 씨름합니다. 이 씨름을 진행하는 믿음겨자씨처럼 자라나는 하나님 나라를 보며, 이 땅에서 하늘 은총이 꿈틀거리며 사랑이 승리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를 이미 자기 안에 담은 믿음입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안식일 규정은 바리새적 행동주의 규범이 아니라, 은총의 세계를 향한 모험적 믿음의 삶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 세속의 질서를 단호히 접고, 은총의 세계에 속한 경험이 너희 삶에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안식일의 정신은 인간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만물의 안식을 통한 우주의 평화까지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식일 정신이 확대된 안식년 규정은 인간과 동물만이 아니라 까지도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25:5) 그렇다면, 만물이 안식하며 평화를 누리는 세계를 너희 삶에서 실험하라는 것이 안식일 규정에 대한 오늘의 해석일 것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역설, 고후 4:5-12]

로마제국이 지배하던 시대에 예수정신으로 삶을 실험한 사람 가운데 바울이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인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그 삶은 역설적인 삶입니다. 역설적 삶이란 형식논리가 지배하지 못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라는 상징을 활용합니다.

형식논리가 지배하는 삶은 질그릇에는 천한 것을 담지, 보물을 담지 않는다는 논리의 삶입니다. 흙수저는 흙수저의 삶을, 금수저는 금수저의 삶을 산다는 논리입니다. 세속의 논리요, 지배의 논리요, 자본의 논리입니다. 또한 대결과 갈등의 논리입니다. 현실을 살려면 따라야만 하는 논리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건 한낱 관념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실상은 하나님의 은총이 깃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의 논리를 따른 삶은 질그릇에 보물을 담는 삶입니다. 현실의 무게를 안고 고투하는 힘겨운 삶이지만,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담겨있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구조를 가진 생명세계에 대한 인식이 현실의 지배구조를 털어내는 해방의 정신을 대변하고, 과거의 어둠을 물리치는 화해와 믿음의 논리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이 머물고 있는 이 세계의 실상을 증언하는 실재 철학입니다.

종교영성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영성이란 이 세계를 무슨 눈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이 세계를 어떤 눈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향해서 살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영성이 삶을 이끈다는 말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역설의 논리 즉, ‘질그릇에 담은 보물에 관한 역동적인 사상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언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가 증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자신을 강변하면 할수록 로마의 식민 질서 그물에 걸려 파닥거리는 초라한 인간 밖에 드러낼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두 가지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그 주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종으로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피동적인 굴복이 아니라, 하늘의 은총을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자신을 내어주는 자발적인 복종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종으로 내어주는 세계는 화해와 해방의 세계가 됩니다.

어떻게 이런 삶이 바울에게 가능했을까? 그 까닭이 6-7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은총을 깨닫고 혼연일체가 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이 마음에 빛나고 있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 마음은 자기가 짜낸 종교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보물처럼 우리 안에 담겨 있을 때, 비록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삶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능력을 소유한 삶이 됩니다.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해도(afflicted) 움츠러들지(crushed)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perplexed) 낙심하지 않으며(driven to despair), 박해를 당해도(persecuted) 버림받지(forsaken)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struck down) 파멸하지(destroyed) 않습니다.” (4:8-9)

이런 역동적인 삶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신의 마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내맡긴 삶에 임하는 축복입니다. 이 삶은 역설적인 삶입니다. 살기 위해서 죽는 것이요, 죽음으로써 사는 삶입니다. 10-11절에서 이어지는 바울의 고백을 듣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10-11)

생명세계의 실상은 역동적이기 때문에 빈약한 형식논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역설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의 지혜, 꼴찌처럼 사는 자가 첫째가 되며, 종이 된 자가 세상을 구원하며, 죽음으로써 복종하는 자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법입니다. 관념적인 지배 논리는 이런 삶의 진실을 부인하고 감추고 눌러 질식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어난 삶은 모험이요, 대결이 됩니다.

 

[손을 내밀어 새 세계를 열어라, 마가 2:23-3:6]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안식일에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을 전합니다. 밀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 이야기회당에서 손 마른 병자를 고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안식일법의 규정으로 생명을 억누르는 바리새인들과의 대결을 다루면서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생명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걸어갔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는지 밀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뒤집어서 말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직관적인 말에 담긴 해방의 힘은 율법의 위협을 단숨에 이겨냅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병든 종교의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관심한 것은 고작 사람을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기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대결을 더 극적으로 끌고 갑니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손 마른 사람을 향해 한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합니다.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룩한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저 율법의 굴레를 어떻게 벗길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4)

사람들은 침묵합니다. 어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율법의 그물에 걸려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죽음의 그물을 씌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처음에는 분노 하였다가, 그들의 심장이 굳어버린 것을 아시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묶인 침묵이 억압적 질서의 공범이 된 그 세계를 치유하는 해결책은 가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아픈 사람에게 말합니다.

손을 내밀어라!”

그가 손을 내밀자, 말랐던 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간결한 사태는 죽었던 세계에 숨통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부여합니다. 안식일 법에 묶인 병자는 고침을 받았고, 회당 안은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진실이 환히 드러난 세계로 변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안식은 평화를 향한 새 삶의 길]

우리 민족은 바로 이러한 해방 사건을 최근 연이어 경험하고 있습니다. 분단과 전쟁이 만들어낸 율법들이 오랫동안 행사해온 마력을 잃고, 한반도에 숨통이 뚫리면서 새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분단시대의 율법으로 스스로를 얽어맨 사람들은 가련한 몸부림을 마지막까지 벌일 모양입니다. 이 율법의 바리새인들은 시대를 거꾸로 되돌리기 위해 갖은 모의를 다하고 있지만, 이미 생명의 진실은 밝혀지고 말았습니다. 남과 북의 교류와 협력을 범법행위라고 말해오던 이 율법주의자들이 거짓과 협박을 통해서 지키고자 했던 것의 실상은 분단체제였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반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지고 간다는 당연한 이치가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분단시대를 살아오는 동안 갈등과 반목이 일상이 된 시대의 공기를 호흡해야 했던 사람들, 불안하여 안식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이 이제 서슴없이 평화를 그려내고, 새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대담한 능력을 고백한 바울의 노래가 우리 민족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방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파멸하지 않을입니다. (고후 4:8-9)

70여 년 동안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아온 남과 북이 대립과 갈등을 뛰어 넘는 새로운 문명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남과 북이 이루어가는 평화의 물결이 온 세계로 퍼져나가며, 인류를 짓누르던 낡은 율법들이 더 이상 우리 세계를 농단할 수 없게 되기를 꿈꿉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60년 전인 1959년에 새 삶의 길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토막을 읽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실 공산주의의 역사적 의미는 기존 종교에 선고를 내리는 데 있다. 공산주의가 있는 한 모든 종교는 낡아빠진 것이다. 이론의 가장 높은 것은 천당에 두고, 실천의 가장 두터운 것은 자선사업에 두는 종교를 가지고는 아마 공산주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무신론을 이기는 것은 유신론이 아닐 것이다. 보다 높은 자리에 서야만, 유신-무신이 문제되지 않고, 유산-무산이 문제되지 않고, 천당-지옥이 대립 되지 않는 자리에 서야 될 것이다. 예수가 (그 길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나.” (함석헌 저작집, 2:225)

잠시 침묵하겠습니다.

 

[파송사]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이 생명선언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만물이 안식을 누리는 은총의 세계를 마음에 품고

자기를 내어주고, 서로서로 돌보는 생태영성을 길러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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